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망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사38:14上)
(예화) 초등학교 한 3학년 때쯤, 한참 개구지고 까불 때였으니까 한 삼학년이나 사학년쯤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제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새 종류는 지금 잘 생각이 안남니다만은 지붕에 그 새집이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하다가 하튼 자세히 생각이 안남니다만은 새끼 한 마리를 그 동네 애들하고 같이 주었어요. 그러니까 새 새끼를 볼 수가 없잖아요. 새끼 때에는 그 둥주리에 갇혀있으니까 볼 수 없는데 그 너무 너무 이쁜 거예요. 그래가지고 우리 딴에는 그거 보호해준다고 엄마가 쓰던 화장품을 바닥에다 확 쏟아 놓고 그 집안에서 그게 가장 쓸만한 괘짝이었어요. 거기에다가 새를 이렇게 밑에다 뭘 인제 신문지를 놓고 날라 갈까봐 얇은 망사 같은 걸 위에다 딱 씌워서 고무줄로 묶었어요. 너무 신기해서 동네 애들이 다 와가지고 그걸 들여다보면서 인제 웃고 야 신기하다 그러면서 만지려고 그랬어요. 그리고 나서 한 30분쯤 흘러갔는데 새 한 마리가 바깥에서 정말 우는데 진짜 슬피 운다는 말이 이해가 가요. 그렇게 애처롭게 새가 우는 거예요. 뭔가 그랬더니 아마 어미 새인 모양이라. 그게 크지도 않은 조금한 새인데 한 두 시간동안에 창밖의 전깃줄 위에 앉아서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래 보다 못해서 집안에 어른들이 ‘야, 그 아무리 새지만 불쌍하다. 풀어나 줘라.’ 그래가지고 그 새를 다시 올려다가 그 새집에다 갖다가 넣어놓으니까 그 다음에 어미 새의 그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그쳤어요. 근데 박씨는 안 물어다 주더라고. 그 새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벌써 뭐 40년 전 이야기죠. 근데도 지금도 이렇게 이 말씀을 이렇게 오늘 전하려고 말씀을 보면서 그 울음소리가 날은 약간 음산한 그 여름방학 때니까, 날은 약간 음산하고 그런데 날도 흐리고 그런 저녁시간인데 그 새가 그 전깃줄에 앉아서 두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슬프게 우는 거예요. 그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해요. 무엇으로도 그 새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겠죠. 아마 새끼 새를 내버려두고 그리고 어미 새가 훨훨 날아갔을 때에는 먹고 살려고 벌레라도 한 마리 물어오려고 아마 나갔겠죠. 돌아와서 보니까 새끼 새가 없어졌어요. 그거를 보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슬피 우니까 이제는 그 어미 눈에는 먹이를 물으러 나가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그 새끼뿐이에요. 근데 참 신기한 게 그 우리가 그 새를 가져간 걸 어떻게 알겠어요? 근데 그 작은 새가 짹짹거리고 우는 소리가 그 창을 넘어서 그 어미 새에게 들린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거기 와가지고 슬프게 우는 거예요.
여기 이 시의 주인공인 히스기야라는 사람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이사야의 시대가 아침에 설교한 에스겔의 시대보다 한 120년 정도 앞섰다고 생각되는데 이 이사야가 선배죠. 120년 정도 선배입니다. 근데 벌써 이미 그때에 나라가 많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 히스기야는 유다, 아니면 이미 벌써 그때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한지 한 30년 내지 40년 정도 흘렀을 때의 일이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통털어서 말하자면 기울어져 가는 역사의 마지막 타오르는 그런 한줄기 불꽃과 같은 신앙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정말 순전하게 하나님 사랑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사야 선지자가 오더니 ‘너,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너 죽는대. 다시 살지 못한대. 그러니까 너 장례식 준비하라.’ 히스기야가 면벽을 하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어요. ‘내가 하나님 일평생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그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매달려요. 그러니까 이거는 뭔가 자기를 뽐내며 나만큼 산 사람이 있습니까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말하자면 인생의 죽음 앞에서 자연스런 자기 고백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간절히 눈물 흘리며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그 이사야가 집에도 도착 안 했는데 ‘가라. 가서 다시 산다고 해라.’ 이사야가 똥개도 아니고 말이야,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 무슨 하나님이 좀 너무 그러신 것 같지 않아요? 근데 이거는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이유는 뭐냐 하면 나중에 히스기야도 파악을 해요. 그래서 뭐라고 그 뒤에서 고백을 하냐면 내가 이런 당한 것이 뭐라고 고백을 하냐면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하심이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 태평한 시대에 이 히스기야가 나라를 잘 다스리면서 이제 이어갈 때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를 당하게 하심으로 거기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있던 더러운 찌꺼기들을 마저 다 쏟아내시면서 한번 이 사람을 정결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서는 말이에요, 둘 다 다 중요해요.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매일 말씀 깨닫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려고 애쓰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찾는 삶도 필요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매일 매일의 삶으로서 우리가 온전히 정결해 질수 없을 때 이렇게 생애 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한번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찌꺼기들을 쫙 빼내고, 그리고 우리들을 순결하게 하시는 생애적인 이런 사건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그렇게 내가 요새 아무리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뭐 이렇게 의무에 충실 한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지킴의 교리에 보면 마음을 가장 잘 지켜야 될 때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의무에 충실하고 있을 때거든요. 그때에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면 껍질만 남는단 말이야.