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녹취자: 박은희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변증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부활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동시에 이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는 것도 헛되고 우리의 바라는 것도 헛되다고 명증하게 천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영원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그의 죽으심에 그의 부활하심에 동참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승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이일에 참여하므로서 우리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 완전히 죽어있던 우리의 영혼이 그 죄의 결과로 비록 우리의 육체는 죽어도 영원히 살 수 있게끔 되었다면,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큰 승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이 일을 통해서 우리들이 볼 수 없는 이 천상의 세계에 중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사단을 무리로 하여, 우두머리로 하여 이 모든 세계를 장악하고 인간들을 억누르고 인간들을 협박하여 자신의 죄 아래 굴복하도록 만들었던 그 놀라운 영적인 세계의 위력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바로 이렇게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우주적인 승리가 개개인의 영혼과 삶속에 이 세계 속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승리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이고 생명의 이김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 사망이 생명에 의하여 삼킨바 될 것을 예고하면서 갑자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물론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포함하고 적용에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이천년이 지난 시대이후에 이 서신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좀 더 좁게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을 당사자로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과 피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전도사역 선교여행에 동참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많은 복음사역의 난관들을 경험했는데 거기에서 수많은 이김, 수많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사도바울은 아마도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사람입니다. 앞길이 보장된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고 똑똑한 엘리트였습니다. 만약에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라와 임금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라는 분부를 받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그는 유대인들의 견고한 종교체계 안에서 아주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는 그렇게 유대 종교지도자중 뛰어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영광으로 알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알던 것들은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전에 자신의 삶에 존귀와 영광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은 부끄러운 것들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가장 고상한 가치를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아는 것에서 발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복음사역에 헌신한 이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내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복음사역에 일꾼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소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명을 따라 살아오는 날 동안에 그는 그야말로 다양한 삶에 상황들을 만났습니다. 오죽했으면 같은 교회에 편지 속에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하심이라”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그래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그리고 결국은 마음에 사형선고,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 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결코 놓이지 않았을 끔찍한 수많은 상황들을 만났습니다. 환난과 시련, 위험, 죽음의 위협, 도망, 돌로 내치는 것, 핍박, 환란, 외로움 수많은 다양한 삶의 상황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온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 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이김은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고 때려눕히고 나라끼리 충돌했을 때는 그 나라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군화발로 밟고 일어섰을 때 우리는 이겼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씨름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에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다라고 말할 때에 이것은 이 세상에 육체의 격투기에서 의미하는 그런 종류의 승리가 아닙니다. 또 다른 종류의 승리입니다. 그 승리가 어떤 것인지는 우리들이 잠시 후에 보겠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 그렇게 다양한 삶의 상황들 속에서 어떤 때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기도 했는데 결국은 당신을 바라는 사도바울의 일행들에게 하나님은 이김을 주셨습니다.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뢰하고 주님을 깊이 붙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도와주신다는 사실, 이 사실을 굳게 신뢰하고 그분의 마음에 맞게끔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정보밖에 아주 적은 양의 정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됩니다. 때로는 내가 가야 하는 길에 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서 이것을 가지고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은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계산해 넣으라고 가르쳐 줍니다. 불신앙은 우리에게 그것은 계산해 넣을 수 없다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리고는 실패를 운명으로, 비참한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에 굴복 시키는 것이고, 죄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삶의 다양한 상황을 만나고 때로는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시련의 상황을 만날 때에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사도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이기게 만드실까? 우선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섭리의 자연적인 질서로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릴 때 하나님은 사물에 있는 일반적인 질서를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또 이런 것들은 이런 자연적인 사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에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우기가 와서 홍수가 나고 가을이면 열매를 거두고 곡식을 거두고 겨울이면 그 열매를 모두 저장하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농부가 농사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그러면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나가보니까 커다란 열매들이 달려서 무슨 떼돈을 벌게 하시고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으십니다. 성실히 농사를 짓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이 알맞은 일기와 모든 것들을 주셔서 그래서 곡식이 아주 풍성하게 무르익도록 열매가 맺히도록 가을에 복을 주셔서 많은 열매를 수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사업을 하는데 많은 자금과 좋은 사업의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만약에 좋지 못한 동업자를 만나면 큰 실패를 보게 됩니다. 