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녹취자: 장소연
지난 시간에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드디어 다섯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편의를 위해서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 우리들의 그 죄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실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이미 용서한 것같이’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에게 대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시간 되는 데까지 말씀을 드리고 다음 주에는 그 뒤편을 말씀드려서 두 주나 세 주에 걸쳐서 이 다섯 번째 기도의 제목을 강의하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하는 네 번째 기도 속에서 우리는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들이고, 주님이 그 은혜를 내리시고 주님이 그 양식을 내리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의탁되어 있는 연약한 인생들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네 번째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결코 교만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외울 적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 생명 하나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고 식물을 내리셔야지만 겨우 육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연약한 인생들임을 보여준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과 생명에 관하여 무엇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우리를 향하여 말하는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한 양식을 내리지 아니하시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 우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를 이렇게 가르쳐 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 저는 이 주기도문을 묵상하면서 나는 이 네 번째 기도, 지난주에 한 그 네 번째 기도에서 다 못했습니다. 나는 그 네 번째 기도만 한 두어 달 했으면 좋겠는데 그 네 번째 기도에서 저는 그 단순히 하나님 앞에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내가 너무 감사하지 않고 있다 뭐 그런 것도 물론 깨닫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가장 인생에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요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동의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관심이 이번에는 하나님과 영혼의 문제로 옮아갑니다. 여러분 일용할 양식을 인간만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의 동물과 모든 식물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면에서 인간은 이 땅의 모든 피조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결코 그렇게 매일매일 내리는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 다섯 번째 기도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이 기도는 1년에 한번이나 평생에 한번이나 세례 받을 때 한번이나 결혼식 할 때 한번 하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아침에 드리는 기도에도 이런 패턴을 따라서, 점심 때 드리는 기도에도 이런 패턴을 따라서, 깊은 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침상에 손을 모으고 기도할 때도 이러한 패턴을 따라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의 그 죄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그 빚들을 탕감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예수님께로 지금 전수받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팔복산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게 “얘야,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의 죄,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소서,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를 언제나 하여야 하느니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이러한 죄 사함의 간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기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서 그 죄가 복수입니다. 하나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짓는 죄가 하나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가르쳐 주셨던 더 깊은 이유를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죄 사함을 받지 않고 그냥 살아가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가르치셨던 것입니까? 오늘날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 사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그리고 튼튼하게, 용감하게 그리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세상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 의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흘린 보혈의 피로 우리를 단번에 깨끗케 하사 우리를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지나간 죄와 앞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과 모든 죄의 요소를 사하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이렇게 말하셨다면 이해가 가는데 이미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람들에게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느니라 말하셨던 것입니다. 모순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이 죄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고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죄로부터 깨끗케 됨을 받아서 앞으로 지을 모든 죄조차도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죄의 용서가 회개 하나에 달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도 잊어버리고 회개하지 못하는 그 죄에 대해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죄 있는 자는 도무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들이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할 때에 이 기도는 요식 행위로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이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만 할 필요가 너희들에게는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의 피조물들,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은 단지 주님께서 내리시는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 그것으로 배부름을 얻고 만족하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과의 참된 화해,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임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육신을 통해 잃어버린 새 힘을 얻은 우리의 육신의 기력들이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쓰여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영적 군사로서 살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 하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화목을 잃어버리고 불화하게 살아가는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사랑이 없이 그렇게 냉랭하게 감격도, 감화도, 은혜도, 사랑도 그 누구도 하나님을 향한 확신도 없이 그렇게 랜덤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숙명적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환경의 핑계를 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자기의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크게 만났던 신앙의 사람들은 주님의 그 일반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그 일반적인 은혜를 간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그리고 그 깊이와 넓이와 그 완전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사랑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찬양)
주 예수여 완전한 주의 사랑 나 받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를 충만케 내려주사 주를 위해서 살 수 있고, 그 완전한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 이러한 삶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그렇게 기도 가르치셨던 이유는 죄가 있어서는 죄 가운데 살고 그 죄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는 우리가 그런 완전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져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우리의 온몸으로, 우리의 온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하는 이러한 삶을 삶으로써 이 어두운 세상에 불꽃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소금으로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함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어지는 그 완전한 교제와 충만한 사랑과 그 완전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이것이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이 짓게 되는 죄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누가 나를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피할 수 없이 죄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없는 인생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 사소한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삶이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나약함을 아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는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끊어지는 일이 없이 이 땅에서 생애를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슬픈 생애를 사셨습니다. 자신은 비록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지고 충만하고 완전한 영적인 사랑과 그 은혜로운 삶이 방해받는 적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기 앞에 나오는 수많은 지치고 곤고한 백성들 속에 역사하고 있는 죄의 힘을 보셨던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가슴속에 부여잡고 살아가고 급기야는 그 죄가 뿌리를 내리고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가 뻗어서 가지가 되고 잎이 되어서 급기야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며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노예같이 되어버린 불쌍한 인생들을 보셨던 것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나 죄의 세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들을 차단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그 완전한 사랑을 사모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각양 좋은 것들을 너희의 죄가 가로막았느니라고 말씀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언처럼 지치고 곤고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백성들 속에 역사하는 죄와 슬픔의 세력들을 주님은 보셨던 것입니다.
