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표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시편 119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특별히 이 시는 다윗의 심오한 철학적 사유가 신학적 사실과 함께 묻어 나오는 탁월한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다윗의 사유는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앉고 일어서는 것까지 모두 아신다는 신앙의 고백으로 시작된 이 시는 온 땅과 우주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노래한 다음, 다시 시선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돌립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영혼의 작용과 마음의 움직임까지라도 모두 감찰하시는 지식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앞에 펼쳐질 미래의 날들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드리는 경건한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편재성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편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유행하던 지역신 개념 사상을 타파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들어온 지역신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신들은 모두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각기 자기의 고유한 영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중근동 지방에 있었던 미신적인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갈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남기지 말고 모두 멸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이겨 그 땅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가나안 원주민들은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거기서 거주지를 마련하고 자신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뒤로 물러갔을 때에 그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통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역신 사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며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지역신 사상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광야에서 힘을 쓰셨지만 가나안 땅은 농경 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니 여기에서 번영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도 잘 보여야 되지만 이 땅의 고유한 신들과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일종의 종교적 혼합주의였던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의 열기가 사라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 정착한지 불과 몇 해 되지 않아서 이런 사상에 오염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조차도 이런 사상에 오염된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시는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는 성경의 묘사를 볼 때 그도 역시 이런 사상에 감염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주전 10세기에 이런 모든 사상을 타파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야 말로 온 땅과 하늘에 충만히 계시며 인간은 어디서든지 그 분을 피하여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시인의 마음속에 안정감을 주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 경건한 소원을 불러 일으켰기에 그는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의 자신의 앞날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며 기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II.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간
A. 피할 수 없는 주의 영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배우게 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 앞에 살고 있는 인간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깊이 묵상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우리 피조물과 같은 방법으로 존재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시지만 하나님의 존재의 기준으로 보면 피조물은 또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적 사물들은 한계가 있고, 둘레를 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도자기가 있으면 시작되는 부분이 있고 끝나는 부분이 있고, 끝나는 지점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도자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둘레와 한계를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지정할 수 있는 물질들이 바로 자연적인 물질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으로 존재하는 사물도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마귀, 귀신, 천사 이런 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이 중 어느 것도 장소를 초월하여 없는 것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천사는 하늘에 있을 것이고, 마귀도 공중에 있을 것이고, 귀신들도 장소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나의 영혼이 있지만 어디라고 둘레를 한계 지을 수 있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 영혼은 나에게 있지 여러분 속에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적인 피조물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피조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 번째 물질적 사물이나 두 번째 영적 사물이 존재하는 것 같은 방법으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을 떠날 수는 없으나 그 피조물 어디에도 피조물과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그러면서도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더욱이 오늘 성경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영은 ‘루아흐(רוח)’라는 히브리 단어를 번역했는데 이 루아흐는 바로 창세기 1장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있더라” 하고 한 바로 그 신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영은 안 계신 곳 없이 충만하게 계시며 물질 속에 하나님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든 사물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 안에 피조물처럼 물질처럼 뻗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물들이 그 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피조물들 중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시고, 인간의 영혼과 교제하실 때 그 교제의 방식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의 작용을 아시고 마음의 작은 움직임까지도 모두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존재하는 세계에 비하면 아주 티끌같이 작듯이 우리의 내면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내면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밖의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세계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의 영혼의 작용과 마음의 티끌만한 움직임까지도 모두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때로는 시인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통촉해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의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원을 들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의 깊은 탄식까지라도 성령은 모두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시라고 로마서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항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실수는 바로 우리의 행복을 찾는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찾는 이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 앞에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행복해지려는 데서 우리의 모든 영혼의 부패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빛을 떠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 독립한 가운데 행복해지려고 하는 우리의 시도는 성공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더 큰 패배를 가져와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혹한 불행과 쓰라림으로 우리의 인생을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피할 수 없는 주의 영 앞에서, 그 영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갈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삶을 택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우리들이 행복해지고 복된 삶을 사는 길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이렇게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 분과 함께 즐거워하게 부름을 받은 인간이 그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대신 독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즐거움의 원천인 것처럼 삼고 그렇게 하나님 없이 복되고 행복한 삶을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욕에 휘둘리는 삶이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주인 삼은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그 마지막은 쓰라린 열매를 거두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할 때에 그는 더 큰 행복을 찾을 것처럼 유혹을 받지만 마지막에는 쓰라린 고통과 하나님과 모든 인간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죄와 불순종이 가져다 준 효과인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남아서 신앙생활 했습니다마는 하나님 바깥에서 시시때때로 행복해지고자 애를 쓰므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렸던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의 실패가 내년의 경계를 넘어 2013년까지 지배하지 않도록 오늘 단절하고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주의 영 앞에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
1. 삼중의 극단적 장소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삼중의 극단적인 장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점층법입니다. 하늘로 올라감, 거기에서 진전해서 스올로 내려감, 거기서 진전해서 바다 끝에 거주함. 또 진전을 보입니다. 올라감, 그 다음에 자리를 폄, 이것은 보다 더 장시간 동안 체류하는 것입니다. 거주함, 이것은 아예 집을 짓고 거기에서 영구히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의 점층법으로 삼중의 극단적인 장소를 제시합니다.
