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세 가지 뉘우침(단9:13) 2004.9.7 교직원예배 1
2. 긍휼을 비는 기도(단9:18~19) 2004.3.16 교직원예배 5
3.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라(대하16:9) 2004.1.27 교직원예배 9
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의 형통함(요15:7) 2004.2.12 교직원예배 13
5. 하나님이 기뻐하시면(민14:8) 2004.11.2 교직원예배 17
6.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창39:3) 2003.5.6 교직원예배 22
7. 어디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대상 18:6) 2003.6.9 교직원예배 27
8. 전도할 문을 여시는 하나님(골4:3) 2004.5.11 교직원예배 32
9. 신적인 번성(호14:5-6) 2004.6.29 교직원예배 35
1. 세 가지 뉘우침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단9:13)
모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모든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가운데 주어지게 됩니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으면서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다시 말하면 포로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은 포로로 끌려 온지 약 60년이 넘었을 때 일입니다. 그러니까 얼마 안 있으면 이제 포로시대가 끝나고 돌아가게 될 때가 올 그때쯤에 다니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와 그리고 하나님의 기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이 자신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게 된 것이 죄악 때문이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예레미야의 이 서책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의 실상과 그리고 그 죄의 실상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렇게 죄를 짓고 실패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도 알게 되었다 그런 뜻이지요. 그러면서 다니엘은 이미 벌써 60년전 에 일어난 일인데도 포로상태가 계속된 가운데 마치 지금 새롭게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애통하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 이지요. 그때 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셨고 그렇게 주님이 평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환란을 당할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세 가지를 깊이 후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선 첫째는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던 것, 그것에 대해서 지금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은 예고 없이 한번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걸쳐서 예고되었고, 예고된 그것이 때가 이르매 이런 놀라운 성취를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다니엘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떠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많이 흘러갔고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시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그러한 유능함과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하는 이 모든 성취들은 자신의 순전함과 바꿀 수 있는 성실의 것이 아니입니다.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 은 신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향한 열망이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은 우리들이 믿을 수 가없다. 이거지요. 잠깐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교회에 유익을 주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지 모르지만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 은 신앙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그 내면의 세계에 어떠한 질을 소유하고 있느냐하는 그것은 일을 대할 때 도 드러나지만 그러나 죄를 대할 때 그 하나님의 백성의 내면의 세계의 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지요. 죄의 지배아래서 회복되기 매우 힘든 죄의 지배아래 있는 징후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인해서 전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이 회복되기 어려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징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사실 다니엘이 끌려 올 때 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자신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끌려온 것처럼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있을까요? 이처럼 그는 이렇게 60년전 에 이뤄진 죄,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아파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내면의 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오늘날은 기도라고 하는 경건 자체가 자신 개인적인 신앙적인 목숨을 겨우 연명하기위한 젖줄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통탄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부흥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기도가 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영적생명을 연명해 가는 가느다란 젖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통로를 통해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뉘우칠 수 없는 사람들의 죄를 인해서 대신 아파하게 하시고 기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그들의 죄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도록 만든 통로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은혜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더욱이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눈에 다른 사람들의 죄, 공동체의 악에 대해서 아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심각한 영적인 무감각의 빠져있는 상태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는 이일을 위해서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은 것을 깊이 참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와 첫 번째는 아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죄의 지배 아래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일시적인 깨달음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은 은혜의 지배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중에 하나가 말씀의 깨달음들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 말씀을 깨닫는 은혜의 경험들이 매우 간헐적으로 일어난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도 그것을 실천에 적용하기가 매우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서 그래서 깨닫고는 다시 깊이 잠들어 버리는 불행한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죄의 지배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이 화합하지 못하여 삶을 바꿔 놓고 열매 맺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깊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이 아름다운 삶은 우리가 끊임없이 죄로부터 떠나고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살피고 정결해 지려고 올곧게 노력하는 가운데 획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고 그것 때문에 깊이 변화를 받고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어야지만 우리들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성결한 삶을 살수 있을 텐데 그게 안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죄를 이길 힘이 약화되니까 쉽게 정욕에 지고 또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땅히 분발해야할 열심들이 쇠퇴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삶이 죄에 빠지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뚜껑이 닫히고 그의 계시가 보이지 않는 것 이지요. 공급받는 것이 없으니까 불순종은 촉진되고 은혜의 힘은 점점 쇠퇴하고 있었던은혜 도 다시 부패하게 되지요. 이런 악순환들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쓰지 아니하였던 바에 대해서 깊이 민족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있는 것 이 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잠이 안와서 5시쯤 돼서 교회를 내려왔는데 마당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하고 싶다. 혹은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깊이 꽂혀서 오래도록 갑니다. 꼭 갖고 싶을 경우에, 꼭 하고 싶은 일일 경우에,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죄를 지을 때가 되면 사람의 생각을 그 특정한 죄에 고정 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죄안에는. 그런데 제가 생각 했던 건 뭐냐면 우리들이 이렇게 은혜 안 에 살려고 하다 보면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 있잖아요? 나는 왜 이렇게 많이 애를 써도 사역에 열매가 없을까? 혹은 나는 아무래도 맡겨준 일은 너무 큰데 지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혹은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지도해 나가는 데 지도력이 현저히 부족할까? 혹은 나에게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왜 돌아서고 나면 그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할까? 혹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가 변하지 않는 걸까? 굉장히 치명적으로 중요한 질문들이거든요. 그런데 그 질문들은 떠오를 때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떠오르는 것 같다가도 그게 지속성이 없어요. 금방 후루루 하고 마음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에드워즈를 읽고 있는데 오늘도 에드워즈의 리잘루션이 생각이 났어요. 얼마나 놀라운 집요함, 그래서 그의 결심 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기울여 들어보세요. “만약에 나의 신앙생활 가운데, 영적 생활 가운데 신학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발생한다면 여러분들의 용어로 표현 하자면 성경에 비추어 보아서 그 해결해야 될 문제가 대두가 된다면, 성경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될 어떤 질문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대답을 들어야 될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지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탐구 하여 그 답을 찾아내겠다.” 그러니까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면 떠오르긴 떠오르는데 세속적 인 것들에 대해선 마음의 생각이 꽂혀서 오래도록 지속이 되는 데 이 신령 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수히 떠올랐다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뭘 의미하냐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하는 결심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아침 구름과 같아요. 잠시 떠오르는 데 잠시 후면 다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 하지 않아요. 이러니까 탐구하지 않는 것 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깨달음 속에서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다니엘이 깊이, 민족을 대신해서 회개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은총을 구하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은총의 도움을 바라면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했더라면 죄가 감하여 질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총을 구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무엇을 하나님 앞에 해달라고 단언적으로 하나님 앞에 요구할 때는 우리들이 많은 성경의지식이 필요하고, 그리고 빛이 있어야 됩니다. 정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았다면 그 사람은 완성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이 변화무쌍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때마다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께 그것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상당히 완성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이지요. 그만큼 우리는 깨닫지 못하기가 어린아이와 같고 둔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은총은 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미천하고 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은총은 구할 수 있습니다. 내게 무엇인지 난 모르지만 내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그걸 주십시오. 그걸 구하지 아니한 죄를 선지자가 깊이 탄식하면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대신 참회하며 기도하고 있는 거지요.