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된단 말이죠. 의무를 지키지 못할 때는 의무를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이라도 있잖아. 그래 할일 다해. 나만큼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게 마음을 잘 지켜야 할 때란 말이죠. 의무를 행할 때가. 이렇게 의무를 다 행해도 이게 뭔가 내 마음이 정결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일은 내가 아무래도 생애적 사건을 한번 경험해야 되겠습니다. 생애 적으로 하나님 어떻게 날 만나주십시오. 그렇게 자기가 맘먹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같이 탁월한 영적인 인물에게도 한번 그의 인생을 벼랑 끝에 딱 세우시는 거예요. 이사야가 와가지고 ‘헤이, 장례식 준비해. 이제 나 보는 게 마지막이야.’ 그러고 갔을 때, 그때에 히스기야가 경건한 사람이니까 여호와의 사람이 , 하나님의 사람이 괜히 하는 얘기라는 건 아닌 걸 알았을 거 아니에요. 엄중한 그 죽음에 대한 선언을 딱 받으면서 그 순간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신의 이제껏 까지의 쓸모없는 관심사들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자신은 죽음이라는 절벽에 딱 선 거예요. 거기 서서 이제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세워주셔요. 왜?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정결하게 해주시려고.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내가 이 큰 고난을 당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내게 평안을 주려하심이라. 여기서 평안이 하나님과 화해로 말미암는 그런 평화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샬롬의 평화를 얘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대체로 경건한 임금이었고 자기의 고백처럼 일평생 전심으로 주를 위해서 살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았어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순전합니까? 순전함이란 상대적이지, 누가 순결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순결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죠? 그렇게 자기가 순전하다고 자부하면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마음자체가 이미 불결한 마음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거든요. 근데 대체로 순전하게 살아온 거예요.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이제 이 기울어가는 유다 역사에서 이 사람을 아주 정결하게 다시 만드실 필요가 있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되냐면 이제 굉장히 중요한 얘기가 여기서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히스기야 시대 때에 강력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요. 국가적인 부흥이 일어나. 그래서 그랬는데도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또 타락하죠. 결국은 그 심판을 하나님이 하실 수밖에 없이 되가지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근데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강력한 국가적인 불씨들이 바벨론 포로 치하에서도 신앙의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말하자면은 영적인 유산으로 후손들의 가슴에 남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가 되면 그러면은 그것이 아주 놀랍게 오래 오래도록 남아요. 나도 요번에 우리 감사한테 배운 말인데, 종주목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종은 씨종자고 주는 주인 할 때 주자고 나무 목자에요.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온 산에 나무가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바람에 불려서 씨 하나가 소나무가 하나 날라 왔어. 그 나무가 쭉 자란 거예요. 그래서 그 나무가 씨를 퍼뜨려서 계속 나무가 자랐을 때, 그 원조, 원조 그 나무가 종주목이야. 근데 그런 종주목이 하나 서면은 주의의 많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자라는 거예요. 물론 수백 년이 걸리죠. 수백 년이 걸리면 군락을 이루면서 장엄하게 그 거대한 거목들의 숲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뿌리는 뿌리 끼리 움켜쥐면서 산 전체를 휘감는다 이거죠. 똑같이 우리들이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고 우리 속에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이 신앙의 유산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존경하는 신앙의 인물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은 항상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이야기 하는 게 스승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라.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시원한 사람이 없고 다 써금 써금하면 죽은 사람 족보를 뒤져내서라도 신앙의 스승을 찾아라. 그래서 그를 흠모하고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근데 이 말하자면 이 히스기야를 하나님이 그렇게 한번 정결케 하심으로 민족적으로 정말 새로운 영적을 쇄신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그것을 역사 속에 길이 영향을 미치는 거죠. 근데 오늘 우리들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모든 메시지와 함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이 사람이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이 벼랑 끝에 세우셨을 때에 그가 그 벼랑에서 하나님을 만났을까? 그걸 오늘 뭐라고 표현 하냐면 오늘 읽은 그 본문에 나온 바와 같이 뭐라고 표현 하냐면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은 쇠하도록 앙망하나다. 근데 이게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거기 까지는 똑같은데 나의 눈은 여호와의 높은 곳 때문에 약해졌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나하고 눈하고 이게 병행을 이루면서 나가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슬피 울고 나의 눈은 하나님의 높은 것 때문에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이렇게 높은 곳을 한 곳을 계속 응시하게 되면 눈이 피곤해지잖아요. 사물이 막 겹쳐 보이고 그런 현상이 나잖아요. 착시현상이, 이걸 등가 번역해서 우리 마음에 한국인의 정서에 사무치도록 번역을 한다면 나 이렇게 번역하고 싶어요. 나의 눈은 주님을 바라보느라고 짓물렀나이다. 그런 의미라 이거죠. 짓물렀나이다. 