힘으로도 어쩔 수 없고 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죄의 세력, 죄는 마귀가 그 원흉이지만 그러나 마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하여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주께서 한번 명하시면 물러갔습니다. 사도들이 ‘귀신아 나와라’ 명하면 쫓겨 나왔습니다. 그리고 얽매였던 귀신들은 능력을 잃어버렸고 귀신에 잡혔던 사람들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렇게 나가지가 않았습니다. ‘죄야 나가거라.’ 주님이 그렇게 명하시지도 않았거니와 명해도 죄는 그렇게 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귀신은 한마디 명령에 쫓겨났어도 죄는 그렇게 쫓겨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삶 속에 단단하게 눌어 붙어서 눈물로도 씻기지 않고, 가슴을 쳐도 떠나가지 않고, 그렇게 단단하게 눌어 붙어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능력 많은 사람의 안수를 받아도 이 죄는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짓는 이 죄를 통해서 그 죄는 점점 굳어지고 씻길 수 없을 정도로 인격의 일부분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단단히 들어붙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종기가 몸에서 솟아 나왔는데 자기가 원하는 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라내려고 칼을 들면 몸을 잘라내는 것처럼 아픈 듯이 이제는 그 죄를 우리의 몸에서 떼어 내려고 치면 자지러질 것 같은 아픔이 우리의 삶과 영혼 속에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매일매일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모두 버려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습니다. 가슴을 쳐도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무릎에 쥐가 나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응답되지 않는 그 옛날에 잃어버린 그 완전한 은혜와 온전한 사랑의 회복, 여러분, 무엇 때문입니까? 누가 이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매일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느니라.’ 가르쳐 주셨던 이유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일에 유일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주님이 약속이 없는 명령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 능력으로도 나가지 않고 성령으로도 물러가지 않는 죄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주님은 우리 앞에 죄 사함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단지 일용할 양식을 힘입어 생존하다가 천당에 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비록 죄와 슬픔으로 가득차도 우리는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회개하고 참된 용서를 받을 때에 세상이 넘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충만한 사랑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물 붓듯 사랑을 부으시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을 자나 분리시킬 자가 없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어떤 환경과 어떤 사정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직 죄가 바로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과 참된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을 그것을 우리의 숙명으로 여기는 이런 불신앙과 자기 합리화를 타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영혼을 위안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고 이 용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충만한 사랑 속에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과연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는 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하늘을 좀 보면서 삽니다. 어느 날인가 하늘을 쳐다보면 매일 그 하늘이 똑같은 하늘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날 하늘을 한번 쳐다보는데 신비하게 남쪽 하늘에 새카만 구름이 비가 쏟아질 것처럼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람이 불었는지 어떻게 불었는지 구름 한 가운데가 구멍이 나기 시작합니다. 막 구멍이 나면서 그 시커먼 하늘에 그 뚫어진 구멍사이로 찬란한 태양 빛이 비추는데 ‘야 이거 오늘이 주님 오시는 날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찬란한 빛이 있었습니다. 그 틈 사이로 구름을 찢고 쏟아지니까 아주 새카맣던 구름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죄는 구름과 같다. 태양은 빛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태양은 하늘 높이 위에서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쫙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만큼 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만큼 죄를 또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소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찾아감으로써 이루어져야 할지를 알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이 간구를 누구에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까? 누구에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정확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기도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죄가 하나님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모든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이것을 빚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빚에 대한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빚지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해야 하는 사람, 여러분 조심해야 될 사람이 남의 돈이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채권, 채무관계가 분명합니다. 채권 관계는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돈 주고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채무 관계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심히 즐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빚진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지 아십니까? 야, 세상이 무섭습니다. 월 1%에 꿔 준다는 돈, 즉시 5분 안에 대출해 준다고 하는 돈, 그게 다 90% 이상이 사기랍니다. 돈을 꿨었는데 갚으려고 하는데 갚을 수 없도록 잠적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기 위해서? 돈 꿔간 사람을 빚쟁이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마지막은 그 담보를 차압합니다. 