14.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2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6:13上)
녹취자: 김미영
고마우신 하나님, 연약한 인생들을 주께서 도우시고, 특별히 오늘날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이처럼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서 오늘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며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하늘을 여시고,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옵소서. 머리 숙여 기도하는 사랑하는 모든 종들의 영혼을 이 주일에 만족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배드릴 때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하시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과, 그리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유아실에 있는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축복하셔서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아이들이 겸손하게 말씀을 듣는 부모들의 예배를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옵소서. 주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소원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라는 이 기도 가운데서 ‘시험에 당하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당하는 것이 어떻게 시험에 드는 것과 틀리는가’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경건한 성도라 할지라도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올바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모두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는 오히려 믿음으로 그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 그 당한 시험을 인하여 오히려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그렇게 시험을 이길 때에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큰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시험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신앙생활에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신앙생활의 위기가 될 수 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험에 든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시련을 당치 말게 하옵시며’ 그렇게 기도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며’ 그렇게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나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오히려 저는 종종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의 인생을, 또 우리의 인생을 결단코 평탄하고 안일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하셔서 그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순결해지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사는 믿음의 방법을 배우게 하옵소서’. 안일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역동하는 마음속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이 세상, 사망에 이를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평탄하고 안일한 길로 걸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뀌어 버렸지만 저는 옛날 찬송가를 좋아합니다.
(찬양)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그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날마다 나의 인생의 소망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는 신앙의 참된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과 신앙의 그 언저리에서 한 발은 신앙에, 한발은 세상에 담그고 그리고 ‘어느 길을 걸어가야지만 더 평탄할 까’ 그리고 ‘어느 길을 걸어가야지만 도전과 위기를 만나지 아니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다시 한 번 살아볼 가치가 없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따라서 언제나 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단련한 금과 같이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앞서 갔던 믿음의 많은 사람들, 어떻게 그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훌륭한 은혜를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면서 그 인생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사가 되도록 바꿀 수 있었습니까? 위기 속에서, 시련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했고, 자기에게 임한 그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하나님을 위한 은혜요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시련과 역경 속에서 보내었던 것입니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서 영혼을 움직이고, 그리고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안일한 사람의 심령을 깨워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기를 소원하는 강력한 도전의 음성을 가진 모든 설교자들은 신학교 말고 광야에서 베풀어주는 시련과 고난의 학교를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그 시련 속에서 세상의 사람과 세상을 향한 모든 소망과 기대를 끊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참된 등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축복된 시련, 이 축복된 시련의 기회를 자주 우리가 그 시련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악에 떨어지고, 그리고 죄를 짓게 되는 불행한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한 모든 사람들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오히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다고 하는, 시험에 빠진다’ 고 하는 이 말은 그 시험 속에서 인간이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부패한 죄 때문에 유혹을 받을 때 거기에 굴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이기면 신앙의 진보와 놀라운 영적인 진전이 있지만, 이 시험에 지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시험에 들어서서 거기에 빠지면 가혹할 정도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을 만날 때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모두 자기의 부패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또 같은 성경이면서도 사람을 향해 말하기를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그를 불러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한 산에 가서 나를 위한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했다고 말하는데 또 다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을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에 쓰여 진 묘사들을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쓰여 진 것이 있고 때로는 사람의 시각에서 쓰여지기도 합니다. 좀 더 바꾸어 말하면 하나는 본질적인 면에서 바라보면서 어느 한 사건을 기록하고 또 어떤 때에는 현상적인 면을 관찰하면서 기록을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태양이 어디에서 떠서 어디로 집니까? 태양이 어디로 떠서 어디로 집니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데 정말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려갑니까? 과학시간에 아마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 해가 왜 서산에 걸립니까? 지구가 도니까 그 산이 마침 서산이 그 태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이야기를 틀렸다고 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관찰하면, 과학적으로 얘기하면, 지구가 한 바퀴를 하루에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되고 또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하자면 이렇게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하루가 되었다라고 하는 이러한 시각이 나오고, 또 한편에서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공격할 때에 말을 타고 달리는데 해가 떨어지는 겁니다. 추격을 하는데 이 원수들이 도망을 가는데 어두워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해가 떨어지면, 어두워지면 그들을 잡지 못하고 놓치겠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태양아 멎어라’. 그럼 태양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난 가만히 있는데 왜 나보고 서라는 거야? 그럴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습니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 태양을 스톱시키신 것이 아니라 지구를 잠시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낮이 연장됐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표징을 보여 달라고 기도할 때, 일영표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습니다. 태양이 거꾸로 돌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그렇게 기도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바꾸신 것입니다. 기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애들이 혹시 물을 발음을 잘 못해서 ‘술 줘 술 줘’ 그러고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울부짖는다면 여러분 정말 술을 퍼 다가 젖꼭지에 담아서 아이 입에다 찔러 넣겠습니까? 퍽 하면 척하고 하나님이 알아들으신다고. 믿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이 시험을 하시지 않으신다’ 그 얘기는 한 편으로는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시험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은 시험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예를 들어 볼까요? 