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3-4)
녹취자: 손미자
저는 오늘 이 설교를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좀 촌스러운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주제를 알라” 이렇게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논술고사 제목이 아니라. 쉽게 네 글자로 “주제를 알라”를 요약하면 “주제파악” 이것이 설교의 제목이 될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장난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한참 신앙생활의 수레바퀴에 굴러가다 보면 결국은 처음에 분명했던 인식들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분명했던 인식들이 흐려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유익이 되면 좋은데 문제는 이 인식이 흐려짐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신앙과 우리의 영적인 삶에 중요한 손해를 가져오게 된다. 라고 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에베소서 1장과 2장은 계속해서 뒷부분으로 나가면서 교리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바울은 한 번도 교리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그 교리 자체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교리가 자꾸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뭐냐면 교리 자체를 사람들에게 전파할 목적을 가지고 교리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하니까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이러, 이러한 교리를 알려줘야 되겠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대해서 지금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가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희는 죽었던 사람들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살아있으나 이전에는 죽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완료형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기도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기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아니라. 이미 죽은 죄인들입니다. 이미 죽었던 죄인들, 이미 죽었던, 이미 죽어있는 상태를 계속해 왔던,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신 그러한 죄인들이라는 것이 자기 고백이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죽음의 이유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죽었던 이라고 하는 말에서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을 경험했으면 지금 이렇게 살아서 돌아다닐 수가 없죠. 그렇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죽었던.” 이라는 의미가 확실히 사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방금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죽음의 종류가 무엇이냐? 이것은 영적인 사망입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없이 주님의 생명에 연결됨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주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그 생명이 마음속에 영혼 속에 이식된바 되지 아니하는 모든 영혼들은 바로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육체의 죽음, 그것은 단지 80년이나 100년을 살 수 있는 인생을 잠깐 단축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영적인 죽음은 우리의 인생으로 하여금 영원을 좌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죽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고, 그 죽음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죽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이 죽음이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기원은 죄의 기원과 동일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그 죄가 바로 삯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 삯이 바로 헬라어에서는 주종관계에서 받는 품삯입니다. 대등한 관계에서 받는 품삯이 아니라. 주종관계에서 그러니까 죽도록 그 집에서 머슴으로 충성하면서 노비들이 받는 세경, 그것을 가리켜서 이 삯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주종적인 관계에서 죄를 섬기면서 죄의 종노릇 하면서 산 마지막에 대가로 마지막에 받는 것이 뭐라고요? 사망, 죽음입니다.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혼의 모든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다. 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 구원받은 우리들에게서도 늘 경험이 되어 집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 일을 행하셨나.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착하게 사나. 혹은 아직은 안 살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구원해주면 이 사람이 어마나 멋지게 인생을 살 것인가? 얼마나 나에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유익을 끼치면서 살 것인가? 그것을 보시면서 그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누구든지 구원을 자랑할 수 없게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우리의 그 긍휼을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선행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자기의 구원을 인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구하셨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상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의롭게 사는가? 그 여부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또 심지어 우리가 어떤 영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느냐. 거기에 달려있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그 구원이 여러분들의 선행이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그 구원이 달렸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의 생명록은 술집의 외상 장부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술집 외상장부 본적이 없습니까? 본 일이 없겠지. 오늘 얼마 먹고, 작대기 쭉, 싸인 하고 가면 그 다음에 와서 갚고, 어제 것 갚고 줄긋고 오늘 새로 달아놓고 또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1년 정도 계속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장부책이 아마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상태도 만약에 우리의 영적인 상태나 선행에 달렸다면 우리가 바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구원 받았다. 그렇게 살아가지고 되겠느냐. 떨어졌다. 그다음에 다시 올라왔다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빨간 줄이 수없이 많이 그어졌어도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느냐가 중요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은혜는 그런 우리의 선행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제가 우리 김 승기 전도사님을 데려다가 우리 집에서 하루 종일 일을 시킨 다음에 정해진 품삯이 2만원을 만약에 줬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아무 일도 행하지 않았는데 전도사님 오늘 우리 집에 좀 잠깐 오십시오. 와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전도사님 이 돈 가지고 여행도 하고 재미있게 많이 쓰십시오. 그리고 한 20만원을 집어줬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그 은혜를 누리게 되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신기한 것이거든요. 