그러니까 이 시를 쓴 히스기야가 인생의 벼랑 끝에서 벼랑 끝에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시는 것을 경험했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먹고 사는 문제 걱정도 안 되고 세상은 아무래도 좋아. 나는 오직 정말 고상하고 아름다운 기도 제목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 그래요. 한 사람이 정말 자기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오류 가운데 건져주시도록 진실해지도록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도록 이것이 뼈에 사무친 기도 제목이 되면 그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계속 살면 돼. 근데 살다가 보면 그런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에 대한 진실함, 그리고 주님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순종하는 이런 삶, 이런 것들 다 잃어버리거든요. 그리고 영혼은 갈 길을 모르고 마치 더듬이 자린 귀뚜라미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방바닥을 헤매는 그런 처지가 되거든요. 그때에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그가 누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게 위해서 영적인 감각을 살아나게 하시는 방법으로 그 사람을 이렇게 한번 쯤 벼랑 끝에 세우시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생명을 거둬가겠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벼랑 끝에 그를 세우셨지만 여러분의 벼랑은 어떤 겁니까? 여러분들의 낭떠러지의 길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 각자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끌고 가시는 그 벼랑이 어딘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여러분, 사경회 때에 은혜 받고 싶어 합니까? 그냥 살면 안 돼요? 못 견디겠으니까 은혜 받고 싶은 거예요. 뭐 하러 오전에 예배드렸는데 또 오후까지 여기 앉아서 또 열심히 말씀을 듣고 뭔가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려는 그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무엇인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온 것 아닙니까? 영적인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육적인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지금 영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언젠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셔. 왜냐하면 그들은 뭐 돈 몇 푼 하나님이 거둬 가시고 무슨 뭔 건강의 위험을 주신다고 해서 활딱 뒤집어져서 하나님 원망하고 배신하거나 아니면 펑펑 울면서 매달리면서 감기 낳게 해달라고 통곡하고 그러지 않는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냐면 영적인 방법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영혼이 헐벗은 것과 거짓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치 사업하던 가게 하나가 문 닫은 것처럼 넌 진실하지 않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몸부림치면서 그 진실을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 한다 이야기에요. 그런 사람들을 다루어 나가실 때 하나님 얼마나 보람 있으시겠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냐 이거에요. 상당히 많은 사람, 너 진실하지 않아. 뇁도요, 이렇게 살다 죽을래요. 너 계속 그렇게 살면 너 내 사랑 못 받지 않냐? 그러니까 아 하나님 사랑 없어도 돼요. 뭐 사랑하는 것 바라지도 않고 훼방이나 놓지 마요. 뇁도요. 이대로 살다 죽을 거예요. 그런다 이거에요. 그러니 뭐 너 그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평화 없는데. 아 하나님과의 평화 잃어버린지가 언젠데 지금 와서 내가 무슨 그런 먹고 살기도 바쁜데 평화 찾게 생겼냐고. 이렇게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하나님 안 기뻐 하신다는데 이미 벌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안 기뻐하시고 그런 것 벌써 관심이 아니에요. 중요한건 자기가 기쁘냐, 안 기쁘냐 그런 거지. 그렇게 살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뭘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꿇어 앉혀놓고 가르치면 뭐하고, 눈물 흘리며 가르치면 뭐하고, 뭐하는 거예요. 벌써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떠난 사람들인데. 그래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죠. 내버려두시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은 내버려 두신대로 또 살아가는 거예요. 건들건들 거리면서 그냥 그 뭐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곤고하다고 생각될 때는 가서 뭐 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잠깐 잊어버리고 말이지, 이렇게 하면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사람도 내버려두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대신 육적인 것에 대해서는 예민하거든요. 사업의 위기가 와. 몇 년째 헤어날 길이 없어. 처음에는 IMF때문이겠지. 모두 당하는 일인데. 근데 딴 회사는 다 일어나는데 자기 회사는 일어날 줄 몰라. 그리고 가정에 자꾸 어려운 일들이 겹쳐.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나. 배신해.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아. 그 무엇을 해도 얻어지는 것이 없고 마음의 고통이 가중돼는 거예요. 그때에 비로소 뭘 생각하게 되냐면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처음서부터 애착이 없었지만은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뭐냐 하면 자신의 삶이 이런 육적인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자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움직이고 계시다고 하는 깊은 말하자면 자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 벼랑 끝에서 뭐냐 하면 이제는 뭘 먹고 살까? 얼마나 돈을 더 벌까? 얼마나 높이 올라갈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살던 사람, 얼마나 편히 살까? 이런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벼랑 끝에 딱 내몰리면서 자기가 이제까지 사랑하던 것들을 잃어버릴 상황이 되어버리고 나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얼마나 영적인 인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은 죽음을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니에요.