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중 부르시는 하나님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 107:10-1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분류상 ‘찬송시’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격조 높은 찬송으로 이어지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보면 하나님은 영혼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곤고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동산이 있는데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고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그 나무에 잎들이 가득하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그런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 동산, 산을 깎아서 파놓은 그 동굴에는 사형 선고를 받고 기다리는 죄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실낱 같은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캄캄한 밤에 어둠 속에 그리고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리고 온 몸은 고문을 당하고 타박상을 입어서 피가 흐르고 그리고 말뚝에 그 쇠사슬이 묶여 있어서 용변도 앉은 자리에서 해결해야 되는 이러한 처지의 죄인의 모습이 바깥의 그 아름다운 풍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온 땅에 가득하고 언약 백성들에게 햇살처럼 내리는 때에 가상적인 어떤 사람은 지하 동굴에서 그렇게 속박되어 있는 것이죠.
II. 어둠 속에서 곤고할 때
A. 환경의 어둠
오늘 여기에서는 이러한 어둠 속에서 곤고할 때의 그 어두움을 크게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환경의 어두움입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흑암이라고 하는 것을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는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고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여 소망이 끊어진 상태를 환경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환경 속에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의 마음도 영향을 받게 되죠. 그래서 그런 속에 있는 가상적인 사람의 상태를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B. 영혼의 어둠
이것은 영혼의 어두운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속박 받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우리의 정신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못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에는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그 일을 행동으로 착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일의 행동과 그리고 뜻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이 믿음의 행동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도시에 갔는데 공원이 있었습니다. 새들이 철망도 쳐지지 않았는데 땅에서 자유롭게 다녀요. 그래서 궁금해서 봤더니 새의 날개 사이에 고무 바킹을 끼워서 날 수 없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새 다리가 타조처럼 굵다란 다리가 된 거에요. 그래서 저는 보면서 차라리 망을 크게 쳐놓고 다만 20미터라도 날아다니게 해주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하게 동물을 학대할 수 있을까. 새의 자유는 날아다니는 데에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자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도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식의 요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기술이 곧 신앙을 갖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와도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힘들어도 영혼이 묶여있지 않으면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영혼은 자유롭게 비상하여 하늘나라로 출장 가서 위로를 받고 오기 때문이죠. 아무리 환경이 막힌 것 같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되어도 만약에 날마다 하나님이 말씀 속에서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면, 은혜가 있다면, 그러면 넉넉히 그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전략은 우리의 이러한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에요. 성경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이 영적 전쟁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투력이지만 전투력은 지속적인 보급에 의해서 그 능력이 유지됩니다. 세상없이 귀신 잡는 해병이라도 먹을 것 보급 받지 못하고 탄약을 공급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그 속에서 말씀에 의해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고, 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받은 바 위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는 간절한 탄원 속에서 주님과 영적인 교통을 공고히 할 때에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시련도 넉넉히 감당하지만, 만약에 이러한 것들이 끊어지지만 여러분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련인데도 여러분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피비린내나는 고난의 길을 아주 훌륭하게 헤치고 나온 사람이 이후에 아주 작은 시련을 만났을 때에 신앙에서 물러나고 미끄러지는 것을 너무나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시련을 이기는 능력이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마귀는 전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예배당에 나오려는 여러분들의 귀에 ‘야, 오늘 교회 가지 말고 술집에나 가자’라고 유혹할 때에 아멘 할 교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회 하러 가지 말고 죄 지으러 가자’ 라고 할 때에 ‘내가 그것을 기다렸지’ 하고 따라갈 교인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게 하고,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공급받는 은혜의 능력을 차단하는 것이에요. 예배를 참여하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있게, 기도는 하지만 근심의 검은 구름으로 인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모아지지 못하도록, 설교는 듣지만 유혹과 정욕의 안개가 피어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빨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마귀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깨어서 근신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언젠가 오래 전인데, 어느 교인의 집을 심방을 갔는데, 애가 낳기도 조그맣게 낳았지만 안 자라요. 애가 왜 이렇게 안 자라나 했더니 안 먹는대요. 젖을 먹겠다고 해서 젖을 물리면 힘차게 젖을 쭉쭉 빨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 놈이 젖꼭지만 물고 잠이 들거나 아니면 물고 장난만 하고 빨아먹지를 않아요. 그러니 예배에는 참석을 해서 젖꼭지를 물어도 빨지는 않으니 그게 귓전에서 흩어지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영혼에 힘을 줄 수 있겠어요. 그러한 것들을 다 차단해서 고립된 상태에 있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면 굉장히 큰 병력이라도 보급이 차단되고 고립되면 그 고립된, 포위된 병사들은 심리적으로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보급이 끊어지니까 총알도 아껴 써야 하니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러한 영혼의 곤고함과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은 그래서 작은 것이 아니라 매우 큰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III.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
