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6:13上)
녹취자 : 김미현
지난주에는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여섯 번째 기도제목의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그리고 신앙생활에 참된 기쁨을 본질적으로 앗아가는 이러한 말하자면 신앙의 커다란 손해를 주는 이 시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오늘 이 말씀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런 시험을 겪게 되는 이유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이것을 통해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런 시험에 들게 되는 것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시험이 세상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세상을 사랑하는 그 출발이 세상을 바라보는데서 시작이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또 주님이 남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짓고 타락한 다음부터는 항상 죄 가운데 살아가고 그 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쉽고 편안한 것입니다. 마치 저는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계속 먹으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계속해서 먹히는 데 그것을 줄이면서 안 먹기로 결심을 하고 이 음식에 대한 유혹을 끊어버리면서 사는 것이 부적합 하듯이 말하자면 시험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본받으면서 살아가기 적합하기보다도 이 모든 세상이 다 타락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전부다 오염되어 버린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세상도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다 타락했습니다. 세상도 타락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 속에서 죄를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육신에 있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죄인이며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 복음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속에서는 아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겉모습도 변합니다. 믿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코가 3~4cm 옆으로 옮겨가고 눈이 2~3cm 더 올라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가만히 있지만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면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우리의 얼굴도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증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한 맺힌 사람들은 길거리에 다녀 봐도 얼굴만 보아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얼굴에 그 미움과 이런 것들이 다 풀어지는 것입니다. 얼굴이 변합니다. 그런데 얼굴이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엄청나고 커다란 변화가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이 껍데기는 이것은 1회 용품입니다. 내구기한이 80년이나 90년밖에 안가고 아주 특별히 튼튼한 껍질이 한 100년 가다가 마는데 그러나 이건 껍질일 뿐입니다. 우리의 속사람 속에서는 더 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바로 죽은 것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 죽은 것이 살아난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어느 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여름에 동해바다 같은데 가고 바닷가에 가보면 생선을 짝으로 나릅니다. 그 때 다 팔리지를 못해서 푹 썩습니다. 통조림 만드는 것은 썩기 직전에 싼값에 사다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짓찧어져서 머리가 부스러지고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런 정도 된 것을 하나님이 신기한 능력을 베푸시니까 그런 정도의 생선이 살아서 바다 위를 떠돌아다닐 것 같은 그러한 기적적이고 놀라운 변화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때 우리 속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창조된 것보다도 더 기적입니다. 그 생명이 살아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살아 있는 생명이 그렇게 살아났을 때에는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물을 먹으면서는 도저히 옛날과 같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은 죽었을 때고 지금은 살았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살아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는 그렇게 세상의 물을 원하지 아니하고 독특하게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위로 내리시는 은혜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교제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설교를 들음으로써 이러면서 우리의 마음에 해갈함을 얻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를 믿고 살아나게 된 다음에는 전에는 죄만 쫓아가야지만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쫓아가야지만 즐겁고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화하고 붙들어 주셔서 그 은혜에 푹 잠기게 하시면 그러면 끊임없이 거룩해지고 싶고 그리고 시험을 피해가고 싶고 죄를 멀리하고 싶고 거룩함과 은혜를 좇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보다 높은 신앙의 목표를 위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떨어지면 은혜가 떨어지면 옛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대로 살아나는데 나만 변했지 세상은 안변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품이 옛날에 내가 놀던 그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속하게 세상 속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세상으로부터 유혹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시험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시련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래서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던 그 좋은 신앙 그런 것들을 자꾸 저버리고 시험에 들게끔 만드는 이러한 데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누차 얘기하는 것은 너희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리고 너희 자신에게는 도무지 선한 것이 없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주님께 묶이지 않으면 왕년에 무슨 신앙을 가졌든지 소용없이 지금 세상에 팔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세상 속에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보면 견물생심이라 세상에서 이렇게 보면 다 비교의식이 생기고 저것도 갖고 싶고 이것도 갖고 싶고 욕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옛날 예수 믿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욕망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의 정과 육체의 욕심이 다시 살아나고 그렇게 시험에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비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계속 쳐다보면 생각을 가져오고 생각을 계속하다보면 행동으로 옮겨오게 되고 행동을 계속 옮기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계속 깊어지면 인격과 결부되어서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향하여 그렇게 되면 죄를 향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해 그렇게 되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한 때 예수를 믿고 ‘나는 이제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 그러던 지체가 있었는데 살아가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고 오늘도 새벽기도 나가서 ‘아버지 오늘도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그러고 자기네 집으로 친정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차를 사준 것입니다. 