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은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로다. 말이 돼요. 거 평안을 주시기 원하는데 왜 고난을 주세요? 뭐냐 하면 그 고난은 육적인 고난이었고 이 평안은 영혼의 참된 평안이었어요. 그런 쇄신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벼랑 끝에 딱 데려가신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끝에 왔다고 생각되는 분들 있죠? 아닙니다. 곤고하고 힘들긴 하지만 벼랑 끝이라니요? 자존심 상하게. 벼랑은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럼 가요. 거기 가서 보자고.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그러니까 벼랑 끝에 가서 그 뭐 사경회가 한번만 있겠어요? 그럼 언제쯤 돼서 벼랑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그때 사경회에서 보자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비관할 때에 비관할 줄 알고 낙관할 때에 낙관할 줄 알아요. 근데 그 은혜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낙관을 해야 되는데도 비관해. 정말 비관해야 되거든. 그런데 쓸데없이 낙관하는 거야. 그러면서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기를 마다하고 그리고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당히 살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당히 하나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곤고하게 살아가는 거죠. 벼랑이 어딥니까?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아직까지도 왕국의 할 일은 많고, 단순한 생명의 애착이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왕국의 할 일은 많고 앗수르의 위협은 가중되고 자기가 죽으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하는 것, 이렇게 확 떠오르는데 사실 이 히스기야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도 있었지만은 이때에 이 경건한 왕들은 모두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철저한 소명의식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그러면은 그 어떻게 되겠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지금 나보고 오라고 그러시면 그러면 가야 되겠죠. 아직 평균 연령으로는 더 살아야 되지만 주님이 부르시는데 뭐 가는 거죠. 그렇지만 나야 가면 되지만 교회는 어떡하겠어요? 아, 그 뭐, 믿음이 왜 그렇게 없으세요. 아, 빨리 먼저 가세요. 누군가 와서 하겠지요. 그거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생각이고, 그 모세의 가슴 아린 마지막 설교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하시겠죠. 모세는 항상 물가에 어린애를 내어놓는 것과 같이 그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러며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죽었어요. 그때에 그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경험하게 될 그 타락과 부패, 그 하나님의 징계, 거기로부터 어떻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하는 가를 가르칠 때에 파노라마처럼 그들의 앞날이 눈에 스쳐갔을 때에 그 모세 안에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었단 말이죠. 그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히스기야가 순전히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런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일 사고가 육적일 리가 없다고. 그죠? 그런 것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부분은 calling을 받은 사람으로서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물러날 때에 이루어지게 될 그 모든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죽음이 그들 한번 쯤 벼랑으로 데려간 거죠. 거기에서 하나님이 아주 이적적인 방법으로 이 사람에게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죠. 어떤 사람이 히스기야가 그 기도한 것이 잘못됐다. 15년을 더 살아서 좋은 꼴을 뭘 봤냐? 마지막에는 결국은 나라가 망한다는 예언을 받고 영적인 그런 사람이 육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그렇게 되어서 인생 끝나지 않느냐. 이렇게 주석을 해놓은 사람이 있더라고. 나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사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 되거든요. 히스기야가 나중에 처음 마음을 간직하지 못한 것은 못한 거고, 이거는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욕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의 믿음으로 본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사야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가서 너 산다고 그래라. 그리고 일영표, 히스기야의 일영표 해시계의 그림자를 물러가게 한 것 아니에요. 저는 한 십여년 전에 어느 과학 지를 쭉 들여다봤는데 거기 그 사건이 나오더라고. 컴퓨터로 다 계산을 하는데 시간이 빠진대요. 근데 그 빠져나간 시간을 이제 그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여기에서의 사건하고 여호수아서의 해가 멈춘 사건하고를 연결시켜가지고 채워 넣는 작업들을 하더라고. 근데 그게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줄은 모르지만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이 사람을 살려줄 거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이 일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히스기야의 개인적인 생명이 아니라 유다의 신앙의 역사와 관계된 것이고 또 그 흩어진 유대인들을 통해서 신약시대의 교회가 만들어질 영적 자산이 되니까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한번 그가 정결하게 되는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신앙만 붙들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삶을 붙들고 계시죠. 