A. 인간의 생각
우리가 이렇게 환경적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영혼의 상태가 될 때,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 것과 하나님이 판단한 것의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먼저 인간의 생각은 그 모든 원인을 이 물리적 환경 안에서만 찾는 것이에요. 그러면 발견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사업에서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 내 사업에 손해를 끼친 인물이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가 끝이에요.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또 인간관계로 인하여서 내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심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일의 근원을 미루어 가면 뭔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 내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내 편이기 때문에 나를 역성을 드는 것이에요. 영원한 우군은 나에요. 그래서 항상 내가 내 편을 들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공정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예 판단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는 것이에요. 누군가 상처를 주고 받을 때,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은 이쑤시개 찔린 것까지 기억해요. 그러나 자기가 창으로 찌른 것은 기억하지 못해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남에게 준 옆구리가 뚫어진 상처는 큰 게 아니고 자기가 손톱에 살짝 긁힌 것을 엄청난 상처가 되는 것이에요. 결국은 자기가 자기 편이기 때문에 자기를 공정하게 볼 수 없어요. 결국은 인간관계에서 어떠한 어려움을 가져오게 한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사람을 고쳐놓으려고 마음을 먹던지, 아니면 다시 안 보려고 마음을 먹던지, 어떤 경우에든지 공통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자기의 판단이 옳은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많이 말을 해서 결국은 갈등이 갈등을 자꾸 불러 일으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 자신의 허물은 여러분 자신에게는 비밀이에요. 사람들이 담대히 다가와서 “이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당신이 굉장히 잘못됐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저나 이렇게 잘 말해주지, 누구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결국은 있게 마련이고, 나를 빗겨간 곳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모든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보면 말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상담 받으러 다니는 것을 자기 직업처럼 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러한 사람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물이 자정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면서 살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래서 나를 정화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깨뜨려지고 하는 것들이 물이 흘러 들어와서 나가는 것처럼 작용이 이루어질 때 그 속에서 건강한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상담이 필요하지만... 그런데 그러한 능력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환경을 향하여 불평하게 되면 마음 자체에 검은 구름이 피어 올라서 마음을 모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마음이 가장 잘 모아질 때는 두 군데에요. 미워할 때와 사랑할 때. 미워할 때는 다 모아져요. 그리고 그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충성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영화 보면 바람이 후~ 부는데, 머리가 착~ 이렇게 된 사람이 칼을 차고 종이 한 장 가슴에 품고 화면에 나타나잖아요. 발자국이 나타나며... 우리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서 떠나는 것이에요. 인생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고, 미워하는 그것 하나에 꽂혀서 삶이 복수하기 위해서 재편되는 것이에요. 그것과 꼭 같은 감정이 사랑의 감정이에요. 사랑에 빠지게 될 때, 그 때에 자기의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을 정점으로 재편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편에서 판단을 하면서 그러면서 수많은 불평과 미움, 원망, 그리고 자기가 놓여있는 이 환경이 가장 불행한 환경이고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마음 속에서 일시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이 완벽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감사한 마음은 식물에게 있어서 토양이 되는 것이에요. 감사한 마음의 토양에서 그 모든 영적인 좋은 것들이 자라나는 것이에요.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에서 이러한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불순종의 길을 갈 때에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전체를 펼쳐놓고 점을 찍어보세요. ‘아, 이 때는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지.’ 그 때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고통스러울 때에요. 물론 고통스러웠을 때 모두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찾았을 때는 모두 고통스러웠던 때에요. 그것이 어떤 이유였던지 간에,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통은 바람과 같은 것이에요. 그것을 거슬러서 항해하고자 하는 사공에게는 바람이 아주 나쁜 것이지만, 그 방향으로 항해하려고 하는 사공에게는 그 바람은 너무나 고마운 것이에요. 그래서 돛대를 높이 펼치며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때가 많은 것이에요. 한 해가 바뀌었잖아요? 한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어요? 달력 한 장이 넘어갔다고 해서 마귀가 그것을 무서워하겠어요? 우리의 악한 본성이 그것을 두려워하겠어요? 이 해가 가고 저 해가 온 들,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지 않으면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판단으로 우리의 고통과 시련의 문제를 진단해 주십니다.