새 차를 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딸이 오랜만에 친정에 갔는데 비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이 집의 딸인데 나는 이렇게 사글세방에서 이 고생을 하고 며느리는 들어와서 아버지가 이렇게 차도 사주는 구나. 아버지가 이렇게 돈도 많고 차도 사주면서 나는 왜 내버려 두는가.’ 그러고 나서 심통을 부리고 그 날 자기네 집에 있는 프라이드를 몰고 자기 집으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 나 이거라도 가지고 갈거야.’ 하고 가지고 왔습니다. 돌아와서 기도를 간절히 하는데 심경이 안 괴로울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의 정욕과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떨어지고 영적인 침체가 일어나고 그럴 때 세상에 막 돌아다니면서 거리를 쏘다니고 술 한 잔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돌아다니면서 노래방 다녀봐야 우리를 도와줍니까, 안도와줍니까? 안도와줍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그렇게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도움이 됩니까, 안됩니까? 도움이 됩니다. 옛날에 도서실에서 보니 고시공부하고 하는 학생들이 한 달 동안 죽어라 공부하고 날 잡아 가서 맘껏 먹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신경질나면 다 때려 부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고 다시 정신 차리고 다시 공부를 하는데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정신이 돌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믿음의 길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는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 산에 가서 꿩을 큰 목장에다 놓고 꿩을 사육하는 데에 가보셨습니까? 꿩을 사육을 하는데 그 꿩들을 키우는데 꿩한테 안경을 씌웠습니다. 가서 한번 보십시오. 어느 목장에든지 다 꿩에 안경을 씌웠습니다. 그런데 그 안경이 이상하게 생긴 것이 머리에 쓰는데 꼭 물안경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걸 왜 저렇게 했을까 저것을 안 씌우면 며칠 만에 꿩이 다 죽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것을 벗겨놓으면 이쪽도 저쪽도 보입니다. 이쪽에서 ‘저놈이 나보다 모이를 더 많이 먹는구나.’ 하고 가서 눈을 쪼인다고 합니다.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앞만 쳐다보라고 자기만 먹고 자기 할 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고 자꾸 그것을 다 벗겨 놓으면 모이를 충분히 주는데도 그것을 자기 것을 찾아 먹으면 되는데 ‘옆에 놈 더 많이 먹는구나.’ 하고 가서 그것을 눈을 쫀다는 것입니다. 딴 놈은 이 놈 쪼고 해서 며칠 안에 다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나면 동창회 같은데 나가는 것보다 여전도회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가서 누구는 어떻게 살게 되었고 누구는 어떻게 살게 되었다 할 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나는 주님만으로 만족한다. 할렐루야!’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못 가집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못 가지니까 세상이 요란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예화) 언제 한번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장로님 가운데 염전을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염전하시던 그 분이 하는 얘기가 소금을 김장철에 김장을 담그기 위해서 찬물을 잔뜩 퍼놓고 소금을 넣으면 풀어집니까 안 풀어집니까? 안 풀어집니다. 신기하게 잘 안 풀어집니다. 그런데 그 소금을 염전에서 건져가지고 배에 싣기 위해서 건네다가 하나를 풍 떨어뜨리면 1~2분 만에 꺼내는데도 가마니밖에 안 올라온다고 합니다. 바닷물에는 그렇게 소금이 잘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로님께서 하시는 얘기가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과 함께 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으로부터 취한 사람들이 아니라 땅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취했지만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는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집으로 집에서 교회로 학교에서 채플로 채플에서 학교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시험을 더 받을 까요 덜 받을 까요? 덜 받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면 신앙을 가지면서도 사무적으로 접대해야하고 여기저기 못갈 때 다니고 그러면 시험을 많이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안 되겠지만 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연예계에 나갔다가 신앙을 잘 간직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 신앙을 팔아먹는 사람들 여러 명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세계가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그 영역이 그렇게 유혹이 많은 곳이니까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옛날과 같이 수도원처럼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우리의 삶을 단순화 시켜서 그러면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우리의 삶을 재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은혜에 깊이 잠기게 되면 아주 분명하게 통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교제, 사귀고 하는 것들이 전부다 재편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저도 변화 받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그러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깊이 받고 보면 그런데 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도와의 교제를 즐기고 하나님의 교회 생활을 기뻐하고 하는 것이 이 중에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착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만큼 세상으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어야 세상에 나가서 즐기지 그렇지 않습니까? 맨날 직장 끝나면 교회, 교회 끝나면 집으로 ,집 끝나면 교회, 새벽에 일어나면 새벽기도, 끝나고 나면 집에 올 때 수요예배 금요예배 이렇게 사니까 어떻게 세상에 나아가서 잘못된 곳에 빠지려고 해도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이런 시험들이 계속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고리타분하게 신앙생활만 하지 말고 이렇게 좋은 세상에 나와 봐라.’ 추파를 던지는 것은 여러분들이 믿음을 갖고 있을 때에 한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세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에 우리는 늘 이 세상을 그래서 늘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근신해야 합니다. 그 세상의 풍조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왜? 거기로부터 시험이 오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싫다 그러면 되는데 그러나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강한 통제아래 있을 때에는 그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즐겁지 않고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비교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똑같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할 때는 가난한 사람인지 부요한 사람인지 표가 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주시는 이런 것들이 더 크고 좋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안에서 충만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그래서 ‘저사람 통도 없어.’ 