땅도 하도 넓으니까 이방 사람들과 불신앙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도 이 땅을 다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역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물론 이 시인의 조상 가운데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어 올라간 예가 있습니다마는 이 사람들은 지극히 예외적인 인물들이고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다가 죽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도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들리어 올리어져 하늘로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 계신 곳이 없이 하나님을 믿는 이 시인의 마음에는 거기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거기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번에는 땅으로 내려가는 스올을 제시합니다. 이 스올은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들이 명료하게 계시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사후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스올은 사후세계였고, 이 사후세계는 지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거기는 생명의 기운이 박탈당한 음침한 곳이고, 삶의 기쁨과 그리고 생명의 즐거움이 모두 상실된 낙이 없고 희망이 없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절망의 계곡을 지날 때에 자신이 스올로 내려간다, 혹은 스올에서 부르짖는다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땅속으로 내려가 버리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안 계실 것 같았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고 주님의 손이 자기들을 붙들고 계시다고 이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표현이 나오는데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관은 이 모든 세계는 평평한 쟁반과 같고 그 쟁반 위에 흙과 물이 함께 있습니다. 흙은 육지이고 물은 바다입니다. 그 물은 끝없이 샘솟듯 솟아올라서 쟁반에 넘쳐서 어딘가 허공으로 흐르고 있고, 그 쟁반 위에 투명한 뚜껑이 덮여져 있습니다. 별들은 그 뚜껑에 실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 이 천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바다 끝에 가서 거한다고 하는 의미는 그 쟁반 맨 끝에 물이 떨어지는 그 낭떠러지 끝에 가서 왔다 갔다 하면 하나님께 발각이 될 테니까 그냥 거기에 훅 박혀서 집을 짓고 오랫동안 안 나오고 산다는 것입니다. 숨어산다는 것입니다. 바다 끝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거기서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더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석에도 신통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석을 조심스럽게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시적해석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시인은 새벽 날개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큰 하얀 빛에 커다란 새가 큰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어두운 밤바다에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이 밤바다에 깔리게 된 것을 하얀 새가 날개를 편 것처럼 묘사를 하고, 그 날개 이후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나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물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자기도 여기 있는 것이 그 빛 아래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밤바다 위에 하얗게 내린 이 새 날개와 같은 새벽을 들어 올려서 그러고 나면 어두운 밤바다가 나타납니다. 그 밤바다를 항해하여 바다 맨 끝에 가서 새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새벽 날개를 치며”라고 하는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내가 새벽에 날개들을 들어 올려서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먼 바다, 깊은 어두움 속에 내가 숨어 이 새벽의 날개 그 아래로 숨어서 그래서 그것을 들쳐서 저 끝없는 바다, 어두운 밤바다의 맨 끝자락에 내가 박혀 있을지라도 거기도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의 손이 거기서도 나를 붙드신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사냥을 별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직접 제가 경험한 것은 아니고 속설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꿩이 머리가 나쁘답니다. 그래서 포수가 숨어 있으면 꿩이 살금살금 내려오는데 포수가 벌떡 일어나서 총을 겨누면 이 새가, 이 꿩이 너무 놀라서 날아가지를 못하고 그냥 포수를 바라보다가 너무 무서우니까 머리를 풀 속에다가 푹 박아버리고 엉덩이를 번쩍 든답니다. 자기가 포수를 못 보니까 포수도 자기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설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을 가리켜서 “마치 꿩이 머리 처박고 엉덩이 들 듯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랬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생명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죽이고 정말 민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살인한 바라바는 살려달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뭘 잘못 하셨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예수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진리를 말씀하시는 빛을 비추어 주시는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마치 새가 포수에게 놀라 머리를 풀숲에 박고 엉덩이를 번쩍 들고 “포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종종 무지와 어둠 속에 우리의 영혼을 처박고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벽 날개를 들어 올리며 바다 끝에 밤바다의 맨 끝자락에 가서 집을 짓고 거주한다고 하는 시인의 표현입니다.