B. 하나님의 판단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고난을 만나는, 시련을 만나는 이유이고, 그리고 본질인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충 타협하고 살면 어려움이 없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신앙의 정절을 굳게 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핍박을 당하게 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과 원수가 됩니다. 이러한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지존자의 뜻을 받들기 때문이죠.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올바르게 하려고 애를 쓸 때에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만나게 되고 압박 속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예외적인 경우에요. 오늘 날 우리는 이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난 단언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완벽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2층 건물 아무거나 얻어서 십자가 붙이면 저절로 교회가 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아무 나라에서도 그렇게 허락 안 해요. 이런 자유를 누릴 때에 우리들이 이러한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에 종종 설교하러 다녔거든요? 제가 방문한 교도소는 이천명 정도가 수감이 되어있대요. 그런데 주일이면 거기 예배당이 있어요. 그런데 예배당이 얼마나 작은지 160명밖에 못 들어가요. 거기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천명도 넘는대요. 이상하게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기독교라 그런대요. 그리고 또 예수 안 믿던 사람도 거기 와서 많이 예수를 믿고. 그러니까 160명을 어떻게 뽑냐고 하니까, 착실한 사람을 방장이나 간수가 추천해서 보내준다고 해요. 일주일동안 그 예배에 들어가기 위해서 잘 보였는데, 이게 160명이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뽑히지 못하면 사람들이 밥그릇하고 숟가락을 밖으로 내밀고 두들기면서 데모를 한 대요. 제가 아는 한 죄수는 거기에 한번만 집어넣어 달라고 애원을 해도 안 되니까 머리를 쇠창살에 받아서 피를 내면서 자기를 예배에 안 보내주면 여기에 받아서 골을 뽀개어 죽을 거라고 그런 사람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일부러 계속 사고를 친대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자기 독방으로 보내 달라는 거에요. 이 사람들 때문에 성경을 못 읽겠다는 거에요. 참 재밌죠? 그 사람들이 그 거의 8:1의 경쟁률을 뚫고 에배당에 들어갔을 때 그 날의 그 감격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 감격이 있습니까? 그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내 힘으로 교회에 다니는 줄 알고, 내 힘으로 연구하는 줄 알고, 내 힘으로 구역장 하는 줄 알고, 내 힘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가 은혜에서 미끄러져 보면 내 스스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찬양) 하나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가 곁길로 가려고 할 때 가끔은 곁길로 가게끔 내어버려 두십니다. 우리를 포기하고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주님을 멀리 떠난 다음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큰 섭리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순종의 길을 가도록 내어버려 두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할 때에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있었고,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 하인들을 시켜 못 떠나도록 가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체의 감사함도 없이 허랑방탕한 꿈을 꾸며 자기의 집에 있는 그 아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먼 나라로 떠나도록 허락을 한 것이에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당연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사랑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모든 것이 있었을 때에는 마음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잃어버리고 난 후에는 없어진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가진 아들과 함께 살았으니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더 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때로 여러분들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에 곤고하도록 내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도록 내어버려 두시고, 고통 속에 울부짖도록 하나님이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를 버렸다, 자기가 당하는 이 고난이 자기의 죄의 값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을 때, 각성하고 난 후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복수나 보복이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마음을 낮추고 고통 받게 하시지 않고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매를 대시는 것이에요.