아브라함의 시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의 시험을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시련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아브라함은 억울하게 그 시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믿음으로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이 과연 시련과 시험으로 그렇게 무 쪽 자르듯이 나누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독자 아들을 내게 바쳐라’ 한 것은 분명히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독자 이삭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생산할 수 없는 나이였고 사래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도리로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경수가 끊어지고, 생식의 능력이 없어져 버린,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맨 처음 받았을 때에 이삭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볼 적마다 항상 이 ‘이삭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다’ 그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주신 그 자식을 나는 아무 공로 없이 값없이 그 100세에 그 독자를 품에 안고 이렇게 축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 아마 16,7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그는 서서히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자기에게 은혜로 주신 아브라함이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응답을 먼저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받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이 자녀를 인하여서 이 자녀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는 그 생각이 십 몇 년을 흐르는 동안에 서서히 변합니다. 변하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월이 흐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그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달라 이렇게 하나님이 시련을 주실 때 그 시련이 시험으로 바뀔 수 있는 불신앙의 요소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 속에 있는 그 부패한 생각과 유혹에 굴복한 잘못 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잠깐 돈을 맡기고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이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잠깐만 맡아 달라고 보따리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돼도 두 시간이 돼도 오지 않습니다. 가방을 열어보니까 거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어서 그것을 자기가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관했습니다. 1년 2년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점 차 점 차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그 돈은 내 돈 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먼 후일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 돈을 돌려 달라고 말 할 때 그때 돌려준다고 하더라도 돌려 줄 때 그 마음이 맨 처음에 맡기고 떠나갔을 때 30분 후에 찾아갈 때 돈을 돌려주는 마음과 똑같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누가 주셨습니까? 젊음을 누가 주셨습니까? 건강을 누가 주셨습니까?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분이 또한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갈 권이 없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결코 시련을 시험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모두 인간이 부패한 죄로 말미암아 그 시험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받는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워낙 죄가 많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풍부하면 유혹을 받을 수 없을 터인데 결핍하므로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양식이 풍성하면 남의 먹을 것을 보며 욕심이 들지 않을 텐데 양식이 없으므로 양식을 향하여 탐심을 갖게 됩니다. 결핍하므로 유혹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주리시지 않으셨다면 사단이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혹 받는 것 자체가 죄라면 예수님은 죄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러나 유혹을 받을 때에 내 마음이 그 유혹을 얼마나 혐오하고 미워하느냐 즉시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도 많은 재물을 얻고 부귀를 누리는 사람을 보며 잠시 ‘나도 어떻게 저렇게 잘 살 길이 없을 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즉시 그 생각이 불결하고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그것은 바로 죄에 빠지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걸어가며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볼 때 ‘아 저 여자가 참 아름답다 같이 한 번 살아봤으면’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유혹을 받을 때 우리가 그런 유혹에 굴복하고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리는 것을 즐기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죄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이렇게 유혹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혹에 넘어져서 시험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같은 시험에 드는 것이 그들의 삶에 너무나 커다란 해를 끼치고 믿음에 커다란 손해를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 같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언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시험으로 스르르르륵 미끄러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비참한 울부짖음 속에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시련의 웅덩이와 고난의 늪에서 잠시 시험에 진 그 댓가를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도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끊임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고, 오늘도 보십시오. 우리들 주위에 하나님을 믿지만, 그러나 시험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충만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가 아닙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신음 속에서 자기의 믿음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형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사람들이 신앙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믿음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기쁨과 충만한 은혜를 잃어 버리고 마치 억지로 끌려서 신앙생활 하는 것 같은 그러한 삶속에 계속 서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것은 시험에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해롭고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빈 들에서나 산에서 그 장막 안에서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일러 주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그것이었습니다. 시험에 들면 우리의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리고 죄 사함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의 은혜를 앗아갑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보십시오. 20년, 30년... 50년 살아온 인생의 시간들이 기적과 같지 않습니까? 주님이 먹이셨습니다. 입히셨습니다. 우리 육체만 그렇게 신기합니까? 우리의 살아온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5년 10년, 20년, 30년 신앙생활 해 올 때 누가 그 신앙을 버리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이 믿음의 길을 걸어오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말씀을 먹이셨습니다. 시련과 위기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을 먹고 우리가 시련과 위기를 이겼습니다. 오류와 그리고 오해 속에서 어둠의 늪을 지나고 캄캄한 골짜기를 지나서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을 분별할 수 없을 혼돈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양식으로 우리에게 먹이시고 그 말씀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 가운데 주시므로 참된 것과 그릇된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걸어온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됐고 그리고 어떻게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서로 나눈 추억이 많고 기쁨이 한없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에 시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전에 나누었던 그 놀라운 신앙의 감격과 그 많은 은혜들을 단숨에 잃어버리고 마치 하나님과 내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처럼 낯선 관계로 만들어 버리는 그 힘이 시험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으며 한없이 눈물로 감격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찬송으로 화답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까? 집을 멀리 이사 갔기 때문입니까? 