가을이 부쩍 다가오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이제껏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참 크지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교회에 무슨 큰 환란이 있었던 것 아니고 성도들 가정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야 있었지만 신앙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교회도 성장했고 여러분들도 많이 흔들리지 않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을 섬겼어요. 감사했지요. 감사 할일이 너무나 많지요.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까 만약에 이렇게 좋으신 주님 앞에서 우리가 좀더 마음을 모아서 주님의 은총을 구했더라면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주님 앞에 더 많이,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 희망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간구했더라면 좋으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나님 앞에 열매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총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 탁월한 교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같이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고 아버지 앞에서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오늘도 찾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 사랑과 영광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긍휼을 비는 기도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이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9:18~19)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고 저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가운데서 이 포로생활이 거의 끝나간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으면서 연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오고 정말 긴 세월을 남의 나라 땅에서 살았는데 그 해방의 날이 가까워온다 라고 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은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위대한 전망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관심을 가지실 때에 그분의 마음이 긍휼에 가득 차다면 우리가 그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의 호의입니다. 은혜는 항상 긍휼이 여기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우리에게 미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함이라고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후에 일단의 많은 무리들이 각성을 하고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다시 포로로 끌려온 생활에 젖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벌써 예레미야의 애가를 통해서 예고된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하자 사람들은 경건한 슬픔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앞에 용서와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나라가 다 망한 속에서 자기의 보물을 꺼내가지고 와서 양식을 바꾸러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만큼 생각이나 모든 욕망이 자기 개인 중심으로 움직인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이 다니엘 선지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멸시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 그 탄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형편이 육신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긍휼이 우리의 양식이라고 믿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도록 그렇게 간구하고 그렇게 은혜를 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장면은 용서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막는 불리한 것이 오직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요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함도 아니라 오직 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내고, 그래서 그 모든 쏟아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필요한 하늘자원을 공급받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 것이지요.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요? 저는 요즘 용서를 묵상하면서 용서의 경험 말고 하나님이 정말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경험이 용서 말고 또 다른 경험이 있을까? 용서를 통해서 깊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용서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말씀의 빛이 그 마음에서 떠난 것이고 영혼의 어두움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칼빈은 그 성화론에서 수시로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에 대해서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고 있고 특별히 기도론에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는 기도의 탁월함을 힘 있게 증거 하였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부패하기 쉬운 인간이기 때문에 늘 마음을 쏟는 것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을 때 어떻게 마음을 쏟아놓게 됩니까?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깊이 쏟아놓게 될 때 그 대부분은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허물,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 그리고 우리의 죄 성 이런 것들을 발견할 때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깊이 쏟아 놓아질 때는 항상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혹은 나는 너무 약합니다 라고 하는 깊은 탄원이 함께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한 것을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약한 자가 강한 자고 강한 자가 약한 자입니다. 끊임없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요즘 묵상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 그리고 질기디 질긴 악, 그리고 뼈 속 깊이 배어 있는 모진 포악한 성품,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 집요함 이런 것들을 봅니다. 정말 우리의 힘이나 결심으로서는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용서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용서의 깊이와 그 폭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진실 되게 참회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미천한 경험이긴 하지만 목회자가 강대에 엎드려 자기의 죄를 위해서 많이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강대에 엎드려서 아무도 모르고 오직 자신만이 알고 주님만이 아시는 심지어는 자신도 몰랐던 부분들을 진리의 말씀의 빛으로 깨달아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면 거기서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이 주님께 심겨진 영혼들에게는 비료가 되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영혼들 곧 쓴 뿌리들에게는 제초제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은 마귀도 아니고 죄 많은 이 세상도 아니고 자기의 헌신을 몰라주는 교인도 아니입니다. 오직 지상 최대의 적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적은 구체적로 죄를 사용하여 나를 향하여 역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비는 것은 산불이 나는 것 같은 야산의 화재 상황에서 먹구름이 몰려와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성도는 마른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젖어 있는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고 세상의 나라는 흐리게 보인다는 거예요. 그 기도가 정말 용서를 비는 기도이면.. 오늘 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때 그 용서가 무얼 위한 용서였겠습니까? 정말 구약성경에서 신령하게 산 부귀를 누리면서도 신령하게 산 몇 사람 되지 않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그러면서도 믿지 않는 나라의 관리가 되어서 선한 행실로 빛을 발한 사람이었습니다. 화평함을 좆으면서도 거룩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이 기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적인 연대를 느끼면서 그들의 죄가 자기의 죄인 것처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애통하고 뉘우칠 수 없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주님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불러 주셨을 때 그 제사장으로서의 가장 탁월한 기능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주님께 비는 그 중재 기도의 기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깊이 용서를 비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는 샘물과 같아서 우리가 변화되면 거기로부터 솟아오는 샘물이 주위를 놀랍도록 정결케 합니다. 그리고 그 샘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행동을 촉구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였지요. 이것은 다니엘이 큰 일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조나단 에드워드가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너무 작은 성공에 익숙해진 나머지 주님이 우리의 상식 안에서 행동하실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크고 위대한 일을 우리를 위해서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면을 둘러봐도 그 하나님이 행하실 그 크고 위대한 일을 구하는 사람이 없고 구하는 사람이 있어도 구하는 그 사람은 그 위대한 일을 기대하기에 삶이 적합하지 않고 또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순결한 동기로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시기만 하면 그렇게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지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함께 갈멜산에서 겨루었을 때 누가 감히 그 산위에서 장작을 쌓아놓고 빌면 하늘이 열리고 불이 내려오리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이렇게 많이 애를 쓰는데도 어떻게 열매가 이것밖에 없을까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연구해 낸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을 때에는 그 최선의 방법을 최대의 힘을 다해서 활용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적은 성공을 가지고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아무리 현실을 성실하게 살고 충실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을 뛰어넘는 꿈꾸는 것 같은 일 그 일이 나 개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가능하고 내가 섬기고 있는 이 사역의 현장에 있어서도 가능하고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아왔던 나의 삶의 환경을 변혁함에 있어서도 가능하다 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이 그 일들을 행하시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자신의 악함 때문에 용서를 빌면서 기도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사역을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면서도 꿈꾸는 것 같은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 속히 행하시지 않는 것을 인해서 가슴아파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일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개인의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나 우리가 부흥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행하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대하16:9)
늘상 하나님 앞에 깨닫는 일이지만 우리 안 에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겁니다. 아무리 그것을 위장하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려고 해도 없는 것은 활용할 수가 없고 있는 것은 내 자원으로 활용해서 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을 보면서 정말 목이 메이도록 그리워지는 것은 능력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두 가지 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능력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복잡한 인간의 영혼을 해부 할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거쳐서 그리고 비록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는 없어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참된 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인격적인 감화의 능력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정말 이런 능력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항상 많이 고달프지만 그러나 주어지는 열매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에 너무 피곤한 가운데 사역을 한 가운데 잠자리에 들어갈 때에는 열두시 한시 집에 들어 가 면 피로 가 엄습합니다. 그때 내 능력을 한껏 발휘해서 좋은 결실을 맺은 날은 그 피곤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피곤한 날은 잠도 안와요. 그래서 이제 수면제를 한 알 먹고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며 는 그렇게 가슴이 허전할 수 없어요. 왜 참 능력 없이 사역하는 것이 이렇게 우리를 고달프게 할뿐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별로 한 것이 없구나. 미국 사람들의 가장 심한 욕설이 뭔지 아세요? 야 이놈아 너 같은 놈은 능력 받지 말고 목회나 실컷 해라. 이게 미국 사람들 속에 있는 아주 심한 저주 가운데 하나래요. 성령의 능력 없이 목회나해라. 그런 능력이 우리에겐 절실하게 필요해요. 뿐만 아니지요. 우리가 요새 교육관을 마련하는 문제를 가지고 지금 노심초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데 며칠 그 일을 보면서도 역시 필요 한 게 뭐냐면 비둘기 같이 순결한 것 만가지고는 안돼요. 뱀 같이 지혜 로 와야 해요. 특히 지도자들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문제를 풀어서 결국은 해결할 수 있겠는가 지혜의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걸 깨닫게 해요. 여름에 해운대에 가면은 이색 직업이 하나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백만명 의 사람이 와서 거기서 수영을 하다가 가니까 동전이 얼마나 많이 떨어지겠어요. 모래에 금속 탐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백 원짜리 만 줍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는 수영을 하는데 그 사람이 내 앞에서 그걸 하고 있습니다. 쫒아 다녀 봤어요. 한데 백 원짜리 가 부지기수로 나오는 거야 이게 깡통으로 하나 가득이야 그 일당이 실컨 되겠더라구요. 어떤 때는 거기서 다이아 반지 같은 것도 나온대요. 마찬가지로 그런 지혜의 능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근데 그렇게 우리에게 있어서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 한데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느냐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 말씀이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들을 우리 에게 아마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성의 빛을 따라 섬기게끔 내버려 두셨겠지요.
근데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있는 자연적인 능력 이외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성경 을 보십시오. 자연적인 능력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여 진 것 은 사실이지만 덧 부쳐 지는 하나님의 능력 없이 자연적인 능력만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 한번 들어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의 모든 문물을 통달하고 재주가 뛰어 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능력만 가지고 하나님 섬기려고 할 때 섬길 수 있었습니까? 결국은 사람 하나 죽이고 그리고 도망치는 도망자 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시니까 그 부어진 능력 때문에 자연적인 능력이 살아 난 것 이지요. 어제도 전도사님이 몇 분 모여서 공부를 하겠다고 해 청교도를 좀 배워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연적인 능력을 쌓는 일에만 열심을 내서는 안 된다 덧 부쳐지는 능력이 부어질 때 그게 빛나는 거지 절대로 그렇게 안 된다 이거지요. 그런 능력이 어떻게 오느냐 성경이 이야기해요.하나님이 사면을 두루 감찰 하시니 감찰한다는 것은 감시 한다는 것이 입니다. 사면을 두루 감시하시면서 그러면서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 들을 또한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뭐냐면 믿음이 있는 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나 구약 성경에서나 믿음과 능력 이 두 가지 는 짝으로 따라 다니는 단어입니다. 마치 지혜와 충성이 항상 따라 다니듯이 이 믿음과 능력은 따라 다녀요. 믿음이 뭡니까? 요새 새벽 마다 믿음에 대해서 설교하잖아요. 믿음이 뭐예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 그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 시골에서 살던 아이가 서울에 올라 왔을 때 그 정신없이 움직이는 교통수단들 을 보면서 약간은 두려워하면서 잡은 엄마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의뢰 이게 믿음이 입니다. 그게 뭡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 라 고 고백을 하는 거 입니다. 구약적인 표현이 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그제 밤에도 교육관 문제를 어떻게 하나 뭐 손바닥만한 거 몇 개 얻는다고 해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하나 근데 새벽에 평강을 주셔요. 마음을 다 비웠어요. 그래서 뭐냐면 어디든지 주님이 이끄시면 이끄는 대로 가지 그러면 되지 항상 하나님이 먼저 행하시고 그리고 걸어갔고 우리 혼자 한거 같아도 나중에 보면 주님이 다 예비 하셔서 그래서 왔는데 뭘 이렇게 걱정을하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가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하나님이 내 맘을 아시니까 그러니까 아마 하나님은 내 편 이실 거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게 해 주실 거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문제는 뭐냐 하며는 환경에 있는 게 아니입니다. 능력이 어디 있나 어디가면 능력을 좀 받을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 “다라쉬” 라는 단언데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을 또한 찾으시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 믿음에 사람들은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입니다. 한 가족입니다. 그건 좋은 것이 아니입니다. 한 가족이고 한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웃에 있는 교회나 그 다음에 자기 동역 자 들이나 절대로 나쁘게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을 가져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의도는 안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볼 때 경건한 의미에서 시기심이 생기는 사람 제가 오웬 을 공부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했잖아요.