그런 소리 혹시 한다 할지라도 상처가 됩니까? 안됩니까? 은혜 충만할 때에는 ‘하늘의 하나님이 내 편이시거늘 너희가 무엇을 알겠느냐.’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돈 많은 사람도 은혜에 푹 잠기게 되면 돈 있는 티를 냅니까? 안냅니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종일뿐이다. 가끔 교회에 가보면 진짜 그 교회는 천차만별입니다. 박사학위를 가진 청년들부터 초등학교도 못 나온 청년들까지 있습니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형제여 자매여 하고 지낸단 말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그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같은 자리에 앉을 수도 없는 사람들인데도 그 속에서는 서로 형제여 자매여 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다 육신에 있는 것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신앙생활 잘하다가도 은혜가 떨어지면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자기 비하에 빠져서 ‘내가 돈도 없고, 내가 돈이나 벌고 교회에 다시 다녀야 할까봐.’ 누가 돈 없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 하면 주위에서 무엇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심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에 지배를 받지 못하는 육신적인 생각과 그러한 그 양심이 자기를 향해서 그렇게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육신이 드러나면서 ‘그래도 내가 말이야 내가 어쨌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렇게 육신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들을 최대한 못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도적으로는 그런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그럴 수 없도록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통제를 받으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 육신이 우리에게 계속 시험을 줍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험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해도 우리가 워낙 믿음이 강하면 그럼 그 시험에 먹혀들지 않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도 우리가 믿음이 연약하면 그 시험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모든 것들을 다 활용을 합니다. 사람도 활용을 하고 환경도 활용을 하고 마음도 활용을 하고 세상도 활용을 하고 다 활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고 육신을 이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 세상을 이기고 육신을 이겨서 그 시험을 이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먼저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부로 ‘육신이 약하도다.’ 그 얘기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가 다 최선을 다해 살 때 주님이 ‘얘야 사실은 네가 충성심이 부족하거나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약했구나.’ 이렇게 말씀 하실 때 그것을 우리가 아니옵나이다. 그래야지 주님이 할 말을 미리하면서 ‘주님 이것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다 육신이 약해서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단이 시험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뭐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고 잠자고 그럴 줄 다 알면서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하셨습니다. 그 모든 시험의 근원은 사단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영적인 강한 삶을 살고 거기에서 이기는 그 사람들은 육신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한 두어 달 전에 여름에 우리나라 의사들이 모여 있는 수련회를 인도를 하였습니다. 두 부부가 의사입니다. 하나는 한의사 하나는 양의사였습니다. 두 부부가 너무 피곤해서 나 혼자 지금 숙소에서 자는데 니고데모처럼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조금만 얘기하면 가면 좋겠는데 나는 지금 아파가지고 나 약 주러 왔으면서 약 먹여놓고 밤새도록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얘기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 ‘교수님, 우리는 지금 결혼 한지 5년이 되었는데 아기가 아직 없습니다.’ ‘그래요? 난 그런 거 해결할 수 있는 재능이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자기는 애기가 없어도 문제가 안 된다. 남자분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독자인데 부인이 하도 거기에 대한 부담을 많이 가져서 부인이 늘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뭐 좋다고 그렇게 기도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나처럼 기도하고’ 그래서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감사합니다.’ ‘왜 감사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는 기도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육신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 얘기는 맞을지 모릅니다.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돈이 없습니까? 명예가 없습니까? 재산이 없습니까?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기도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그 모든 시험, 육체로부터 오는 시험,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의 근원이 마귀이고 사단이고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만나지 않을 때에 영적으로 강한 삶을 살면 그렇게 살지 못할 때에 시험이 될 수 있는 것도 시험이 안 되고 시련이 될 수 있는 것도 시련이 안 됩니다. 믿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예화) 자녀가 죽었는데 어느 집안은 아버지가 장로이고 어머니가 권사인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친구 죽었을 때, 31살밖에 안된 아들이 아들, 아기, 부인 같이 잠들었는데 연탄가스마시고 아들만 죽었습니다. 나중에 슬퍼서 어떻게 하시느냐고 하니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도 있지.’ 이것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물론 시련이고 고통이기는 하지만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이 강하면 그런 것들이 시험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모든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평소에 영적인 삶을 강하고 그리고 굳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을 그 때에 그 때가 바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삶은 보약과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새벽에 다 새벽에 드러누워 뜨뜻한 이불 밑에서 곤하게 자는 것 ‘여기서 계속 잤으면, 교회를 개척 안했으면 계속 잤을 텐데.’ 그런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박차고 한 번 나옵니다. 그것을 한번 박차고 나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막 복으로 쏟아 부으시냐 그러실 수도 있지만 안 그런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무엇입니까? 보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딱 우리들이 그런 부지런한 영적인 삶을 살 때에 그 때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시련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그것이 그 사람에게만 시련이 안 되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넘기면서 오히려
(찬양)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아멘.