고민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시험에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옛날에 하나님을 떠났던 그 길로 돌아와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길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때로 이 시험은 나태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충성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주님만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시험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전투 중에 적군의 정글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곳곳에 시험의 올무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한 원수는 어찌하는지 하나님의 죄 사함을 통해서 회복되어진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양식을 통해서 보전된 우리의 육체의 건강, 시험을 통해서 앗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이 이 시험을 두려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만큼 우리는 이 시험으로 부터 보호받게 해 달라고 주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도록 우리를 도우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기도에 응답해주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신앙은 늘 넘어지고 쓰러져서 우리의 고귀한 하나님의 주신 은혜들을 한 번에 잃어버릴 수 있는 이런 사람들임을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이 믿음의 길을 승리로써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험에 드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심지어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은근히 시험에 들기를 바랍니다. 심지어는 그 시험에 들었으면서도 자기가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시험을 우습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은 죄에 대한 쾌락, 죄로 말미암은 시험에 든 사람의 영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때문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우리에게, 우리에게 준 그 모든 좋은 것을 얼마나 순식간에 뺏아 가는 지를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고 응답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험에 든 것은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침상을 띄우며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어둠속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커다란 죄를 짓고 타락에 빠지는 것만이 시험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시험의 그림자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믿음의 불꽃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그칠 때 즉시 시험과 괴로움, 이 시험의 그림자가 우리 인생 가운데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서서히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독 기운이 우리 몸에 번져가듯이 시험의 기운이 우리의 믿음생활과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 침투하기를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는 모든 힘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는 그 기도를 예수님은 시험이 들자 그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시험에 드신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늘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험에 들게 하는, 강한 시험에 들지 말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도전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감각부터 새롭게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들은 기도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시험에 들면 기도하라 그러는데 기도가 되면 시험에 든 게 아닙니다. 그렇죠? 말은 맞지만 그러나 실제로 살아보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험에 빠질수록 기도하라 그러나 기도가 잘 되면 시험에 든 게 아닙니다. 그런 시험 속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애를 써도 언제나 우리의 기도 생활이나 영적인 삶은 안개 속을 헤매는, 부르짖어도 왠지 그 부르짖음이 허공을 때리고 돌아오는 것 같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도 그 기도가 왠지 목에서만 터져 나오는 기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지 않으니까 내 영혼도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시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고 기도원을 가고 금식을 한다 별의 별 일들을 많이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시험에 들 때 기도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시험에 깊이 든 사람, 그 사람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가 과연 그 시험을 이기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가 신령할 수 있을 까요?
시험에서 깊이 빠져서 이미 모든 영적인 감각을 상쇄해 버린 사람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에 능력을 더한 그러한 힘이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간 급기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에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기도하거나 금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험에 깊이 빠졌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동기는 그 시험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해결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깊이 빠져 있을 때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시험에 빠져서 계속 고통을 받는 것이 또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것이 우리에게 고통이 되기 때문에 여기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기도를 하거나 금식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시험 때문에 당하는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서 시험에 들게 되었고 내가 어디로부터 떨어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얼마나 커다란 불명예가 돌아갔는가? 하는 사실을 인해서 애통하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생각하고 돌아오도록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야말로 울어도 못 합니다. 힘으로도 못 합니다. 능으로도 못 합니다. 우선 이 시험 속에서 무감각해지고 사건과 사람과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는 그 모든 안개 낀 것과 같은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모르겠어요’ ‘생각하기 싫어’ 그게 바라는 시험에 든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아 난 몰라’ 겸손한 게 아니라 생각할 수 가 없는 ‘난 몰라 될 대로 되라 지’ 믿음이 아니라 자포자기입니다.
영적인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시험에 든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가 한 번에는 안 될지도 몰라요 아니 한 번에 될 수도 있어요. 마음을 계속 비우고 끊임없이 속에서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그 시험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그 욕심만 따라가지 말고 그 시험 속에 있으면서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 분별없는 마음과 더불어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그리고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시험도 잠시 잊어버리고 아픔과 고난도 잠시 잊어버리고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그때 비로소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모든 잘못된 오해가 무엇인지가 걷히고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간이 깨달은 것은 인간이 단지 깨닫기만 했지 마음은 따라오지 않는데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깨달은 다음에는 그 깨달은 바대로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스스로 깨달은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신 것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시험 속에서 그렇게 혼돈됩니다. 그 혼돈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관계가 다 파괴되어가고 그런 위기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러므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시험에 들지 말도록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하고 그리고 또 꼭 필요한 일인지를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시험에 든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시험에 들어서 그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니느웨를 버리고 다시스로 가면 그 고민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하나님 이외에는 그 시험 속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실 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시험 때문에 잃어버린, 시험을 시험으로조차 여기지 아니하는 우리의 영적인 모든 무감각들을 새롭게 살려 주시도록 우리는 시험 속에서 고통 해 본적이 아니라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고 그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셔서 우리를 이 모든 시험에서 극복해 주셔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련과 위기와 시험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마음껏 노래하고 우리의 끝날 까지 우리를 시험에서 건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찬양자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