하나님이 설교자를 만드시려니까 벼래 경험을 다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결혼생활 하고 나서 그렇게 빚진 적이 거의 없습니다마는 그 어렸을 때에 이제 뭐 초등학교 몇 학년쯤 되었을까 아버님이 사업을 하다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빚은 엄청나게 졌는데 재산은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 모든 사람을 불러서 “나 이것밖에 없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면 아마 감옥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몇 사람에게만 갚고 그 다음에 도망을 가셨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그 다음에 매일 밤마다 빚쟁이들이 찾아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무서웠습니다. 술병을 들고 와가지고 집에 앉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술 먹다가 화가 나면 양복장 유리를 다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결심한 게 “내가 이 다음에 자라면 나는 빚을 지지 말아야지.” 적용을 했습니다. QT는 아니지만 적용을 했습니다. “빚은 지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빚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채무자, 채권자들은 하여튼 어디를 가든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진짜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까지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쫓아오지 않으면 빚진 사람 꿈에라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놔라” 깜짝 놀라서 깨면 꿈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쫓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이른 새벽에 잠깐 집에 왔다가 얼굴 내밀고 돌아가시는 그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야, 죄가 이렇게 무섭구나.’ 가족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정상적으로 모여살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없게 할 정도의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빚이 이처럼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빚진 사람이 하도 질기면 빚 준 사람이 결국은 포기합니다. 소심줄입니다. 죽이려는데, 날 잡아 먹으라는데, 난 가보지 않았지만 우리 식구들 중에서 법정에 가서 소액 재판 사건 하는 것 보면 법정 같지 않답니다. “이 사람한테 당신 돈 꿔갔어? 안 꿔갔어?” 꿔 갔답니다. “그런데 왜 안 갚는 거야?” 없다고 그래도 갚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판사가 “언제까지 갚을 수 있어?” 이 사람은 “두 달 안에 받아야 되겠습니다.” “두 달 안에 갚아.” 그러면 “안 됩니다. 판사님 난 죽어도 못 갚습니다. 난 두 달 안에는 떼들어가지 난 못 갚습니다. 돈이 생길 데가 없는데 어떻게 두 달 만에 갚습니까? 나는 못 갚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판사가 “그럼 몇 달에 갚을 수 있어?” 이렇게 물어보면서 정한 답니다.
하나님은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림없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빚을 주고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림없습니다. 반드시 받아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 빚을 회개함으로써 탕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피로써 자기가 진 죄의 값을 받는 것입니다. 비참하게.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그 죄의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서? 자기의 모든 영혼으로서. 지옥이 어떤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까? 그 빚을 탕감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죄인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빚쟁이들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빚쟁이, 세상 사람도 빚쟁이. 그런데 우리는 탕감 받은 빚쟁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아직도 채무를 지고 탕감 받지 못한 빚쟁이들입니다. 계속 빚을 못 갚으면 마지막에 지옥에 가서 몸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이를 갈며, 슬피 울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신 것은 사실 이런 의미에서만은 아닙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간혹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 보내시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자 싶어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을 받아놓은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충만하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위한 노래로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것이 오늘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이 그칠 수 없는 감격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속에 강물로 흐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빚진 자들이 많은 시대였습니다. 가난할수록 빚진 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악한 채권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을 준 사람이 자기에게 빚을 끝까지 갚지 못하자 옥에 가두고야 마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빚을 지고 고통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날마다 불안하고 쫓기는 심정입니다. 강아지 짖는 소리에 놀라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채무자는 채권자가 그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한 그 빚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지은 죄는 반드시 갚아야 할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같은 죄를 지어도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이 세상에서 다 치르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꾸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거기로부터 벗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지 하나님 바라보고 세상 바라보면서 다시 죄 지으면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더욱더 죄 가운데로부터 떠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 그들을 위해서는 용서하시고 사유하시고 그리고 뉘우치는 자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피할 수 없이 갚아야 하는 채무와 같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빚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의 죄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하나님께 회개로서 간구하기를 기다리시지만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 결코 영원히 참는 분이 아니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밀린 모든 죄의 빚을 한꺼번에 받아내고 말 것입니다. 구멍가게에서 두부 하나, 콩나물 하나, 라면 하나, 사다 외상으로 먹을 때에는 100원, 200원, 500원 그랬는데 이게 한 달 모이고 나서 나중에 월급탈 때 계산해 보면 엄청나게 많습니다.