그런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시험에 걸려서 넘어질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니야.’ 결단할 수 있는 이상한 용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별로 믿음이 없는 것 같고 그랬는데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평소의 영적인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마지막에는 ‘아니다.’ 해야 하는데 흐지부지 흐지부지 하고 이제 시름에 이르러 접어드는 그런 삶에 들어가는 것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평소의 영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련의 때가 오면 기도하리라,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을 마련하러 나가리라, 추우면 장작을 지피러 나가리라, 그러지 마십시오. 지금서부터 늘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강한 삶을 살아 시험이 오면 미리 분별하고 시련이 오면 이길 힘을 얻고 이런 영적인 삶을 살라고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매일 아침마다 나와서 주님이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시험에 들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입니다. 의문이 되는 것은 그것입니다. 계속해서 자기가 살아놓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왜 나를 그러면 그 때 내버려 두셨을까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을까? 내가 하나님 같았으면 만들어 놓지도 않았거니와 만들었다면 따먹으려고 그럴 때 하나님이 그 손을 잡으시고 ‘얘야 안 된다.’ 그러시지 않고 그것을 따가지고 먹기까지 하나님은 내버려 두신 걸까? 그것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질문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선악과를 만든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선악과를 갖다 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히려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니 그것이 시험거리가 되는 것이지 신앙이 있을 때에는 은혜입니다. 왜 그 나무 하나를 봅니까? 그 나무 말고 다른 나무를 수없이 봅니다. 생명나무 실과가 잔뜩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이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는 그 한 나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수많은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면서 만족한 것입니다. 신앙이 떨어지니까 딴 것은 눈에도 안 들어오고 꼭 그것을 따먹어야지 속이 풀리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나무가 많은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데 그것을 잔뜩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랬는데 신앙이 있을 때에는 에덴동산을 다 누비면서 봐도 하나님께서 안주신 것이 없습니다.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보이십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 앞에 올 때에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서 뭐라고 명하셨는가?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 선악과를 보면서 누구를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나 위에는 이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가 얼마나 높은 차이가 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그 선악과를 볼 때마다 ‘그래 내 인생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축복으로 주셨으니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야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의 참된 행복이야.’ 그러고 감사기도를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실과를 그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떠나니 그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싶지 않고 꼭 저것을 어떻게 먹을 길이 없을까 그 생각만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도 우리의 신앙이 떨어지면 그것이 은혜로 주신 그것이 우리에게 빨리 시험에 들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오히려 똑똑하지 못했더라면 지혜가 적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혜의 통제를 받을 때에는 그 지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는데 신앙을 버리고 시험에 드니까 그 지혜가 세속적인 수단으로 바뀌어져서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방의 나라에서 다 후처들을 데려다가 왕궁에 살림을 차려주고 들어올 때에 그 나라와 화평을 맺는다라고 하는 그러한 구실 하에 이방의 신상들을 다 들여와서 왕궁에서 섬기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진심을 입증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시험이 다가올 때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한다고 하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타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똑같은 사건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이 시험을 당할 때마다 실패할 경우가 있습니다. 당할 때마다 실패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매일 매일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런 시험에 들어서 실패를 해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던 사람들은 다시 그 다섯 번째 기도가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하는 이 기도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든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더 쉽게 말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시험에만 들면 결국은 모든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허비하게 되느냐?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따라서 결정이 되느냐하면 시험에 든 다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취하는 태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은 그저 소비될 뿐일 수밖에 없게끔 그렇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중에라도 그 시험을 당하여서 자기가 시험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태도가 엄청나게 바뀌면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은 유익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단은 마음에 죄가 가득차서 삶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무지 무각하게 헤매는 이 세상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은혜가 있는 사람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시험도 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신자들의 차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차원적인 시험을 당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 맨 처음에 어렸을 때에는 ‘나도 좋은데 시집가야할텐데, 나도 한번 진탕 살아봤으면, 나도 한번 이렇게 되어 봤으면’ 그러는데 신앙이 점점 깊어지면 그런 것은 기본적으로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런 