요즈음은 그렇지 않은데 한때는 시기심을 느꼈어요. 그래서 어떤 때 는 하나님 앞에 투덜대기도 해요. 도대체 오웬 은 누구고 400년 후에 살고 있는 저는 누구 입니까?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없는 것 없이 모두 알게 해주시고 결국은 참된 개혁주의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적인 신탁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광대 무별 한 지식을 주시고 저는 이렇게 초라하게 살아갑니까? 그랬어요. 지금도 그 시기심 이 가시지 않았어요. 그것은 이렇게 느끼는데 그건 경건한 시기심이 입니다. 왜! 불경건한 시기심은 상대방을 깍 아 내리게 만들지만 경건한 시기심은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느꼈지만 한번도 그 분을 깍 아 내리거나 모 그러고 싶은 마음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안에서 그 분을 높여 드리고 싶고 존경하고 싶을 뿐이지요. 그런 마음을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 왔을 때 가나안 사람의 마음 은 두려움으로 녹아내렸어요. 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래야 돼요. 우리의 사역의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것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참된 존재만큼 그렇게 섬기는 거구 섬기는 그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존재인 것이 입니다. 그래서 내가 섬기고 있는 이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고 그리고 내가 섬기고 있는 이일에 자꾸 어려움이 생겨서 교회에 누가 되고 내가 맡고 있는 이일이 현저히 비효율적이거나 혹은 진척되지 않아서 다른 지체들이 나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될 때에 그때 우리들이 꼭 물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이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 에게 기쁨이 되고 있는 가 그리고 혹시 이 모습으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싫증이 느껴지시는 그런 종류의 존재와 삶은 아닌 가 생각해야 되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마다 무한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요셉입니다. 보디발의 사회적인 지위와 갓 끌려온 히브리인의 노예의 사회적인 지위는 비교할 수 가 없는 거지요. 근데 성경은 창세기 39장에서 하나님이 요셉을 생각하사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 이거입니다. 그거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복 덩어리입니다. 어딜 가나 주변의 환경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들지 않는 한 그는 정말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해요.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해요. 나는 여러분들이 뭐 바뀌어 진 부서가 400명으로 늘어나고 500명으로 늘어나고 그것도 기쁘지요. 그렇게 슬플 건 없지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기쁜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입증할 때 그때 그렇게 기쁘고 마음이 아플 수 가 없어요. 어떨 때는 그렇게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 하면 눈물이 나요. 그때 비로 서 내 마음에 그런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을 내려다보시면서 자기를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도 이런 마음이시겠구나. 사역이 잘 안되고 망가지면그것도 슬프지요. 왜냐하면 영혼들이 자꾸 망가지니까 그렇지만 그 망가진 것 들을 통해 드러나는 전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여러분 자신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부패한 모습을 보게 될 때 그 땐 정 반대로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 가 없어요. 그리고 혹시 저 사람이 하나님이 불러 주시지도 않았는데 사역의 현장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본인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사역을 하지 말고 평범한 성도로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요. 또 그런 하나님을 향한 정말 선교적인 부르심이 없이 이렇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보다는 재능이 있으니까 훨씬 더 좋은 조건이 있는 일반 직장에 나가서 근무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오늘도 성경 에 보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요. 누구에게 주시냐 하면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을 만나면 좀 자연적인 능력이 모자라는 데도 하나님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자연적인 능력이 많은 사람보다는 자연적인 능력이 월등히 모자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족한대로 그 사람을 쓰셔서 지기의 일을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구도 의 삶 우리의 도 이신 그리스도예수를 따라가는 이 삶 이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이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과 섬김 경건 사람과의 관계 심지어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구도의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삶이 하나님 앞에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사역을 잘 하셔야 되지만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발견 되는 거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 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이렇게 어렵고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 들 에 대한 사랑과 정욕 때문에 하나님을 주시 하지 않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근심과 염려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세상에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은 당신을 향해서 주목하고 당신을 갈망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래서 오늘 새벽에도 기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커다란 일들을 앞에 놓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 일 이 기도가 많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나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이 좋은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드러나는 그런 섬김 의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찾고 추구하는 흔적들이 배어 있어야 해요. 전심으로 주님을 찾은 사람 그런 이름이 붙여져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 이지요.
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의 형통함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기도에 관한 책을 한권 탈고를 했습니다. 쓰면서도 제가 깊이 느끼는 건데 어떤 사람을 기도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언제든지 우리 지도자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 혹은 구역의 식구들을 기도 하도록 자극하고 독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영적인 권세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자기가 돌보고 있는 양떼들에게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기도 할 수 있도록 독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도 그렇게 기도하도록 독려 하는것도 두가지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정말로 영적으로 그 무엇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고 그래서 열렬히 기도하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방법이 있는가 하면 또하나는 그냥 몰이식으로 분위기를 띄워서 그 사람을 기도하도록 유인하는 방법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사실 후자의 경우는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는지는 모르지만 본인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가야바도 예수님의 속죄에 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속죄와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도구로만 쓰여졌을 뿐이죠. 이런 것들은 불행한 일이라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짿든 기도하도록 하는 것은 커다란 일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 모든 것들을 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도록 어떤 사람을 독려 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러나 그가 그렇게 독려받을 때에 자칫하면 그냥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고 또 내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성경은 기도응답에 대해서 그렇게 간단하게만 대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도 말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느냐. 여호와의 귀가 어두워졌느냐. 하나님의 눈이 누구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귀에 들리지 않거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도라고 하는 행위보다는 그 기도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하고도 진실한 신념을 찾을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한 그들안에 죄는 죄대로 남아있고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한 그들 자신을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거룩하게 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에 관한 선명한 해석의 빛을 오늘 이 요한복음15장 7절이 제공해 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극단적인 질문 같지만은 여러분 이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지도 않고 그가 하나님 안에도 있지 아니한 사람이 열렬히 기도하는 그 기도와 주님의 말씀안에 늘 살아가고 주님이 그 분안에 있는 그 사람이 열렬히 기도하지 않고 마음에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그건 형태의 기도 가운데 어느것이 더 하나님의 마음에 강력한 움직임을 주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의 말을 여러분들이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교리적으로 오해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이 저를 위해서 큰일을 이루실때에 항상 큰일이 많이 기도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데요 ”김목사님 거 참 신기해“ 왜요 아니 하나님이 어쩜 그렇게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모르겠데 ”왜 무슨 간증있으세요?“ 아니 글쎄 말이야 몇주 전에 강대를 이렇게 쳐다보면서 아이구 저 뭐 다 낡았는데 뭐 낡았다구 해서 말씀이 않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투박하고 불편해서 강대 하나만 좀 바꿨으면 그러고 두 번을 생각하고 너무 바빠서 기도를 못했는데 그 다음날 새벽에 어느 교인이 오드니 정확하게 3백만원을 봉투에 넣어갖고 오면서 ”목사님 저 강대는 너무 투박하고 답답합니다. 좀 분위기에 맞는 것으로 바꾸시지요“ 그리구 갖구 왔는데 그 성구사에 전화해 보니까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게 딱 3백만원 이더래 그러면서 자기는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알아서 해주시는 것을 참 많이 경험했다고 그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난 그 간증에 충분히 아멘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런것들을 참 많이 보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런걸 생각을 해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달라고 그러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해도 늘 부족한 것을 살피게 됩니다. 건강은 괜찮을까, 그리고 생활은 여유가 있나. 부모님 질병 때문에 많이 마음 아파 할텐데 뭐 등등 생각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어떤때는 그 사람이 나에게 우리 부모님 많이 편찮으시니까 우리 부모님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생활이 어려우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육신이 많이 약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성품도 그와 같습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그런 순수한 감정의 와중에서도 편견과 그리고 사랑을 차별하고 하는 부패성들이 개입을 할 개연성들이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않그러시죠 모든 점에 있어서 불편부당하신 분으로서 당신의 정당한 성품을 따라서 사람들을 좋아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은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당신이 우리가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데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일들을 해주시고 그런데 더욱이 우리가 기도할때는 얼마나 더 잘 들어 주시겠어요 주님이 내안에 계시고 주님의 말씀이 내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의 기도는 주님의 입장에서 볼때는 거의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안에 있지 못하고 그리고 자신의 잔꾀나 약삭빠른 재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짧은 기도의 편지를 썻으면 우리 인간은 역시 이 사람은 성의가 없구나. 긴 편지를 쓰면 아이구 맘에도 안드는게 말은 이렇게 많아.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오면 짧으면 어쩜 이렇게 간결한 말에 여운을 남기나 긴 편지를 쓰면 얼마나 가슴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긴 편지를 썻을까 그러지 않습니까?