저는 종종 동네를 다니면서 어느 날 있던 가게를 다 뜯어냅니다. 그 가게도 들어 온지 얼마 안됐는데 장사가 안 되니까 팔고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들여서 시설을 다 다시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가게가 되었습니다. 한 한 두 달 동안은 사람이 좀 오는가 하더니 그 다음에는 다시 텅 빕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우리는 ‘그저 가게가 하나 섰다가 없어지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그 사람들은 여러 명의 가족들이 생계가 달린 것이고 어쩌면 그것도 통장에 있는 자기돈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은행에서 대출을 얻고 사채를 얻고 해가지고 벽지를 바르고 그 다음에 인테리어를 하고 음식을 만드는 기자재들을 들여오고 종업원들을 고용하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게 사람이 안 오고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게 얼마나 속이 타는 일이겠습니까? 그 사업이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실패하고 자살을 하기도 하고 불행한 처지에 몰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자연적인 섭리의 질서로서 사람들을 복주시기도 하고 혹은 그 복으로부터 멀어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섭리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이것들은 사실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루어지지만 그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한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신앙만이 그것을 읽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복이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 잘 안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심이 충만하고 하나님과 생생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하나도 감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아주 지극히 작은 일 하나를 위하여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생생하게 하나님이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자신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 모든 과정들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슴 시려운 감동으로 매순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우리의 인생의 작은일 하나라도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도우시고 은혜를 주시고 이끄시고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섭리의 자연적인 질서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신다음, 이 세상에 휙 던져 놓으시고 내가 너희들에게 여러 가지 질서들을 이미 법칙으로 만들었으니 너희들 알아서 살아가거라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위에 계셔서 지켜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이 안전하게 지내는 것,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의 노동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시는 것, 우리 아이들이 안정된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고 사람답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매일 매일 환경을 허락하시는 것, 남편이 혹은 아내가 이런 저런 사업을 하고 이런 저런 위험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이 모든 것들은 그 법칙 안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맡겨두신 것이 아니라, 그 법칙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매 순간마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의 자연적인 질서들은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이끄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위에 법칙이 있어서 하나님도 그 법칙에 묶여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보면 매순간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우리들이 생명을 영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현저히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의 환경을 움직이시고 혹은 우리의 친구, 우리의 대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안정되고 승리하는 생활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들 중에는 우리에게 파악된 것들보다는 파악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섭섭한 것은 돌에 새기고 감사했던 것은 물에 새긴다는 말처럼 하나님에 관해서도 우리들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쉬 잊어버려서 그렇지, 우리의 삶의 한 구간 한 구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사랑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한해도 가만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던 1월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한해를 맞을 때에는 예상하지도 못한 많은 어려움들을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우리 개인적으로 그렇게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속에서 무뎌져서 모르지만 돌이켜 회고하고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매순간 섭리 속에서 자연적인 질서 안에서 우리들을 붙드셔서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승리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그 일 년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전 한해를 이렇게 돌아볼 때 말로 할 수 없이 감사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추수 감사절에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껏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제 생애 최고로 하나님 앞에 감사 해보자.’ 그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나 개인의 건강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금년 한해는 17년 동안 열린교회 목회하는 가운데 가장 바쁘고 고달픈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일이 많았고 오죽했으면 제가 4월 달에 삼위일체 쓰다가 스톱을 하고 4월 하순에 끝내고 아직까지도 사실 한 줄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국내외 사역에 시달렸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틀림없이 몇 번쯤 병원에 눕든지 허리가 아팠을 턴데 외국에 가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목사님, 허리 안 아프세요.?” 그러면 “나도 모르겠어. 신기해” 하여튼 올 한 해 동안은 허리의 통증 때문에 하루이상 고생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이 느껴지고 외국에 시차도 바뀌고 그러고 돌아와서 샤워하고 곧바로 책상에 앉아서 글 쓸 것 쓰고 일할 것하고 그 다음에 회의 할 것하고 회의하고 설교하러 약속된데 가고 물론 좀 새벽에 저녁때 이렇게 시차 바뀌어서 힘들고 하는 것은 있지만 그 정도도 없으면 인간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일이 폭주하고 사역이 밀어닥치는데 내가 만약 한 두어달 동안 침대에 누워서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했다든지 질병이 생겼더라면 어찌 했을까? 정말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야 늘 있지만 어머니처럼 이렇게 세심하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물론 부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성심껏 했지만 그렇게 돌봐주지 못할 때도 많았었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시고, 신앙생활 해오도록 하시고, 지난 일 년 동안도 지상의 교회서 어찌 미끄러지는 사람이 없겠으며 목회 중에 마음 아픈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이 마음 아프고 힘든 일보다는 기쁘고 감사한 일들을 많이 주셨고, 쓰려져서 좌절하고 낙담한 성도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다수였습니다. 