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광,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3:3)
녹취자: 백지영
제가 정말 사랑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3편은 표제에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할 때 쓴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을 때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것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라고 분노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반역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의 징계라고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반역은 다윗에게 환경적인 어려움과 그리고 내면적인 어려움을 동시에 일으켰을 것입니다. 더욱이 반란의 주동자가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이었고, 압살롬은 그러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윗은 그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 이후로 아버지였기 때문에 마음을 많이 풀고 어찌하든지 자식으로써 품으려고 했을 터이니, 그러한 다윗이 반란을 당하여 감람산으로 도망갈 때에 흘렸던 그 눈물은 단순히 큰 환란을 당한데서 오는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받은 배신과 인생의 그 믿을 수 없는 허무함에 대한 눈물,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를 주군(主君)으로 섬기며 따랐던 충성스러웠던 신하들의 배신까지 아우르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일시에 모든 대적들이 일어나서 도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던 왕가(王家)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다윗을 버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러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마치 다윗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고 악을 행한 것인 양, 사울에게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에게도 그렇게 행하실 것이라고 비난하며 반란과 정변을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안으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계라는 회한(悔恨)과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받은 배신과 충성스러웠던 신하들의 반역을 보면서 아마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후 무리들을 모으고 왕으로 추대된 이래로 가장 외로운 시기를 지났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면서 다윗은 사면을 돌아보아도 어디 한군데 의지할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은 자신의 모든 처지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기로 뜻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앙망할 때, 눈앞에는 어떠한 상황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새롭게 깨달으며 그 성품의 빛 아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영광이시요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방패는 수많은 화살의 공격을 막아주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칼의 공격도 막아주는 매우 유용한 전투장비입니다. 이러한 방패를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회상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고 유명해지기 전 까지는 누구도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나라를 건설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수많은 역경들을 지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고 지켜주셨습니다. 이번에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선동을 받으며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여 반역의 발꿈치를 들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조용히 앙망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팔로 자기를 막아주셔서 당신 편에 서 있는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의 족장 아브라함에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下)라고 계시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묘사요, 다윗은 그것을 굳게 붙들면서 이 고단한 시련의 때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의 영광이시오”, 영광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뜻으로 주목하게 하는 장점이나 특징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어느 날 화장을 예쁘게 하고 새 옷을 잘 입고 오면 사람들이 주목을 합니다. 외모에는 변화가 없으나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을 때 예전에 그를 깔보던 사람들이 높여 보게 됩니다. 하찮은 범인인 줄 알았는데 대화를 나누어 보니 깊은 학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끼며 존중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주군으로 복종하던 장군들이 반기를 들고,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겠다고 덤벼든 압살롬의 행태는 다윗을 깔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그런 은혜가 있어야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영광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에게 영광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멸시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시오”, 하나님만이 나를 높이시는 분이시고, 주님만이 나를 빛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나를 지극히 모든 사람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높이신 높임만이 아름다운 것이고, 주님이 높이지 않는데 자신이 자신을 높이는 것은 매우 추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영광을 사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큰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도 현재적으로 체험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바로 그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으로 인해 다윗이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도대체 이 큰 고난과 시련은 왜 온 것일까요? 혹자는 다윗이 지난 날 저지른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서 징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징벌을 하시려면 그때 하시지 다 회개하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이런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형식은 징계의 형식을 빌었지만 내용 그 자체는 징계가 아니라, 말년에 다윗을 다시 한 번 신앙적으로 부흥시키시는 커다란 계기로 삼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큰 시련을 허락하신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다윗은 이전에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큰 시련과 환난을 경험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그의 영혼은 정결함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환난이 정결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정결함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은총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특히 무엇인가 잘못이 있어서 왕에게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온 사람들일 경우에는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왕 앞에 떨게 됩니다. 이때 보좌에서 들려오는 ‘죄인은 고개를 들라’는 부드러운 음성은 왕으로부터 은총이 가까웠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다윗이 이 시련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달으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으로 이 고난의 때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산들 시련과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키케로라고 하는 로마의 철학가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내가 통곡을 하며 비통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때 이 대철학자 는 아내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 전체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인데 그 파편 하나를 붙들고 몸부림을 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시련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신의 책 속에서 “우리 인생의 시련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눈물로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시인처럼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는 기대를 가지고, 고난도 시련도 주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그분의 성품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낙심과 시련 속에서도 당신을 향해 목마른 죄인들에게 죄인은 머리를 들라고 은총으로 그들을 부르시고 대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신앙으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