IV.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찬양)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더 정결케 하시고 신실한 자들을 더 굳센 믿음 위에 세우시고 주님 앞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을 보다 더 티 없이 맑게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에게 가시와 같은 고통을 주시고, 그리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도록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넘어짐과 미끄러진 신앙의 부패의 원인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자기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된 이 환경의 모든 어려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그 원인을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은 변명할 것입니다. “아, 글쎄,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잘못했는지 내가 잘못했는지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 나에게 손해를 끼친 그 놈이 나쁜 놈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설득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의 영혼에 잃어버린 생명을 줄 수 있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줄 수 있고 죽어 간 여러분들의 영혼을 소생시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빛으로 이끌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여러분들을 완전히 자유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에요. 우리들이 과학이 발달하니까 이제는 우리의 몸을 보고 앞으로 언제 나이 때쯤 되면 무슨 병이 생길 것까지도 미리 안다고 해요. 그게 ‘지놈 프로젝트’잖아요. 이제는 동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들을 작성하는 단계에 있다고 해요. 우리 몸도 우리 몸의 건강의 쇠퇴, 질병, 이러한 모든 펼쳐지는 것들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지만, 우리 안에이미 있는 인자의 펼쳐짐이에요. 그러면 똑같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고 그 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면서 행동하며 살게 될지는 우리 마음 속에 고이 적혀 있는 것이에요. 이 펼쳐지는 것을 바깥에서 펼치느냐, 방안에서 펼치느냐, 미국 가서 펼치느냐, 소련 가서 펼치느냐의 차이이지 결국은 펼쳐져요. 신앙은 이 펼쳐짐이 아니라 펼쳐지기 전에 있는 인간의 이 마음 속에 있는 이 집약된 요소를 신앙 안에서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시켜 그에게 새 삶을 살게 하는 데에 신앙의 요체가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바꾸고 고쳐서 새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에요. 요즈음은 의학 기술이 발달되어서 우리의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진단하는 장비들이 눈부시게 발전했어요. 사람을 통 속에 집어넣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기계인데, PET스캔이라는 기계에 사람을 집어넣고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촬영을 해서 5mm이상의 모든 암, 종양이 발견되는 것이에요. 이것들이 펼쳐진 다음에 치료를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요. 여러분 한 20년 전에는 절대 듣지 못했던 말들이 요새는 유행을 해요. ‘대박’ 난 맨 처음에 이 ‘대박이 무슨 뜻인가 했어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암튼 좋은 게 펑 터지는 게 대박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대박은 로또에 당첨되거나, 죽을 병 걸렸을 때 명의를 만났을 때, 아니면 벼락 출세했을 때 그것을 대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불행이 펼쳐지기 전에 그것들을 말씀의 스캐너로 찾아내서 그것이 진리로 치료될 때에 그게 바로 인생의 대박이에요. 별로 동의가 안 되는 모양이에요.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죽을 병에 걸리고 교통 사고가 나서 차가 몇 번을 뒤집히고 뇌 수술을 받고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다 똑같아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달았어요. 맨날 이렇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게 펼쳐지고 난 다음에 그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감당할 수 없는 과외비를 지불하고 깨닫는 게 그게 인생의 대박이에요? 아니면 그런 것 하나도 지불하지 않고, 아멘~ 나에겐 이러한 잘못된 것이 있구나, 이게 옛날 구식 기계에는 잘 안 나타났는데, 이 신식 기계를 통해 나타나는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비춰주시고, 내가 못 만났던 사람과 환경을 통해 나를 찔러서 검사를 하시고, 그러고 보니 나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저 밑바닥에 아주 나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펼쳐질 때에 여러분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식구들도 거기에 같이 들어가고,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고, 여러분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도 같이 들어가,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미리 찾아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새로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고자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오늘도 우리를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마냥 형통하도록 방임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때리고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형통할 때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고통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찬양)
이제 그렇게 여러분들의 영혼 전신을 촬영할 수 있는 통이 마련이 됐는데, 이게 사경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 통 속에 머리부터 들어가서 마지막 금요일에 발 끝까지 나오는 것이에요. 이 진단서는 이제 곧 인터넷에 뜨겠죠? 그러면 그것을 잘 판독해서 그래서 우리를 날마다 고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래서 새로운 한 해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금년에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 제목이 여러분들이 복을 받는 것이에요. 제가 16년 만에 처음 이러한 기도를 절실하게 해요. 다른 것들도 절실하지만 특별히 금년에는 성도들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개밥그릇에다가 생수 따라주시는 법이 없어요. 그러면 못 먹잖아요. 생수는 깨끗한 사발에 부어야 하잖아요. 주님의 복은 생수와 같아요. 개밥그릇 같은 우리의 마음을 사경회에서 헹굽시다. 그래서 깨끗해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