그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정말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들을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이 기적처럼 주신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시고,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주시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헌신하게 하셔서, 그래서 조화롭게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가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마치 내가 열심히 노를 저어서가 아니라, 마침 방향에 맞게끔 바람이 불고 파도가 물결이 쳐서 그래서 항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무엇 때문에 이 무지하고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처럼 어머니같이 세심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이끌어주셨을까? 하는 감사의 찬송을 우리가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은혜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똑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찌그러지면 우리의 삶도 함께 찌그려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자원은, 사실 당장 우리에게 주어지는 돈이나 육체의 건강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회고 해보십시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삶을 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사경회에, 혹은 예배에, 혹은 기도시간에, 주님 깊이 만나고 새롭게 살 힘을 얻었을 때에 우리의 마음에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소생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환경도 그렇게 기적적으로 바뀌었습니까? 그럴 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것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던 우리는 은혜 받아도 그 다음날도 가난했고, 질병에 놓여있어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은혜 받고 나면 병세가 더 깊어지는 적도 있었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우리를 에워쌌지만 은혜를 받고 난후에 우리의 시련과 우리를 에워싼 고난이 기적적으로 벗겨지지 않은 적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걸어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에 우리 안에 은혜가 없으면 그것은 무수히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과 원망과 좌절과 절망을 주어서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절망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기위하여 낙심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낙심 시킨다기보다는 상황을 정확하게 보게 하시므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한 일시적인 낙심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에 그 아기 예수에 관해서 예언되기를 폐하고 흥함을 받는 자의 표적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승리와 그리고 이김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폐하고 망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가 쌓아올린 것들로부터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의 무너짐과 함께 자기가 쌓아올린 그것보다도 더 좋은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낙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에서 멀어질 때의 경험하는 절망은 대부분 이렇게 아! 나는 의지할 것이 없구나! 나는 정말 연약한 존재구나! 나는 어디고 도망칠 때가 없구나! 그러니까 우리 예수님밖에 나를 인도해 주실 분이 어디 있으랴. 오! 주님! 내가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이렇게 만들어 주는 절망이 아닙니다. 신앙을 떠나고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며 경험하는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 속에 몰입되어 들어가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깊은 고통을 느끼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이렇게 이런 자리에 있도록 궁극적으로 내 삶의 질서를 움직여 오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때에도 비상하리만치 집중을 하고 절망을 할 때에도 비상하리만치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한 30년 전만 해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질병인데 오늘 가장 일반적인 질병가운데 하나나 된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무엇일까요? 우울증입니다. 우울증. 그런데 이것은요 정말 심각한 질병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울증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나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어느 순간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찌그러져서 우울증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태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고, 순종하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데서 기쁨을 찾으면서 날마다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은 절대 우울증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그 우울증에 빠질 수 없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질병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병의 선천적인 유전적요인, 그 다음에 환경, 그 사람의 생활습관, 이 세 가지가 딱 맞아 떨어질 때에 병은 깊이 증폭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개가 잘 안 맞을 때에 그때에 병이 잘 안 걸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있는데 나머지 두 개가 전혀 협조를 안 해준다. 그러면 뭐 암에 걸릴 가족력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맑은 공기 마시고 아주 건강에 주의해서 암을 유발하는 식품을 멀리하고 살고 운동하고 하면 자식을 낳으면 그 유전인자가 전수될지는 모르지만 자기는 그 유전인자가 발현되지 않으면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태도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실제적인 조언을 드리자면 뭐냐 하면 생각을 바꾸는 훈련을 몸에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굉장히 나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안 좋은 일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 했습니다. 의도해서 나를 겨냥했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의도했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진짜 왜 그런지는 뒤져봐야지 알고 누구도 장담 못하지 않습니까? 어쨌든지 간에. 내게 매우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조사해보니까 원인이 저 사람입니다. 그럴 경우에 이제 깊이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나에게 왜 이런 일을 행했을까? 그러면서 이속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정동이 일어나면 그 정동이 끓는 물이라면 언어는 거기서 솟아나는 수증기입니다. 그래서 정동이 일어나면 수많은 언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경험 있잖습니까? 누구하고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었다. 그러면 집에 가서 막 언어가 밤새도록 쏟아져 나와 가지고 한편의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러면 그놈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변할 거야. 그러면 아마 틀림없이 이렇게 다시 말할 거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야.’ 이러면서 속에서 하지도 못한 대화들이 무수히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향한 저주에 가까운 미움과 그 다음에 자신을 그런 처지에 두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 그래서 마지막에 욥의 아내가 말했던 것처럼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그것이 절망이 우리를 데려가는 마지막 끝입니다. 그것을 제가 여러해 전에 이 강단에서 민수기 14장을 설교하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여러 주일에 걸쳐서 원망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입니다.