후안까를로스 올띠스 목사님이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그런 얘길 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가 올린 기도를 천국에 올라가서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도는 천사에 의해서 개봉도 되지 않은채 천국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니까.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가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소원만 가져도 하나님이 이렇게 귀하게 생각하시는데 하물며 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말씀에 그 안에 있고 그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더군다나 찢어지는 가슴을 가지고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대굴대굴 구르면서 이 기도를 들어달라고 애원할 때 만약에 그 기도를 외면하신다면 성경이 공정하게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의 일반적 진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무엇을 기도 하는냐가 아니라 누가 기도하느냐에 깊은 관심이 계신 것입니다. 죄많은 한 여인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그 흘린 눈물을 푼 미역 같은 검은 머리로 닦아냈던 그 죄인이었던 한 여자의 기사를 한번 귀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한끼 식사에 3백 데나리온이나 넘는 향유를 부으심이 예수님이 본래 사셨던 아무것도 누리지 않으신 예수님의 그 정신에 가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보다도 더 많이 사랑하는 누가 이 여자를 말리면서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향유를 붓는 것보다 피붙이 같이 사랑하셨던 병들고 약하고 굶주린 이 백성들에게 이것으로 섬기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이다 라고 말했더라면 예수님이 아마 그 사람들 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이 여자는 투박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러나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제자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 적어도 그 순간은 예수님이 그 여인의 맘에 계시고 그 여인이 예수님의 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알수 없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 사이에 놀라운 비밀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역을 하는 것과 주님을 등지고 사역을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람도 망가지고 일도도 망가져서 결국은 교회에 아무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자신의 영혼도 시들고 병들지만 전자의 경우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는 세워지고 섬겼던 자신의 모든 날들은 영적인 성장에 말할수 없이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전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열린교회 모든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라기 보다는 내가 만났던 이 교회의 수많은 목회상황과 완악한 사람들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 가르침대로 주의 뜻을 좆아 살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였다. 왜냐하면 아마 내가 이 교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영적인 난장이로 계속 머물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위에 죄의 부패가 더해졌더라면 아마 하나님을 만난 그 위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들을 만나니까 하나님이 끊임없이 도전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알아야할 필요에 분발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그 뒷편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것이다라는 것이죠 왜 하필이면 7절 다음에 8절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것과는 상관없이 일에 있어서 많은 성취를 보려고 달려가는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옷소매를 잡는 장면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에배소서 4장 12절에도 결국 하나님이 목사로 선지자로 교사로 많은 일꾼들을 세우신 것은 세가지 목적이 있는데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래서 히랍어 본문에 보면 그 온전케 하는 목적자체가 에이스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온전해 지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를 온전하게 하고 그것이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또 그렇게 온전해 지는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하게 서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많은 직분들을 맡겨주신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교인들이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섬기고 봉사한다고 할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그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을 만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불타는 인생을 살고 자기를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너무나 경박한 견해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섬기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찮게 쓰레기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결코 나눠지지 않고 아무것도 섬기지 않은 도인과 같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열심히 섬기려고 할때 그때에 자신들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의 은사를 열렬하게 구하게 되죠 한 사람이 받은 성령의 은사는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온 피조세계의 지체속을 서로 communicating 하며 흘렀던 것처럼 한 사람이 받은 은사는 그의 섬김을 통해서 그와 연결을 맺은 모든 교회의 공유물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되는 것이죠 이런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서 많은 열매를 맺는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야먕일수 있겠스며, 그것이 어떻게 인본주의적인 비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게되는 비결이 바로 내말이 너희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는 것 그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변해갈 때 그때 여러분의 기도는 위대한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 앞서 행하시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소원까지도 감찰하시고 미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매일매일 간증처럼 보게 될 것입니다.
5.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8)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위기를 만날 때가있습니다. 사실 위기를 만난다고 하는 이야기는 기회 앞에 선다. 그런 뜻도 될 수 있거든요. 그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그런 동시에 또 기회 앞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왔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이제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런 압제가 계속되었었지요? 그렇게 고통스런 압제가 계속되었던 그 마지막 지점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으니까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지요? 또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달라는 모세의 요구 앞에 순순히 들었습니까? 오히려 더 백성들을 박해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터질 듯한 위기 후에는 항상 그 위기가 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홍해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셨는데 또 한번 여기서 위기를 만나게 되지요. 그 위기가 뭐냐면 이제 가나안 땅을 정탐을 하고 나니까 진짜 뭐 포도송이 하나를 둘이 꿰어서 메고나올 정도로 그렇게 엄청나요.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이건 과장이다. 그러는데 과장이 아닙니다. 세계에 포도주를 여러분들은 불란서 포도주를 알아준다고 생각하는데 불란서 포도주 못지않은 포도주가 이스라엘 포도주입니다. 이스라엘의 에스골 이라고 하는 골짜기에 가면 에스골 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영어로 클로스터 입니다. 이게 포도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한 송이 에 4.5키로 에서 6키로 짜리 포도가 나온다고 카일 벨리치가자기 주석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토양이 지금보다 더 틀렸을 테니까 둘이 진짜 끌채에 끌고 나올만한 그런 포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거지요. 엄청나지요. 그런데 그런 기름지고 좋은 땅 이였는데 문제가 생겼지요. 뭐냐면, 들어 가보니까, 이게 무슨 버려진 황무지 같은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말이지요. 잘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진 그런 선진 백성들이 거기에 높은 요새와 발달한 건축술로 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에겐 엄청난 충격 이였지요. 아마 오합지졸 같은 미개인들이 거기 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이길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거짓을 행하게 되는 거지요. 그 땅을 악평하는 거지요. 얻을 수 없으니까 그 땅을 악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울고 있었어요. 통곡할 때 그 수백 수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흐느끼는 통곡소리를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진지해요.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반역 속에도 아주 놀라운 진지함과 감정적 충실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들 다 낙심하고 울고 있을 때, 모세와 아론도 그 백성의 패역함과 이런 것 들 때문에 엎드려 있었어요.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됐지요. 그지요? 우상을 숭배하고 그랬을 때 단호하게 배교자들을 처단했던 그런 심정을 가지고 모세가 여기서 지도력을 행사했어야지요. 그랬더라면 아마 문제가 달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모세와 아론도 깊이 낙심했었던 것 같아요. 그때에 참 아주 훌륭한 믿음의 사람 하나가 나와서 그 실망과 낙심에 가득 찬 그 회중위에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요. 그게 뭐냐면 그 땅은 좋은 땅이다. 그리고 우린 그걸 얻어야 된다. 그러면서 하는 핵심적인 이야기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러니까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여호수아도 인생을 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군사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고 그런 것 들을 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래서 지파에서 뽑혀서 거기를 정탐하러 간 사람인데 그게 상황이 지금 어렵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모르겠어요? 다 계산해 볼 때 저들과 우리는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체적인 조건이나 발달한 병기, 강력한 요새, 이런 걸로 볼 때 안 된다. 여호수아도 깊이 동의할 수 있는 결론 이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서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었어요. 여호수아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었어요.
또 다른 것이 뭐냐면 그건 모두 인정하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능히 그곳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래 사실은 논리는 없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어떻게 그 큰 사람들을 이기게 하고, 요새와 잘 발달한 병기들의 강력함은 어떻게 꺾고, 어떻게 그 지리에도 익숙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공격할 때 이길 수 있겠느냐 그건 여호수아도 이야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믿음의 사람 이였지만 믿음으로 거기에 들어가면 그 일주일 동안 성을 돌면 성이 우르르 무너진다든지, 발만 집어넣으면 요단강물이 말라 버린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이김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없었어요. 사실은 그거는 중요한 게 아니입니다. 그걸 다 알고 그래서 행동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선 그걸 미리 보여주지 않으셔요. 미리 보여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환경을 의지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만났을 때 걱정하지마라 이제 저 친구들이 배에 다가 왔을 때 확 열어 줄 테니까 건너가고 애굽의 군대들이 중간쯤 왔을 때 물을 덮어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겠어요? 모세가 밤이 새도록 손을 바다에다 내어 밀고기도 했겠느냐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목적은 우리는 어떤 위기가 생겨나면 그걸 극복하는 것이 목표지만은 하나님의 목표는 그게 아니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위기에서 극복하게 해 주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말 한마디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냐면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바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냐하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갔던 자만심을 다 털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그 분만을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쇄신하게 하신다. 이거입니다. 기회로 하나님이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안 알려 주시잖아요. 여호수아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건 문제가 안 된다 이거입니다. 우리보다 커서 같이 서 있을 때 우리가 메뚜기처럼 여겨지고 또 그들이 발달한 병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오합지졸이고 그들의 요새는 크고, 높고, 강하고 우리는 아무런 요새도 갖추지 않고 긴 나그네 유랑 길 에 지친사람들이라는 거, 어린아이들이 딸렸다는 거, 이런 모든 불리한 조건들이 문제가 안 된다 이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그 상황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시려고 마음을 먹으시면 저들의 그 모든 자기의 땅을 보호하려고 하는 군사적인 방비책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게 신앙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렇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과 믿음이 아주 밀접한관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세요.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간에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꼭 성취해야 될 일들을 만났는데 자기의 힘으로 그것을 성취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그 순간에 꽉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실험을 해보면 사실 믿어도 안 되는 일들이 많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뭘까요? 믿음이 있는 곳에 믿음을 가지고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어려운 고비를 만났을 때 아주 진짜 믿었는데도 해결이 안 된 것이 참 많아요. 그렇지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여호수아가 이야기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세게 믿으면 하나님이 꼼짝 못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믿음 얘기는 하나도 안나오고 오히려 뭐라 그러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능히 우리를 인도하셔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거지요. 그럼 우리 조금만 더 들어 가봅시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보면서 난 참 저 사람이 기뻐! 난 저 사람이 있으므로 참 기뻐! 그렇게 내가 카드를 받으면 왠 만한 것 아주 쓰 잘 데 없다고 생각하는 거 외에는 다 모아서 전에 교수생활 할 때부터 받은 카드나 연하장 건네준 메모쪽지 같은 것들을 다 모아두는 습관이 있거든요? 일년 째 정리를 못했는데 누군지도 몰라요.