2. 어둠 속에서도 숨지 못함
우리가 진리의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영혼에 깊은 암흑이 가리워 하나님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도 못 보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겨우 하나님을 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빛이요, 진리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해서 못 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을 감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당신을 감출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없고,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버리고 어둠 속으로 달려갈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못 만나도 하나님은 그 비진리와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그리고 음부로 내려가 거기에 자리를 펴고, 그리고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우리는 주님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찌 당신을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비하신 당신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 우리가 어찌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있습니까?”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3. 삶에 따라 다른 성품을 만남
물론 여기 살던 여러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도 있고, 그리고 여기서 살다가 여러분이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고 전근을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혼자 살던 남녀들은 시집, 장가가서 남편과 아내와 더불어 살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서 여러분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거나 혹은 낮아질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또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에 가 있든지 지금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그대로 가지고 그 장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다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겪는 이 불행과 좌절은 돈이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이런, 이런 환경과 여건 때문이라고 계속 핑계를 댑니다. 근본적으로 나의 삶에서 펼쳐지는 이 모든 사건과 이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들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다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바로 비진리와 어둠속에 얼굴을 묻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무슨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다짐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들이고,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 앞에 사는 사람이고,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을 대면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고 하나님 없이 번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넘어지고 쓰러졌든지 우리들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넘어졌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일어설 것이며, 그 말씀을 토대로 다시 살아야 될 것입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둠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어둠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며, 그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대면하여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고 믿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온 순간이라고 우리는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실 것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이 오른손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선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렇게 선택하셨고 당신의 권능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택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III. 결론: 붙드시는 하나님
그러면 여러분 이제 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 아쉽고 안타까웠던 날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이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붙드셨고, 도우셨습니다. 인도하셨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미줄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여기까지 걸어오게 하셨고, 주님을 종종 떠나기는 했어도 아주 그 분을 배반하지는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지난 한 해 동안에 행복하고 유익한 일들이 있었다면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들입니다. 실패하고 가슴 아팠던 날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한해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한해가 펼쳐집니다. 이전에 한 해 동안에 성공하고 승리하고 하나님 앞에 보람을 찾았던 일들은 금년에서 끝나지 말고 내년까지 흘러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가슴 아프고 아쉬웠던 일들은 그 실패가 2013년 거룩한 땅과 같은 이 새로운 한해에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입니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깊은 도전을 받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주님의 영 앞에 살도록 지정된 인간 존재,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을 대면하며 살아야 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는 그 사람 안에 승리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나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이 그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를 핍박하고 칠지 모르나 그는 놋 기둥과 같아서 침을 당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파멸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영원히 동행하고 이길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어딘들 없겠으며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이 이 세상사는 날 동안에 왜 우리의 삶에 깃들지 않겠습니까? 성경 어디에서 이 세상에 영원한 행복과 기쁨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렇게 사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조부재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일상적인 변화이고, 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출렁거리는 물결과 같은 이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불변하는 믿음을 붙들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또 한해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고, 우리의 의무이고, 우리의 권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해 동안에 아쉬웠던 점들을 되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갈망하면서 무엇보다도 새해를 시작할 때에 망가진 나로 시작한다면 망가진 한 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고쳐지고 새로워진 우리로 시작한다면 새로워진 한 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 한 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영혼을 정비하십시오. 고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일들을 우리의 삶 앞에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