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확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어떠한 희망적인 증거도 거부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희망적인 증거도 거부되는 것입니다. 열등감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뛰어납니다. 여러 점에 있어서. 물론 어떤 점에 있어서 그 사람이 못났지만 여러 점에 있어서 뛰어납니다. 자신의 장점과 이런 좋은 점 같은 것들이 다 사라지고 자기의 결점으로 막 깊이 몰입되어가면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현재의 자기 자신인 것에 대한 깊은 원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인 것은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바꾸나하면 우리 여러분 그런 때 많지 않습니까? 아주 굉장히 확신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어떤 계기가 있어서 모든 일의 경로가 밝혀지고 나니까 절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그런 것들이 입증되어져 본적이 우리의 삶속에 많이 있었지요? 그렇죠? 네. 많이 있었잖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일들이 우리가 모든 일 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들은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추측하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항상 여유를 가지고 나에겐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어도 그럴 수도 있다고 타이르는 그리고 일을 한번 완전히 다른 쪽으로 생각해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생각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기술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태도와 기술이 잘못 되어있는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아도 그 은혜가 그 쓸데없는 것을 막는 데에 다 허비가 되어버려서 실제로 이길 수 있도록 승리하는데 이바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라가 전쟁을 해야 되는데 그래서 막 최신무기도 많이 주고 병력도 많이 줬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수시로 데모가 일어나고 반란군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군은 지금 앞에 있는데. 그러니까 이제 무기와 군대를 가지고 전적으로 전쟁에 나가도 이길까 말까인데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반군들이 들고 일어나가지고 총을 쏘고 경찰서를 습격하고 난리입니다. 할 수없이 이 군대를 찢어서 너는 여기로 너는 저기로 너는 저기로 이렇게 보내고 신무기도 보내고 나니까 이게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몰입이 되어서 마지막에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자신의 그 좌절과 절망이 데려가는 것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한탄해서 그 다음에 죽어 버리고 싶은 것과 같은 그런 낙심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아주 명백하게 말하면 그것은 마귀와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양심의 작용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속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을 바꾸어야 됩니다. 그래서 입에다가 항상 달고 살아. 어떻게? 그럴 수도 있지.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꼭 그렇게 신앙생활 잘해야 되나? 그냥 대충 살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항상 입에다 달고 살아야 됩니다. 언어는 생각을 자꾸 산출합니다. 상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그랬어도 아마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또 다른 뜻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깊이 집중하게 하여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하게 하는 것을 거절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비상하리만치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때도 비상하게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낙심하고 좌절해야 할 이유가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소망을 갖게 하실 때에는 한줄기 빛으로 마치 렌즈에 태양빛이 다 모여져서 그 하나로 내려오면서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졌던 마음이 온전히 집중이 되어서 하나님 한분에게로 향하고 약속의 말씀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내 주위에 있는 나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요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내가 반박할 수 있는 논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는 상관이 없이 나를 절망하게 했던 것처럼 이런 논리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나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찌라.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상하리만치 집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야. 인간이 모든 것을 포기한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시는 분이야.’ 비상하리만치 집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자연적인 사물들을 움직여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우리의 마음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거룩한 터치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때에, 우리가 다 감사하지도 못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고 섭리 속에서 환경을 움직이셔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이것 내버려두시는 것 같았지만 우리의 마음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주셔서 고난을 이기면서 비상하리만치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셨고, 오히려 사물들이 모두 형통하게 될 때에는 낙심하고 좌절하던 사람들이 시련과 역경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간절히 바라는 신앙심으로 불타오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바로 이런 승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받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영적인 승리가 이 세계 안에 침투하고 그와 그의 지체가 된 우리 속에 스며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한없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진노의 자식이었고 예전에는 불순종의 자식들이었으나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그의 몸에 일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받는 모든 사랑은 그리스도예수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지체적인 연결을 통해서 우리에게 스며들어 누려지는 중보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결론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있을 때에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던 때에도 우리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던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구나! 날마다 우리를 이기게 하셨구나! 우리에게 때로는 섭리의 자연적인 질서로, 때로는 은혜의 초자연적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순간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들이 우리가 한해의 삶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영위해갈지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의 인생의 영혼한 동반자는 하나님뿐이고, 하나님만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의지할 때 주님은 내가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이구나! 나를 실망하게 하시지 아니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기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단순한 사실, 그것을 어린아이처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