어느 청년하나가 카드를 보냈어요. 작년크리스마스 땐가 스승의 날 땐가 모르겠어요. 뭐라고 해요. 목사님이 계신 것이 제게는 기쁨입니다. 식탁위에다 이렇게 써 붙여놨어.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가 이 땅에 있는 것을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도 있구나! 참 좋다. 그럼 여러분 너는 내 기쁨 이란다.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얘기한다든지 아니면 제자가 선생에게 선생님이 이 땅에 살아계신 것이 제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어디가 좋은 거 에요? 어디가 좋은 거냐구? 어디가 이쁜거야? 난 네가 참 기쁘다. 어디가 기쁜 거 에요? 그렇지요. 존재자체! 그건 이렇게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난 참 기쁘다 그럴 때 요기만 기쁘다는 게 아니입니다. 다리만 기쁘다는 것도 아니고 손만 기쁘다는 것도 아니 입니다. 내장만 기쁘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기쁘다고 하는 거 그 자체가 나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기쁘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기쁜 것입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이게 성경에서 인간의 존재를 바라보는 통합적 관점입니다.
그건 아주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자체가 기쁘니까 그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이 기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인도 하셔서 우리를 그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실 것이다. 그때는 그들의 높은 요새, 발달한 병기, 군인들의 숫자,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안 된다 이거입니다. 어떻게 하실 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애기냐면 어느 한 인생에 위기를 만나거나 큰일을 앞두었을 때, 주님의 일상적인 도움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것도 또 아주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가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식을 한다 이거지요. 그거는 뭐냐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그 앞에서 자신이 철저히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될까요?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힘쓰는 거지요. 그것에 힘쓰지 않고 어떤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스스로 자기를 불러 일으켜서 굳센 믿음을 가지라고 암시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거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자체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었을 때 에 그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라 이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 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의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은 여기서 기뻐한다. 라고 하는 것은 전존재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외침은 이거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러니까 무슨 문제냐면 이 외침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가정법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는 그 판단을 유보하자. 그리고 지금 이런 큰 위기가 닥쳤는데 정말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된다면 너 하나 나하나 뿐 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이스라엘 백성공동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된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무슨 이야기가 나오나 하면 인생의 위기 속에서 제대로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삶 자체의 목표가 믿기 위한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 일생의 지속적인 목표가 돼야한다 이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밝은 사람들은 항상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해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 속에서 이제 깊이 어떤 위기를 만나게 되면 거기서 자기 자신 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섬김, 혹은 사역 그리고 가정, 어떤 인생의 뜻하지 않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 이렇게 생각 될 때는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부족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변화되어가요. 인생의 위기를 통해서 거친돌과 같았던 사람들이 잘 다듬어진 작품같이 변화되어가요. 그러나 거기서 계속해서 환경이나 탓하고, 그리고 그 변명거리나 찾고, 그리고 합리화하고, 그리고 강요된 어떤 상황 때문에 자신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이 있는 자리에 대해서 소명을 느끼는 대신 불평하고 불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뭐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들어 주세요.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빨리 하나님이 해 내세요. 필요한 것 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우리 손에 붙여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보니까 충분히 동의가 되는데 그런데 좀 치우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시대에 창기와, 세리, 죄인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거의 기쁘시게 하는 삶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주님이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아주 굉장히 좋은 질문이 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살아온 삶과 존재자체가 하나님을 너무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오는 사람들은 아까 이야기한데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도를 받지만은 그렇지 못한 죄인들은 그렇게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를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극악한 죄인들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거든요.
그것이 뭐냐면 차선의 것입니다. 깊은 참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지 못했던 날들에 대한 깊은 참회가 있을 때 차선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즐거워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당신의 호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자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거입니다. 이러한 생애를 구약에서 가장 잘 보여주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시는 순전한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에 요셉의 생애를 보면 이상하게 기도했다는 얘기가 많이 안 나와요. 요셉이 그래도 야곱의 경우에는 얍복 강가에서 결단도 있었잖아요? 요셉의 생애를 보면 전심으로 기도했다는 얘기가 별로 안 나와요. 기도 안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기도 많이 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기도도 물론 했지만 그러나 삶이 올곧았어요. 그리고 그 어린시절에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는 그 꿈을 간직하고 계시 의존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어디에 나타나지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도 나타났고, 그 여자 의 모함으로 감옥 속에 처박혔을 때도 나타났어요. 그런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쓴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실 때 요셉에게 있어서 성경 기록 속에 야곱과 같은 생애적인 결단의 기도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의로 부모의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결단이라든지 없었지만 그런 거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 존재자체를 그렇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늘 동행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그거는 어느 한순간에 참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그 기쁨과 비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비교될 수 없는 행복이라 이거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이 나의 존재 그 자체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 성경구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말이지요.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서 존재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사고나 모든 것들이 단순한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궁리와 염려, 근심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아주 많아요. 왜 그럴까요? 자신이 이제 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니까 .생각이 많고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기 보다는 놓여진 삶의 상황과 씨름하면서 가슴을 썩이는 그 근심으로 경건한 심령을 더럽혀야 하는 상황이 더 많이 벌어지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한번 한해가 이렇게 지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구나! 진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우리의 사역, 혹은 우리의 섬김, 우리인생의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돼야 되겠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존재자체가 기쁨이 될 때 그때 무엇이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주 여호와 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며,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방패 시로다. 여호와는 우리의 빛이시니 누가 우리를 두려워 하리요. 라고 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겠어요? 기도 하겠습니다.
6.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3)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보디발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거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요셉이 믿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어울리면서 사람들에게 주인을 비롯해서 인정을 받으면서 그 가정의 총무가 되기까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직장생활을 해보면 신앙이 예배당 속에 갇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속에 갇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늘 그 자리가 자기 자리가 아닌 것은 인상을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사람에게도 모두 느끼게 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경건한 신앙의 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현실에 뿌리박은 영적 생활이라면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 이죠.
그 좋은 모본을 요셉에게서 봅니다. 우리야 직장을 다니면 같은 믿음의 식구들이 몇 명이라도 있지만 이 사람은 완전히 신앙적으로 외톨박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정의 총무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서 우리들이 좀 배우는 거죠. 그래서 어느 부분까지가 나의 경건한 신앙 때문이고 또 어느 부분 까지가 나의 신앙과 상관이 없는 나의 부족 때문인가 보면서 그러면서 자기를 고쳐가야 된다는 거죠.
어쨌든 요셉이 그 집안에 있을 때 주인인 보디발이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것 이었습니다. 전자는 요셉의 인격 그리고 그의 내적인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그가 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을 항상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앞에 것은 예수님의 인격 혹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후자는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들에 대한 그 기쁨을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신 것 이죠.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보디발도 몰랐고 그 집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없었고 보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알 수 있었죠. 그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독특한 인격과 존재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죠. 이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뻐하건 기뻐하지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는 최상의 축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함께 하심의 사상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달음질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죠. 범죄하자 인간과 하나님은 떨어진 사이가 되었고 그 후로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인간과 함께 하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 궁극적인 하나님의 소망에 대한 실현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는데 이 임마누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하나님 앞에서 이르기를 원했지만 불순종과 죄악으로 이룰 수 없었던 숙제 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셨지만 그러나 또한 그러한 완전한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것이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거기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러한 일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설명하면서 그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이 바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의 정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하심의 사상입니다. 구약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람의 분명한 표증을 보여주신 것 이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여전히 이 임마누엘은 완성된 임마누엘이 아니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하시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주님이 거하시기에 온전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반드시 눈에 띄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눈에 띄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그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하자면 두려움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모르는 사람이 보는 것은 두려움이죠. 하나님이 너무 함께 하시니까 누군가가 계속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이 세밀하게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삶이요 그리고 충분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습이라는 것 이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일에 함께 하시는 것 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 마음 속으로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해요. 왜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겠어요.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 세상을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오죠. 뭐라고 나오냐면 "사람이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함임이라." 라고 나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속에 항상 악함이 항상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정서와 의지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사고 속에 깊은 불결이 스며드는 거입니다. 그래서 전체가 오류의 덩어리가 되는 거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죄는 목표 자체가 세상에 태어나는 거입니다. 그래서 유혹의 목표는 우리에게 죄된 생각을 심는 것이고 생각이 잉태되고 나면 그 생각의 목표는 반드시 출산하는 거입니다. 집요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입니다.