뭐가 신기하냐면 날마다 우리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확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기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향해서 거시는 그 기대 때문에 우리를 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말로 말하자면. ‘내가 너를 밀어 주마, 내가 너를 믿는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뭘 우리에게 기대를 거셨기 때문에 그 기대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라. 몰라. 아직 몰라. 왜 하나님이 나는 구원하시고, 그리고 내 옆집에 있는 이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셨는지 나는 이 세상에서 아직 몰라요. 무엇을 압니까. 나는 오직 나에게 미친 그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을 ‘아, 나 같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이 놀라운 사실, 그것만을 알 뿐이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신기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분명히 우리가 이전에 또 지금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그리고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경험하게 되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에 동의를 하면 ‘아멘’ 해보세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무한대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 무한대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기대를 거셨기 때문에 그 기대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죄와 허물에 빠지게 되면 분명히 우리는 구원 받고 생명이 우리에게 있는데 하나님과의 교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바로 그것이 이전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 우리와 하나님과 살아가던 그 관계의 한 그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갈 때 우리들이 느꼈던 하나님과의 단절은 구원 받은 우리들이 잠깐 범 죄 함으로 느낀 이 단절보다 굉장히 본질적이고, 더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안 하면서 사는 것, 그런 삶, 단지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하는데 안 믿고 산, 그런 소극적인 불순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는 악에 개입하고, 죄에 개입하고 불순종에 개입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 우리의 마음속에 지난 주 말씀드린 주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시리고 저항하고, 심지어 파괴하고 짓밟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난날의 주제입니다.
편의상 2절을 한번 봅시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첫 째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두 번째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세 번째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전주에 내려가면 여러분, 족보를 만드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이 제대로 족보를 만드는 유일한 집입니다. 여러분도 집에 가보면 가문 있는 집은, 가문, 그런 것 그리스도 안에서 다 쓸데없는 것이지만 여러분 절대 그런 것에 집착하고 연연해하면 안 됩니다. 믿습니까? 무슨 뭐 천방지축, 마골 피 찾고, 양반 상놈 찾고, 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신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족보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런데 그 족보가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족보를 만드는 것을 보통 정성과 열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전주에서 족보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족보를 쓸 때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이 사람이 당 하관인데, 당 하관은 뭐냐면 관직의 서열가운데 방망이 들고 왕 앞에 쭉 서 있는데 거기에 못 끼는 사람이 당 하관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방망인가 뭔가 새빨간 것 이렇게 들고 “아뢰오.” 하고 쭉 서 있는 사람, 그 자리에 끼려면 당 삼관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당 삼관과 당 하관은 종정 그것 하나 차이인데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것이 종 몇 품인데 그것을 살짝 고쳐서 말이죠. 정 몇 품, 하여튼 그렇게 살짝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옛날 족보에 대해서 향수를 갖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있지도 않는 사실을 만들어서 옛날 족보를 바라보면서 긍지를 느낌으로 오늘을 가문에 태어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에 긍지를 느끼면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런 가문의 후예들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열망 때문이겠죠. 법으로 규제를 받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정반대입니다. 족보를 찾아놓고, “왕년에 우리 가문이” 하는 사람치고 요즘 가문이 신통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말이죠. 정 반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옛날 주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삶의 족보를 들추면서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인을 받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의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들 가운데 꽃피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에게 약속된 그 광대한 삶과 그리고 은혜에 그 씨를 우리의 것으로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며, 또 이런 삶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오늘 잠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의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도” 그러니까 오늘날 너희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 너희들 보이지. 우리도 지금 그것을 보고 있지. 그런데 사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바로 옛날 우리의 모습이었단다. 하는 것이죠. 우리는 가끔 세상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거나 나라와 그리고 민족과, 그리고 조국의 장래를 염려하고, 교회 밖의 세상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의 타락에 대해서 개탄하거나, 세상의 많은 죄에 대해서 가슴아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은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그 속에 살던 사람이고, 거기가 바로 우리의 고향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좀 믿고, 은혜를 좀 받으면 자기가 예수가 된 것처럼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마치 자기가 모두 다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두 번 기만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잘난 채 하면서 사는 우리에게 성경을 갖다 코앞에 들이대면서 너희의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땠습니까.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법 없이 살아가고 무법한 자들의 악한 행실을 인하여 패괴와 강포가 날마다 있고, 죄와 살인과, 강포와 끔찍한 죄악들과 허물들이 독버섯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이악한 세상이 사실은 바로 우리들이 자라나온 그 고향이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죄인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가 예전에 가졌던 그 모습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초상이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했죠. 18세기의 마지막 그 꺼져가는 구라파의 부흥의 물결을 마지막으로 마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저서가 많이 읽혀지고 있죠.