시험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단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은혜의 사람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있고 그래서 사단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좁디 좁았던 우리의 인식이 넓게 확장되고 그리고 영혼을 섬기는데 도움을 얻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범죄 한 것은 백번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약에 그렇게 범죄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은 훨씬 더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더 크게 축복하시고 이스라엘 왕가에 그렇게 끔찍한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눈앞에서 그는 자기가 거느리고 살던 후처들이 백주의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과 더불어 동침하는 것을 목격했고 또 그 아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모두 다윗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미 일어난 범죄는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뭔가 옛날에 잘못했다 그런데 바꿀 수 있으면 바꾸십시오. 그러나 바꿀 수 없으면 그것을 후회하면서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궁리를 해야 합니다. 바꾸어 놓을 수 없는데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미 그 결과는 미쳤고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꾸어질 수 없는 이미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서 연연해하고 그것을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책이 아니라 마귀가 자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과거를 분명히 인식하고 슬퍼하면서도 그러나 과거에 그 일이 일어난 것 가지고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후회할 뿐만 아니라 그러면 오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내가 잘못했어. 나는 다 끝이야.’ 그래서 아주 커다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우리를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후회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소용없습니다. 백번 이야기해보아야 영적인 생활에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잘못한 것은 분명히 범죄였습니다. 그 범죄는 정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합니까?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아는 벌써 목잘려서 죽였는데 다시 붙여서 살려내려면 살려낼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맨날 내가 우리아를 왜 죽였을까? 그 여자는 하필이면 그 시간에 목욕을 했던거야 땅바닥을 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으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가혹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영적인 그 터널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터널을 통과하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선지자들도 겨우 깨달아서 백성들에게 전파하였던 놀라운 영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물은 내 속에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상한 심령이라. 그러면서 오히려 그 시험을 통해서 다윗이 더 깊이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볼 수 없었던 신앙의 세계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갖고 그러면서 구속의 놀라운 비밀들에 대한 예언을 우리에게 풍부하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진전이 없으면 영적인 진전이 없으면 ‘내가 타락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볼까?’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앙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범죄가 아니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추구였습니다. 믿으십니까? 분명히 아멘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앙의 세계에 대한 더 차원 높은 인식을 갖고 그러한 신앙의 세계의 영적인 비밀에 눈을 뜨게끔 만들어서 그의 신앙의 수준을 높여 주었던 것은 그가 범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모든 사람들이 다윗처럼 하나님을 추구합니까? 범죄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추구하지 못하던 사람이 마귀의 화살에 맞아 죄악의 독이 온몸에 퍼졌는데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추구하게 된다고 어디에 나옵니까? 우리는 이 어리석은 환상에서 깨어야 합니다. 성경은 수없는 사람들이 타락했는데 그 타락 속에서 이렇게 위대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윗 한 사람밖에 꼽고 있지 않습니다. 므낫세, 히스기야, 요람, 아삽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전처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랍게 회복된 사람은 이 사람 하나를 꼽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저버리고 잠시 시험에 들었을 때에는 그 때에는 지나간 사실을 후회하는 대신에 오늘 그 시험을 당한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이 시험에서 건지실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도 그 생각입니다. 밥을 먹어도 그 생각입니다. 혼자 앉아서도 그 생각입니다. 드러누워도 그 생각입니다. 화장실 가서도 그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상에 나아가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그러면 잠시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는데 잊어버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서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확하게 시험에 든 사람들마다 자기가 시험에 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장소를 옮기고 예를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을 뵈옵고 그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 받을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에 그렇게 매달릴 때 우리는 주님이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렇게 기도하면 더 큰 시험에 안들게 하도록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고 또 시험에 든 사람들은 결국은 그 시험 속에서 그렇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할 때 그 우리에게는 시험의 기회가 그 하나님을 향한 추구를 통해서 단지 고통의 기회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우리의 신앙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놀라운 인식의 확장을 우리에게 주셔서 궁극적으로는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가 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서 여러분 모두가 시험에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며 신앙생활 하기를 바라고 시험에 든 모든 사람들은 이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오히려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 기회가 축복으로 이 고통이 말할 수 없는 은혜로 바뀌어지기 위해서 주님을 열심히 추구하는 그런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