그래서 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앙적인 눈으로 여러분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면 지금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할 히스기야와 같은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그래서 그 시련과 어려움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다시 한번 정결해지고 깨끗해져서 우리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서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 새 삶을 살게 되는 그런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시선을 끌 수 있었을까? 이게 뭐냐 하면 면벽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통곡하며 기도했어요. 그것을 기도응답이 다 이루어진 후에 수뢰하기를 뭐라고 그랬냐면 나는 비둘기같이 슬피 울고, 그리고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그러니까 다 울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제비같이, 학같이 흐느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면서 그렇게 했고 마음은 마치 하나님만을 바라봤기 때문이 눈이 짓무르도록 하나님만을 바라본 그 때에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정결케 하셨다는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히스기야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태어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데려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잖아요. 이 히스기야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죠? 뭘 거기에다 더 보탤 있겠어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이 슬피 우는 통곡은 이 제비와 같이, 학과 같이 그리고 비둘기와 같이 슬피 우는 통곡은 무슨 통곡이었어요?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살려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데려가시겠다면 데려가시는 거지, 왜 하나님에게 히스기야보다 더 선한 사람도 하나님이 일찍 데려간 사람들이 많은데 히스기야 말대로 선한 일을 좀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 이 땅에 살려두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걸 히스기야도 알았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살아온 삶에 대해서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이건 뻐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하나님 나에게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왔으니까 지금 이제 마지막 순간에도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 라고 하는 간곡한 부르짖음이에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이라 이거죠. 그가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만을 바라봤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은혜를 긍휼과 그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던 것이죠.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치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렸죠. 히스기야가 면벽을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그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긍휼을 구할 때에 얼마나 재미있어요. ‘야, 전의를 들라 해라. 내가 곧 죽는단다. 어떻게 대책을 세워봐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소용없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누구 손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다 필요 없고 세상의 제왕인데 얼마나 좋은 전의들과 아름다운 약이 많이 있었겠어요. 다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세워졌다. 날 데려가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 않는 한 나의 벼랑 끝에 선 상황은 변할 수가 없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만의 높은 곳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눈이 짓무르는 상황이 된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을 누가 바꿉니까? 아직까지도 좀더 지혜롭게 하면, 머리를 좀 쓰면, 누가 좀 도와주면, 경제상황이 좀 풀리면, 좋은 동업자를 만나면, 좋은 회사로 옮기면, 그런 종류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통해서 보여주신 바는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바라보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오히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벼랑 끝에 섰기 때문에 순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벼랑 끝이 인생의 패배에 내몰리는 벼랑 끝이었는데 그 벼랑 끝이 이번에는 오히려 마귀가 시기할 정도로 새롭게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나는 영적 쇄신의 벼랑의 된, 그리고 거기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한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매달린 가운데 이 사람이 정결한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서 유사에 다시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신앙의 영향을 자기 백성들에게 미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내일부터 사경회가 시작되는데 여러분, 열 번을 다 참석해. 생명 걸고. 그 뭐예요? 곶감도 아니고 말이지, 그냥 생각나면 한번, 이튿날 한번, 4일째 한번 오다가, 펑펑 울고는 돌아가서 다시 그 다음날 새벽기도는 안 나오고 그렇게 하려면 뜻을 세우고 아예 나오지 말아요. 그게 뭐예요? 몸도 아프면 병원에 침 맞으러 매일 가더니만 근데 이게 무슨 입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 10번 참석하는 건데 힘들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세상의 일보다도 나는 이번 기회에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벼랑 끝에서 판잣집이나 짖고 바람 부는 날마다 가슴 조리며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요. 그래서 진짜 홀로 하나님을 한번 대면하는 거예요. 면벽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생에 내몰린 벼랑 끝에서 오히려 주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