(예화)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아마 알거입니다. 왜 시골에서 암탉 잡잖아요. 암탉을 잡으면 속에 노란 알이 무수하게 맺혀있습니다. 어떤 때는 까보면 속에 하얀 달걀이 들어있다고 이제 내일이면 날 거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껍데기가 덜 익었어요. 하루만 있으면 낳을텐데 그런 것도 있는데 알주머니가 있어서 노란 게 큰 것부터 작은 것 까지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어요. 그게 하나씩 하나씩 커져서 뒤로 빠져서 계란이 되어서 나오는 거입니다. 그 생각이 나요. 야고보서를 보면 그래서 속에 잔뜩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출산을 못하도록 자꾸 유산을 시키시니까 세상이 이 정도 유지되고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거지 죄의 계획이 성취가 되어서 계속 출산을 한다고 하면 우린 이렇게 앉아서 예배드릴 수도 없어요. 막으시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거 거든요. 그래서 성화의 묘미가 거기 있는 거입니다. 이 성화는 이미 출산된 죄를 터트려서 없애버리는 정도가 아니입니다. 알집처럼 잔뜩 매달려 있는 잉태된 죄를 거기서 전부다 본질을 변화시켜서 사라지게 만드는 거입니다. 성화의 힘입니다. (예화 끝)
그러니까 누구든지 사람 속을 들여다보면 진짜 엄청난 정도로 불결한 죄악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거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항상 그 마음에 반영되어서 속에 출산되지 않은 죄가 다닥다닥 달라 붙어있으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하면 이 죄를 출산시킬까 그리고 행동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얘기 했던 것처럼 “표범이 그리고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있냐.”는 거입니다. “비누로 아무리 씻는다 해서 검은 피부가 하얗게 되겠냐.” 그리고 “표범이 아무리 닦아낸다고 해서 그 반점을 없앨 수 있느냐.” 하는 거입니다. 불가능 하다는 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표피적으로만 돌면 안돼 들어가서 깊은 심층부를 공격해서 우리 속에 가득 달려 있는 정욕과 죄의 알집들을 다 터트려서 새롭게 되어야 해 이 시간에 안하면 언제 하느냐고 식당에서 암탉 한 마리 사다가 잘라서 보여줘. 그게 아마 제일 좋은 교육일거야. 모두 모여서 보라고 다닥다닥 달라붙어있어 수십 개가 어떤 것은 콩알만 한 것도 달려있어 수 십개 정도가 아닐 걸 아마 아래서부터 커 위에서부터 좁쌀만한 것까지 올라가는 거입니다. 그게 신기하다구요.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함께 하셨어요. 그게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런데 그 사람을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기뻐해요 이게 분리될 수가 없어요. 오늘 아침에도 며칠째 새벽에 기도하면서 마음이 참 비감해요. 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내 일들을 통해서 예전처럼 보여주시지 않을까. 그 때에 우리가 일만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안돼. 지혜를 가지고 물론 그 일을 처리하고 바르게 경영해 가야 하겠지. 그렇지만 일을 대할 때는 그렇게 하더라도 홀로 물러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의 어떤 것을 안 기뻐하시나 그것을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는 이유를 규명해 가려고 애를 써야 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죠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일을 해 나가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고 그리고 고난이 오면 하나님의 성품을 뵈오는 기회가 되는 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번 해내고 나면 자기가 많이 성장한 것을 느끼는 거입니다. 왜? 일이 자기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자기를 성장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왜 일어나느냐면 하나님이 요셉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말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보디발의 집이 축복받는 것이 사실 하나님께 무슨 관심이 있습니다. 이방 사람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요셉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하나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는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표현 해야해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말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사랑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껍데기를 까서 속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오.
한 가지는 기쁨입니다. delight라는 거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을 보는 것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한 성분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valuation,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의 정체야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아주 소중한 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끼시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 여러분도 똑같이 않아요?
(예화) 선배목사님들이 후배들을 보면서 “이 목사님 참 아끼는 사람이라”고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사랑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입니다. “너를 만나니까 참 기쁘다” 그게 바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입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발전하냐면 말이죠. 너무나 기쁘니까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사람자체가 기쁘니까 그 존재를 보는 것이 너무 기쁘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헤어지면 고통이 되는 거입니다. 그럴 정도로 기쁜 거입니다.(예화 끝)
또 하나는 뭐냐면 너무나 소중하니까 때로는 사람들에게 어떤 착각을 일으키냐면 저 사람 은 소중히 여기고 나머지는 다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가 되는 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의 사고방식에 사랑하는 것 빼놓고는 미워한다고 표현하는 거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 이러이러한 것들을 네 부모나 처자나,, 미워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것을 이렇게 hate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반대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생각하는 거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그런 거입니다. 그래서 이 요셉을 비록 노예에 불과했지만 한님이 아주 기뻐하시는 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셉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었습니다.
궁금한 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두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하는 측면과 선택에 측면에 있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죠. 하나님의 일방적인 놀라운 은혜의 측면과 선택의 측면에 있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성화의 측면에 있어서는 사랑을 받게 했어. 누가? 요셉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실하면서 그렇게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예쁘게 산거야 성화의 측면에서,,우리도 마찬가지야. 선택의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이미 받은 사람이야 지금도 받고 있고 성화의 측면에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가야 해요.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적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신랑에게 신부로 선택된 사람이 예전에도 아름답고 순결했지만 그 남편될 사람에게 선택받은 순간부터 더 그 사람의 신부로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랑 받을 만하게 변해가듯이 그래서 선택적 사랑이 성화적 측면에서 사랑스러워 가는 것을 방해하거나 나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에 대한 확신이 성화의 측면에서 받는 그런 사랑받는 관계를 가꾸어 가도록 자기를 촉진하는 거입니다. 그렇게 될 때 정말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했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부르셨죠. 쓰레기통 같은 환경에서 하나님이 좋은 사람들을 부르시는 거입니다. 숙제는 뭐에요?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요셉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해서 정말 하나님께 기쁨을 받고 기쁘게 여김이 되고 소중하게 여김이 되었는가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끌려간 고난의 세월 한 복판에서 그런 삶을 살았던 거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워요. 그 고난의 세월 한 복판에서 그렇게 산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해요. 고난의 시간에 오히려 요셉은 생애 어느 때 보다 하나님께 기쁨과 소중히 여김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어요. 어디다 내어다 놔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고 황무지에 세워놔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을 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앙의 목표를 분명하고 원대하게 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7. 어디 가든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대상 18:6)
전쟁은 한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전쟁을 수행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 의하면 군인 한명이 총을 들고 적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7명의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합니다.
7명의 사람이 실제로 모빌라이제이션 되어서 그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죠. 이것은 고대로부터 전쟁에서 기초상식입니다.
어마어마한 군인이 참여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한사람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정말 위대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인들 중에 한사람에 불과한 것이죠. 다윗도 한 군이었습니다. 우두머리였지만 그러나 역시 한 군인이었고 그도 연약한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대들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요인으로 다윗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앞에 보면은 각각 다윗이 점령한 지역이 나오고 점령한 지역 거기에 그들을 통치하는 수비대를 두는 것으로 막이 내리면서 그 뒤에 후렴구 처럼 반복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그를 이기게 하셨더라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이었죠. 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는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이긴다 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 하나만 믿고 아무렇게나 전쟁을 수행 했을리는 전혀 없죠. 이게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정말 지도자로써 본받고 싶은 훌륭한 특성들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반역했던 압살롬이 죽었을 때 슬피 우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이렇게 하면서 슬퍼하고 생명을 무릎쓰고 자기를 위해 떠온 물을 차마 먹지 못할 정도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지 않는 그 탁월한 지혜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냉철한 이성이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의해서 무력화되지 않는 그런 지도자였습니다. 자기를 대항하여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사람들을 쓰는 것을 보면 다윗의 이러한 면목을 엿보게 됩니다. 참 본받을 만한 장점이 많고 여러분들은 다윗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많이 하면 지도력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전쟁을 수행할 때 다윗이 결코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은 이겁니다. 아무렇게나 하면 안됩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도 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5시까지 또 뜬눈으로 세웠습니다. 교회에서 돌아가는 많은 것들이 그렇게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유능한 엔지니어는 기계 소리를 들으면서 기계가 언제쯤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무능한 사람들은 톱니바퀴가 부러지고 공장이 멈추고 연기가 나야만 아 망가졌구나 파악하는 것이죠. 지도자는 조직이 돌아가는 소리를 날마다 들어야 해요.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타는 냄새가 나거나 그러면 지금은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커다란 디메지를 남기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날도 네 시간 밖에 못 잤는데 뜬눈으로 밤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될 건가?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한 지도자와 어울려서 사역을 하게 하는 요인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사랑 헌신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고 전부다 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는 사람들과 함께 실현돼요.
그래서 신앙적으로는 참 존경할 만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다시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평생 동역자가 아니라 우정의 친구로 지냈다면 좋았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죠. 왜 그러냐면 조직과 경영과 이런 것들이 치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디에 가든지 이겼지 만은 성경 어디에 봐도 그이 주변에는 배신자도 있었지만 배신자보다 더 만은 충성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다윗을 뜨겁게 사랑하고 존경 할뿐만 아니라 뛰어나게 용감하고 뛰어나게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참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숨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을 그냥 섬기다가 가는 것은 쉬워요. 근데 그러면 안돼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하는데 잘 섬기고 많이 섬기다 죽어야해 왜 이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쪼금 하다 죽으면 안돼. 나만 진실하게 섬기면 되지 아니? 그건 기본이고 진실한 것을 양보하면서까지 섬기는 것은 바보지 만은 진실하면서 동시에 잘 섬기고 많이 섬기다 죽어야 해 양적으로 왜냐면 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이야 우리교회만 돌아보더라도 얼마나 여러분들이 교구를 맡고 있지만은 교구 맡고 있는 영혼들을 다 돌봅니까? 효율적으로 하면 더 많이 돌 볼 수 있잖아 효과적으로 하면 더 많은 사람이 목양의 혜택을 받을 수 있잖아 그래요 진실하게 살다가 죽는것도 좋아요. 그러나 그것은 기본 이예요. 많이 해야 되요. 더군다나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는 사람들의 일까지 침범해서 더 많이 하다가 죽어야해. 시간이 없어요. 째깍째깍 시간이 가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쏟아야 할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알겠는데 이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밤을 꼬박 세우면서 그렇게 마음이 비감할 수가 없어요. 시간은 가는데 가야할 곳은 있는데 이런저런 것들이 계속 발목을 잡으면서 좀더 나은데 사용 할 수 있는 시간들을 좀 덜 시간을 써도 되는 일에 매달려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구나 생각하니까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어요.