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책은 뭐든지 읽으세요. 다 잘 썼습니다. 잘 못 되었다는 것은 번역이 잘 못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여튼 그래요. 그 분이 말씀했죠.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그의 “겸손”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겸손하게 되느냐? 인격 수향이 안 되어서 겸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가 얼마나 뛰어나신 분이시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말씀하셨어요. “세상에는 죄인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죄인인데 하나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하나는 아직까지도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 살아가고 있는 죄인입니다.” 얼마나 유명한 말입니까. 복음의 핵심을 관통하는 얘기입니다. 세상에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하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면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옛 모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일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솟아나는 육체의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빤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속에 검은 구름처럼 뭉개 뭉개 피어나는 마음의 원하는 소욕, 그 욕심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욕심은 궁극적으로 죄를 짓기 원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그 순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들의 삶 속에 가장 강하고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뭐냐면 주님을 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주와 함께 동행 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라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극단적인 반역과 하나님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하죠.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더라.” 마음속에 그 하나님을 두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반역하고 배척하고, 서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반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이전에 세상에 살았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그다음에 바라는 바도 없었습니다. 오직 눈 뜰 때부터 눈 감는 밤까지 마음에 원하는 것은 오직 추구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대로. 내 인생이 갈 수 있도록 아무것도 내 인생을 막지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이 흘러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원하는 것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오기를 거절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죄와 더불어 먹고, 죄와 더불어 마시고, 그렇게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여러분들은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본능에 보다 충실해서 더 풍부한 죄를 짓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제법 수양되었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자기 나름대로의 도덕적인 방어 기제가 있어서 그래서 덜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은 더 많은 죄와 덜한 죄를 비교하면서 그 덜한 죄를 지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심지어는 그 사람들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도덕적인 인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구원한 복음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이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많이 죄 지은 사람이든, 적게 죄 지은 사람이든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셔야 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창에 찔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죄 적은 사람들을 인하여서는 단지 욕설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시리는 크고 작은 모든 죄, 그분의 죽음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 얘기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여러분, 혼자만 죄 짓고 살아갔다면 그 혼자만 죄 짓고 살아가는 여러분을 구원하는 방법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비로소 여러분의 죄 값이 청산되고 구원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얘기하는 우리들이 바라보는 죄와 세상에서 바라보는 죄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적인 죄, 절대적인 죄, 모든 죄가 그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던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렇게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들을 언제나 행했습니다. 보십시오. 죄가 마음에 있게 되자. 그것은 잉태하였고,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고 있는 수많은 행위의 열매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그에게 도덕을 많이 가르침으로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못 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에 못된 열매가 맺을 수가 없다.” 문제는 사람들의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심기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하고, 중생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살리시는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들을 계속 행하면서 사니까 그 마지막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면 진노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 진노의 끔찍한 심판을 그 위에 쏟아 붓지 않으실 수 없는 그러한 진노의 자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관측입니까. 여러분, 악한 생각이 계속 쌓이면 그 악한 생각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행동이 계속 쌓이면 반드시 습관이 되고야맙니다. 습관이 계속 쌓이면 이제는 그 사람의 인격과 그러한 죄를 분리시킬 수 없는 결탁된 관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인격적인 특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본질이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고와, 행동과, 말하는 것과, 보는 것과,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욕심들이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치 죄를 짓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래서 자신도 돌이킬 수 없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진노를 쌓고, 그 진노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죄인이 하나님을 찾지 못함으로 더 죄를 쌓아가고, 더 죄를 쌓아감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더 확정되어가고, 확정되어 갈수록 하나님을 향해 거시리고, 거시릴수록 그 죄가 커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쉼 없이 치달아가는 그 인생을 가리켜서 오늘 하나님을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우리를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해도 다 못할 세상인데 사도가 왜 이미
(찬양) 예수 안에서 우리 화목 됐네.