여러분, 어느 때 불현 듯 하나님께서 인내가 끝나고 우리가 밀린 모든 죄의 빚을 한꺼번에 받아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회개와 죄 사함의 기회를 하나님이 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심판으로 그 분의 진노를 만족시켜야 하는 그 빚 청산의 날이 우리의 인생 결국에 이른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라 오늘이야 말로 은혜를 받을만한 때라.’고 말합니다. ‘보라 우리가 은혜 받을 만한 때라’ 대가 없이 그 더러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임마누엘의 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기에 너무나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은 죄인 중의 괴수도 용서받게 했고, 창녀보다 더럽게 살던 여인의 죄를 씻어 거룩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며 불결한 죄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보이셨던 것입니다. 죄의 용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인생들임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호리라도 우리 스스로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적인 교파의 사람들은 죄를 지은 다음에 선행을 하면 그 선행이 우리의 죄를 탕감해 준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그 빚 중에서 단 1원어치도 스스로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의 누가 하나님께 대한 죄의 심판을 감당할 수가 있겠으며 우리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의 용서에 있다고 하는 사실, 그 빚을 하나님 앞에 탄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매달리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주를 찾은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찾으시고, 그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사 자기의 거룩한 몸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였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이 죄 사함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적마다 우리는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함을 받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흠 없는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길 원하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의 짐을 지고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야 하는 그곳이 어디입니까? 어디에서 그 죄인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간구하고 죄의 참다운 참회를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 거기가 아니고 어디가 있겠느냐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늘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늘 믿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언제나 그 십자가에서 이미 보여주신 이미 나타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그런 신앙에 눈 떠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보혈을 흘리신 그 십자가의 거룩한 고난은 샘물이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죄인들, 그 샘에서 씻는 그런 고귀한 샘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의의 비누로 씻을 수 없었던 사람들, 마치 표범이 그 얼룩을 지울 수 없는 것같이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의로 도무지 씻을 수 없었던 죄악과 이 세상에 있는 샘에서는 씻겨질 수 없는 것들이 샘에서는 모두 씻기워졌던 것입니다. 한없는 죄를 지은 수많은 죄인들이 낙인 찍힌 죄인들이 물로도 씻을 수 없고, 불로도 정결케 할 수 없었던 그 영혼의 끔찍한 죄악들을 그 샘에서 씻었습니다. 그 피가 흉악한 죄인을 정결케 했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물이 소망 없는 죄인의 낙인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주홍과 같은 붉은 죄를 숙명처럼 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을 양털과 같이 희게 만들었고, 주님과의 교제를 잊어버리고 비탄한 인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어도 메아리밖에 들려올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하늘의 문을 여시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임마누엘의 샘에서 솟아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십자가가 이 일들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너희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을 때 틀림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아들아,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이 사람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노라’ 하나님의 용서의 계획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 속에서 문득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죄 사함의 간구를 할 적마다 우리는 잠시 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사랑하시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죄인들이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언제나 이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르는 새롭고 산 피의 길을 여시기 위해서 다가올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눈빛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이 다섯 번째 와서 잠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이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사옵나이다.’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따라서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보이신 것입니다. 왜 이 많은 이 세상의 죄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죄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갈까요? 이 죄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살아감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하고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다섯 번째 기도 앞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만을 붙들고 그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 없는 그 모든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치루시고 그리고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이 세상의 많은 죄악들과 그리고 죄악들을 정결케 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혈의 능력이 있음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어서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샘에 우리의 모든 삶을 잠그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섯 번째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죄 사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받아야 살듯이 우리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기도하기 전에 회개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며 기도를 들으며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자비롭고 축복된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일용할 양식이 매일 필요한 것을 언제나 민감하게 느끼지만 영혼이 죄짐에 눌려 고통하며 신음하게 죽게 된 지경에 이르러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숙명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죄악은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하늘을 향한 교제의 문은 닫혔습니다. 더 이상 하늘로부터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비취는 은총의 빛을 스스로의 죄로 가리고 하나님께 얼굴로부터 비춰지는 완전한 기쁨과 자유함으로부터 자기의 영혼을 차단하는데 이는 우리의 무감각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죄 사함을 위해서 간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을 황폐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꽃 피고, 새 울고,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신앙의 정원은 이 죄의 폭풍은 뿌리째 나무를 꺾어버리고, 이 죄의 한 발은 흐르는 시냇물을 말려버리고, 이 죄의 기회(?)는 날아다니며 노래하던 새들의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기도문 다섯 번째 문턱에 서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하신 용서와 그 은혜 없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교만함을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뉘우치고 신실하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우리 속에 한껏 받으며 그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 다섯 번째 기도의 제목에 대한 강해를 마치기 전까지 여러분들이 이처럼 깊이 회개하고 그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