승리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요. 승리보다 더 낳은 가치는 없어요. 근데 그 승리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해야해요. 사역을 하면서 지혜롭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선택한 게으름이요 선택한 태만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없고 부정확한 지도자와 사역을 하는 것은 일생일대에 최대 재앙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지도자는 절대로 생각이 단선적이어서는 안되고 입체적이어야 해요. 여러분들은 디자인을 해 봤는지 모르겠지만 평면도로 놓고 그리는 것은 쉬워 4B연필을 가지고 3D로 그리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근데 그걸 해야 정말 디자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지도자도 평면도나 측면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3D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입체화를 그리면서 사역을 해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작은 사역을 할 때에 입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해 나가지 않으면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 절대적으로 입체적인 판단을 가진 유능한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제 자랑은 아닙니다만 저는 교육 전도사때 유년 주일학교를 맡겨 주셨을 때에 밤을 홀딱 세우면서 한 학기동안에 교회학교의조직과 구성과 사역에 대해서 생각 한적이 아주 많습니다. 석달에 한번씩 교사들을 모아놓고 팜플렛을 만들어서 석달동안 어떻게 교회학교가 운영 될것인지 밤새도록 회의를 하고 석달을 살았어요. 그런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절대로 그런 영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이것은 순간적으로 주어진 은사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더 우리의 섬김이 온전해져야 한다 이거죠. 생각없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절대로 안됩니다. 사려 깊은 지도자 그리고 특별히 누군가를 돕는 위치에서 지날 때에는 아주 꼼꼼함과 무모할 정도의 성취욕구 지시 받은 것 내게 위임받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끝까지 가서 성취해야 한다. 무모할 정도의 성취욕구를 가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조직화되어서 다윗도 전쟁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위에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을 이기게 하셨더라. 하나님이 다윗을 어디로 가든지 주목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들고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당신의 생명 싸게 속에 감추셨습니다. 그렇게 보호하셨습니다. 그를 헤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보실 때 너무나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근데 원래 귀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고 계속해서 귀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밧세바와의 간음이 있었을 때 다윗의 행위가 심히 악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니라. 이것은 뭐냐면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고 맞게끔 빚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거기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전적인 신뢰 의뢰로의 회귀 이런 것들은 뭘 통해서 이루어지냐면 부족한 허물과 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게 죄가 역설적이지만 죄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게 한다고 죄 때문에 만일 죄가 없으면 자기 깨어짐도 없어요. 뼈저린 뉘우침 거기서 자기 깨어짐은 자기 의와 죄에 대한 사랑이 깨어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깨어짐이 이런것들이 죄가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능력이 많고 넉넉해서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존 오웬은 자기의 글 속에서 어떤 인상 깊은 얘기를 했냐면 신자안에 있는 죄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고 신자안에 있는 죄는 또한 사람들과 동행하게 만들어 줍니다. 얼마나 역설적이야 죄가 저절로 그런 영향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지기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이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지 터득함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고 그도 그렇게 많이 깨뜨려 짐으로써 죄인들을 깊이 이해하게 됨으로써 죄인들을 긍휼히 여겨서 죄인들과 동행하게 하는거여 그래서 나는 요새 너무 자신만만한 사람들을 보면 슬퍼요. 슬퍼. 근데, 언제나 자신 만만한 사람들, 그런 부족한 허물과 죄가 하나님 앞에 많이 깨뜨려지게 만들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데 단, 그 부족함이나 그 죄는 자기가 선택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온전하게 할려고 부지런히 얘를 썼는데 돌아보면 자기의 부족한 허물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쳤을 때 선택하지는 않았는데 끊임없이 죄의 공격을 받고 자기 안에 있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순간 순간 마음이 죄에 미끄러져 갈 때 그것을 선택했을 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 선택하지 않았을 때 그때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죄 때문에 자기는 도저히 혼자 설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야.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섬김에 있어서 얼마나 능력이 없는 인간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맡기신 그 일에 부적합한 일꾼인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거야. 그리고 나면 마음이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야.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차게 되는 것 죄를 선택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부패성 때문에 절망하지 않아. 그렇게 연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뼈저리게 그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고통으로 가득 차는데 사실은 고통 밖에는 없는 것처럼 발견하게 될 때 가득 차 그때 공통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가지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노래)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정말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해. 그래야 순결해져 가는 거야. 그러니까 자기 깨어짐이 부단히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가든지 다윗을 기뻐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람으로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계속 깨뜨려졌어.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그렇게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항상 승리를 주신 거야. 그래서 우리 사역의 현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 지에 대한 부인 할 수 없는 정직한 평가야. 외적으로 하나님이 전혀 안 기뻐하시는데 하나님 없이 번성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우 사랑하시는데 열매가 없이 너무 고통 하는 때가 있어. 희귀해요. 그런 경우는 희귀하기 때문에 내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무모하게 생각하면 항상 하나님이 자신의 섬김의 상황을 통해 주는 메시지에 대해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가난한 모든 사람이 다 다윗일까요? 수십만 명중에 한두 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술 팔고 몸 팔고 창녀와 기생 중에 대부분이 마리아일까요? 수만명중에 한 사람일뿐일까요?나머진 쓰레기같은 사람이예요. 사역을 하다가 주님 배반하고 실패한 사람이 모두 베드로일까요? 똑같이 배반 했는데 가롯 유다는 목메어 죽었어요.
무모하게 희소한 예에 자신을 대입시키면서 정상적인 회복의 길은 스스로 버리는 거예요.
섬김의 현장을 그대로 보면서 나의 섬김의 현장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끊임없이 실패하고 패배하는가? 오류와 잘못으로 인해서 함께 섬기고 많은 동역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고 있는 평가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영혼들이 안 오고 들어온 영혼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무엇을 시켜도 교회가 잘 안 돌아가고 자꾸 기계소리가 심하게 나고 고통스러워 질 때 그때 제가 늘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요새 제가 안 기쁘시죠?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어요.
도대체 뭘 하며 살았나 하나님이 보실 때 안 기쁘시다면 내가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면서 수시로 확인 하는거야 그래서 그가 하고 있는 what he do and what he is 그에 행함과 사람됨이 함께 가는 거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니까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을 이기게 하시는 거야. 그래서 참 놀라운 것이 뭐냐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섬겨 가면서 상황에 대한 불편으로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아. 왜냐면 어려운 역경이나 고통스런 상황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위대한 승리를 주시려고 하는 그런 기회라고 해석하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승리를 확신하는 겁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을 맺으면서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상반기가 마무리 지어 갑니다. 다음주부터 직원부터 시작하여 교역자까지 상반기 마무리를 할건데 정직하게 살펴야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표징이 나의 섬김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신다는 표징을 나의 사역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내 보여 주셨는가? 그러면서 깊이 성찰하면서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서 섬기면 살아나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가치가 있게끔 여러분들이 그렇게 바꾸어 놓으시는 기회가 되어야 해요. 그런 변화의 작용이 없이 그냥 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자신의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거여요.