그리스도와 더불어 화목이 되고, 이미 그것은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의 일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빈민굴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내가 왕의 집안에 입적이 되어서 이제는 그 왕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왕자가 되었습니다. 공주가 되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으로부터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분 나쁘게 옛날의 과거를 들추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새롭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서 그 안에서 그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으로 우리가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삶의 가치와 목표가 거듭나서 그것을 향해서 따라 살아갈 삶의 한 목표를 갖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는 거의 불신자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이 불신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도덕적인 삶을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불신자와 방불한 삶을,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악한 삶을 구원 받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러면 삶의 분명한 예수를 믿고 나서 여러분은 “나는 변했다.” 말합니다. 얼마나 변했습니까. 가난한 사람을 보고, 눈물을 이제 조금 흘릴 줄 아는 것, 그런 윤리의식, 그것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변했다.” 얼마나 변했습니까? 전에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이제 겨우 감정의 정리가 끝났습니까. 그 정도 변한 것입니까? 얼마나 변했습니까? 여러분, 더 나가볼까요. 예수를 믿고 우리들이 삶을 제는 가치가 얼마나 변했습니까. 정말 예수 믿기 전에 존귀하고 귀하던 것들이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겨집니까. 이전에는 정말 아름답고 그냥 부럽던 것이 이제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것들이 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이 변했습니까? 쉽게 얘기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어도 정말 우리들이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가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우리의 인생은 불신자와 거의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부끄럽게 구원은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받기까지 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거듭났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죄악을 행하면서 거듭났기 때문에 심령이 괴롭습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시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죄는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를 끌고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서 나를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가 고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이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나에게 유익을 주느뇨.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고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뒤에 있는 우리의 푯대를 분명하게 하지 아니하면 앞에 있는 우리의 푯대를 아무리 우리가 붙잡으려고 해도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뒤에 있는 푯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뭐냐면 “너희는 소망이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이전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기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왜 상기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통해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입니다. 여기에는 안 나왔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나”가 나옵니다. 뭐냐면 “너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진노가운데 있으면서도 진노를 쌓는지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것이 죄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끔찍한 반역인 사실을 인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없습니다. 한 걸음, 한걸음, 다가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줄달음치면서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어떤 사람들은 여덟팔자를 그리고 심각하게, 어떤 사람들은 장난처럼,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불타는 지옥의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경고도 받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기면서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달음박질치면서 걸어가면서 말하기를 “나처럼 성실하게 살아라.” 말합니다.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날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는 다른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해당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요. 왜? 무엇 때문에 “그러나”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는 소망 없는 죄인들이 있고, “그러나” 뒤에는 그 죄인들의 소망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그렇게 소망이 없는 그 인생들, 외쳐도 듣지 못하는 그 인생들에게 주님이 수없는 구원의 초청을 했지만 사람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전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허물과 죄로부터 우리를 살리셨도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여기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 더 묻는 것입니다. “주님, 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대답이 없어요. 대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필요한 질문은 그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웃깁니까. 보세요. 사람들이 전부 다 물에 빠져서 다 허우적거리면서 죽게 되었습니다. 두 두 두 둑 그러면서 헬리콥터가 날아왔어요. 줄을 쭉 내려 보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줄을 타고 구조대원들이 내려와서 사람을 건졌어요. 물에 빠져서 막 해매니까 건진 거죠. 딱 건져놓으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 도대체 왜 나를 건졌느냐.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내 옆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왜 나를 건졌단 말인가. 나를 건졌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지 않았느냐” 이렇게 물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신병자는 있겠죠. 