그것은 본인이나 교회나 하나님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한사람도 없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사역을 끝냈을 때 그렇게 섬기며 사는 동안에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귀한 분이었고 나도 내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
8. 전도할 문을 여시는 하나님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해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한 주일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저희들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자 합니다. 오늘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그리하여 저희들을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항상 하나님의 일에 시작은 잘 될 것 같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 가능성이 보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전혀 이루어 지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 질 때 인간의 관심은 단지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가 있기가 쉽지만 하나님은 그 일들의 이루어짐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또 우리의 신앙적으로 구도자의 삶을 살다고 보면꼭 될것 같은 자연적인상황인데 신기하게 그 일이 이루어 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이루어 질수 없을 지경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이루는 때가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밤새워서 글을 쓰면서 그 여리고서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다시한번생각하게 됐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추호의가능성도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게 하시는 거죠. 마지막 까지 하나님께 절댈 순종했지만 그렇게 순종하면서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일이 이루어 질만한 조짐 같은 것은 마지막 날까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일을 행하심으로서 그 일을 행하신 분이 주님이시다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의 가족구원의 문제도 참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말 남의 가족들은 그렇게 하나님께로 기적적으로 잘 돌아오는데 우리가족은 하나님의 품으로 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만의 고백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족이 회심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올 때 우리 눈에는 그 돌아오는 감격적인 광경만 눈에 띄었지 그 전까지 여리고 성을 도는 것처럼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그 소쩍새 우는 사연을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까? 어느 날 보니까 그 가족들이 말할 수 없는 감격가운데 하나님께 돌아 오는거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가족이 아무리 강팍 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가정복음화 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그 길이 멀고 험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하나님 앞에 입술을 깨물고 어떤 고통과 어떠한 희생이 뛰 따르더라도 그 희생의 크기와 가치가 우리 가족들의 영혼만큼 귀하지는 않다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해요.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자기의 지체들 을 향해서 너를 위해서 나 자신을 허비하겠다. 사랑은 그렇게 허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그리스도 앞에 향유를 부었을때 제자들은 “무슨 일로 네가 이렇게 허비 하느뇨” 라고 말했지만은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제 3자의 눈으로 허비였지 여인의 눈에는 그보다도 더 많이 허비해도 예수님에게 대한 것은 허비가 아니였습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킨 것이죠. 그래서 오늘도 성경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혀서 골로새 교회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 즈음에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이단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결함이 있는 교회였죠. 문제가 있으니까 편지를 쓰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불비한 교회 교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기독교에 장엄한 진리를 선포하고 교리를 필역해 나아 갈 때는 하늘에서 온 사람 같았지만은 이 결함이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자기와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할 때 그 사람은 정말로 성 도중에서 가장 약한자요 그리고 감옥에 갇힌 죄수요. 그리고 이 순간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살수 없는 아무런 힘이없는 진극히 연약한 성도로서 간절한 눈빛으로 사랑하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두손을 내밀어 기도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봄으로서 우리는 복음의 문을 여시는분이 하나님이시라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밤에는 이언바운즈를 읽으면서 글을 썼습니다. 이언바운즈가 자신의 그 기도에 관한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 있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획득하던 사람들은 기도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쏟아 붓는 열열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놓음으로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욕망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심연에 자기의 문제를 연결시키고 거기서 영적인 공급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2의 알렉산더라고 하는 올드프링스턴의 신학교교수가 그래도 청교도의 유산이 남아있는 사람들이죠. 자기의 설교론에 대해서 통탄하며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오늘날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인간의 대양과 같이 충격타를 던져서 그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설교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의 영혼이 충만해본 사람만이 단한사람의 영혼에 그런 강력한 폭풍과 같은 흔들림과 출렁거림이 말씀을 통해서 임하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일평생을 수고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교리의 기초는 하나님이 놓으셨지만 그 교리는 사도바울이 조직했는데 그래도 그는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복음을 전해서 그 복음이 그대 마음가운데 역사해서 강팍한 동족들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일은 자기 수중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렸다” 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그 가족에게 마음에 문을 열어 주실 수 있도록 신기하게 복음이 그렇게 오랫동안 죽어있던 그 영혼 속에 들리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복음의도구가 되기를 원하시죠. 우리가 오늘 중요하게 생각되는 나 자신의 문제들이 사실은 이 가족들의 영혼들을 놓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 때문에 흘린 눈물이 금년에 주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의 얼굴에서 씻기어 지는 그런 한해가 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9. 신적인 번성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14:5-6)
‘고마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한주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오니 우리의 예배와 경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인생이 절대로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죠. 그게 그렇게 하면 잘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역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경제적으로 넉넉해지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기심을 버리고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그들을 또 돕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덕을 보게끔 만들어 주는 삶 이것이 정말 복된 삶이라 우리들이 그렇게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슬과 같겠다.’ 그래서 레바론의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히고 향기가 나고 이 번성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늘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얻게 되는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예화)포도나무를 보면 포도나무는 땅에서 이렇게 줄기가 자라나지만 옆으로 쭉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심하면 자기가 있는 지상에서의 이키에 12배 이상 옆으로 쭉 뻗어나가면서 넝쿨이 지면서 거기에서 포도가 열리죠. 그러니까 포도나무의 포도는 포도나무스스로 열매를 주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줄을 매 주어야지만 포도가 열매로서 수확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도 그래야 하겠지만 우리의 사역도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들이 해나가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이 교역이던지 여러분들이 하는 직원들로서 행정적인 섬김이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안 됩니다. 주님의 축복이 없이는 절대로 번성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때로는 매우 특별한 계획이 계셔서 그 사람이 하나님 보기에 올바르지 않아도 복을 주시는 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 하나님의 교회에 그 위대한 역사와 이러한 변화와 역사 부흥 이런 것들은 그것만 따로 일어나면 안 되고 동일하게 자기 안에서 먼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서 사역에 열매를 맺을 때 진정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런 게 없이 이 예기죠.
우리의 사역이 복되게 줄기가지가 나와서 뻗어나가고 많은 그늘을 제공하게될때 그렇게 많은 그늘이 이루어 질 때 그 그늘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게 되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은 마치 땡볕이 내리쬐는 그 메마르고 붉은 광야에서 광야 한복판에서 나무를 심는 것과 꼭 같은, 처음 그 광야에서 나무를 심을 때는 그 사람이 그 나무를 심는 사람이 온몸에 그 따가운 햇볕을 다 뒤집어쓰고 얼굴이 새카맣게 타요. 그리고 그 나무를 심고 혹은 바람이 불까 혹은 쓰러질까 염려하면서 애지중시 하고 그 작은 나무하나를 키울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땡볕을 한 몸에 받고 쏟아지는 폭우에 그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요. 그러나 그 나무가 오늘 심었다고 해서 내일 갑자기 하늘높이 솟아올라서 그래서 느티나무처럼 그 그늘을 만들어 줍니까? 안 그러죠 이게 너무 힘든 거예요. 이게 너무 힘들어서 사람들이 나무를 심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그 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것을 보기 전에 그 일을 그만 두는 거죠.
그러나 오래참고 인내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 나무를 돌보노라면, 이 땅과 나무는 정직해요. 그래서 잘 자란단말입니다. 그래서 하늘높이 솟아올라서 느티나무처럼 커다란 이 그늘을 만들어요. 그래서 수많은 벌레들이 깃들게 하고 벌레들이 있으니까 새들이 날아들고 짐승들이 모여들고 그런 생태계를 이루는 거죠. 그 나무가 그렇게 되면 그 나무의 씨앗이 날려서 또 나무들을 심어내는거입니다. 바로 그런거입니다. 그래서 처음 땅을 파고 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그늘이 드리워 질 때 까지는 혼자서 그렇게 고생하고 하나님 앞에 수고하는 거죠.
그래서 남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가는 것 보다는 맨 처음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고난이 훨씬 더 큰거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이클 경기는 일등으로 들어온 사람이 일등이 아니입니다. 누가 일등이냐면 일등으로 들어온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선두에 섰는가 하는 것을 다 기록을 잰대요. 왜냐하면 선두에 선 사람이 있고 선두지에 약간 몇 미터 떨어져서 그 사람을 따라온 사람이 있으면 뒤에 있는 사람은 앞에 가는 사람 보다 더 10%내지 30%의 힘을 덜 들이면서 따라 갈수 있대요. 처음 가는 사람이 공기저항을 다 받고 그 뒤에 이렇게 따라가니까. 기러기들이 줄지어 날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원리거든요. 뒤따라가면 공기저항을 덜 받아서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줄에 줄을 지어서 날아가는 거예요. 모든 것은 처음하는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사역의 역사를 최초로 쓴다. 그렇게 하면서 사역이 죽이루나가는거죠 거기에서 많은 양떼들이 깃들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게되는거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는 것을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그 일을 시작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들이 가능하다 라고하는것을 깨닳는거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사역이 이렇게 견고하게 심겨지고 뻗어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역을 하는 교역자들은 첫째는 말씀 안에서 견고하게 지체들이 신앙이 자라야 해요. 그래서 신앙이 견고해 지고 행정적인 지혜와 능력을 잘 발휘해서 나름대로 독특하게 구축해놓은 효율적인 시스템들이 잘 정착해서 견고해지고, 그리고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 성화되어서 향기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가고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우리 함께 교역의 기능을 돕는 행정부서에 있는 직원들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죠. 그냥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그냥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없어요. 그러나 꾸준히 연구하고 어떻게 하면 나의 직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내가지금 하고 있는 일은 원래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통해서 함께 작동하고자 하는 그 궁극적인 교회의 목양의 목표에 기여하고 있는가, 그것을 반성하면서 끊임없이 창의 적인 태도를 가지고 임하는 사람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자꾸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많아지게 되요. 일이 많아질수록 일이 보다 더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일이 많을수록 자기에게 맡겨진 그 직무가 아주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진취적이고 창의적인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 맡겨 놓으면 한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혼자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또 한명 필요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전임자가 하던 일들도 점점점 줄어들어요. 왜, 조금만 힘들거나 별 큰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점점 퇴화 되어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결국 자신의 가치도 점점 퇴화 되어 가는 거죠.
자 이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런데 조직은 점점 발전합니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규모도 커지고 그리고 좋은 사람도 계속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은 점점 더 조직은 유능한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고, 젊은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고, 진취적인사고와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요. 그러면서 맨 처음 그 일을 열었던 사람은 점점 더 퇴보하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은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내가 이슬과 같으니 백향목과 같이 뿌리가 내리고 뻗어나가리라 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실적 은총의 번영의 약속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삶이다 하는 것이죠.
(예화)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을 때 어느 날 다섯 달란트 갖고 가서 주식에 한 번에 딱 투자했더니 그 다음날 다섯 달란트가 나왔고, 그것을 장롱에 숨겨놓고 주인오기만 기다리며 먹고 마시며 쉬었을 리가 없죠. 주인이 와서 계산하는 그 순간 까지 일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으로부터 받은 이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해서 내게 맡겨준 그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아마 집요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섯 달란트라고 하는 이윤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역에 있어서 이러한 번영이 이루어 져야 해요. 하나님축복으로 말미암는 사역의 견고함과 번영이 이루어 져야합니다. 사실 이 호세야 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어린 심판의 선고였고 그들을 향한 책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용서의 눈물로 가득 차 있죠. 근데 하나님께서 오늘이 마지막 장에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번영과 회복을 약속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것 같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백성이 먼 훗날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복음의 시대의 성공을 가르키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계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번영을 약속하셨다 이런 예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 사역을 해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잘 충성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그 일을 이뤄 가시죠. 그래서 잘 감당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잘 감당해 나가서 칭찬 받는 그런 지체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도 이 시간에 저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 사랑스런 존재가 됨으로 우리의 사역이 이처럼 견고해지고 번성하도록 도와주셔서, 우리의 섬김과 사역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쉼을 얻고 구원을 얻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