우리는 단지 무엇을 알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것은 그 크신 사랑,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우리를 살리셔서 구원하셨다. 그 사실을 알아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결국은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말하자면 은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를 사전에 느꼈거나, 혹은 사후에라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소망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구원 받을 때만 소망이 아니라. 지금도 그것이 소망입니다. 여러분들, 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 보세요. 여러분,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지 모릅니다. 모여 앉아서 궁상을 떨기 시작하면 특히 여자들이 잘 그렇습니다. 모여 앉아서 가정주부들이 궁상을 떨기 시작하면 궁상떨기 경쟁 대회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우리는 있지, 형편이 말이 아니야.” 그러면서 한 사람이 발동 걸면 그다음에 “아이고, 그 집은 그래도 우리 집 보다 낫지.” 그러면서 이제 궁상의 심도를 더해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말도 마” 이러면서 이제 궁상을 한없이 떨어요. 그러다가 이제 한 사람이 “우리는 이제 살만해.” 그러면 그다음에는 또 서로 뻥 하는 것, 뻥튀기 대회를 하는 것이죠.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아, 뭐 우리는 최근에 없었던 산이 10만평이 발견되었는데” 뭐 하면서 뭐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뻥튀기 전당 대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구원을 받을 때만 그 하나님의 은혜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세요. 정말 우리들이 그렇게 뻥튀기고 그렇게 위선하지 말고, 그렇게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 여러분, 매일 좌절해야만 정상입니다. 여러분 제대로 살아갑니까. 여러분 삶에서 오늘도 “대견해, 참 누가 낳는지 참 대견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두들기는데 이 가슴이 누구 것인지 나는 모르겠어. 참 존경스러워요. 야, 이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정신병자입니다. 늘 절망하고, 인생의 이력을 쭉 펴놓고, 전부다 괄호 치고 싶은 것 밖에 없죠. “아, 이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괄호치고 싶죠. 표백제로 지우고 싶죠. 그래요. 살아가는 모습을 아무리 봐도 소망이 없어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매일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생각해도 내가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대해서 제일 후한 사람이 나인데 그 후한 눈으로 나를 봐도 소망이 없습니다.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소망이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그렇게 산 사람들이 그렇게 안 산 사람보다 여기 훨씬 더 많아요. 무슨 소망이 있어요. 꿈을 깨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는 일들이 일어나야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믿는 일을 포기하세요. 이것이 저의 말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대견스러워하고, 여러분 자신을 제법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존재인지, 아, 정말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만물의 찌끼와 같다. 미말의 가장 작은 자다.” 심지어는 “여덟달 반, 덜 떨어진 사람,” 자기는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실패하는 이유가 뭐냐면 자신을 상당히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포기하라고, 너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보여주는 것이 뭐냐면 과거의 주민등록증입니다. 본적지 세상, 직업, 죄와 허물을 먹고 삶, 어떻게 살았냐? 세상 풍속을 쫓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함.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이력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 남았잖아요. 그 옛 성품이 우리를 자꾸 죄 가운데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아무리 죄 가운데 이끌어가려고 해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면 구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문제가 아닙니까. 구원이 문제인 것은 구원 못 받은 사람에게 문제지. 지금 우리는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구원이 문제가 아니라.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 너희를 살리셨다. 라고 하는 이 메시지를 보면서 결국은 이것이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들려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입니까? 매일 같이 우리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소망이 없는데서 충분히 낙담하고, 아주 충분히 절망합니다. 충분히 낙망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말해야 되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소망이 없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어차피 우리는 이것 하나만 소망입니다. 믿습니까? 그것 하나가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 필요 없어도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다가 하나님께 갈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질문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철저하게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결국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여기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도다.” 인위셔티브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과거의 인위셔티브는 우리에게 있어요. 누가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했습니까? 우리가. 누가 허물을 택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하면서 사는 것을 누가 즐겼습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던 것이 누구였습니까? 우리가. 구원하신 주님의 음성을 거절할 때 누가 거절했어요? 우리가. 인위셔티브를 우리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위셔티브를 줘봐야 도무지 소망이 없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개입하셨어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참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제가 “십자가”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했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이 입을 그냥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벌려요. 우리 철저한 죄인들과 그리고 그 우리로서는 소망이 없는데 “그러나”의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한 이 두 모순 사이에서 왜 모순이라고 제가 표현해요?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주님을 거시리는 그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러나” 개입하셔서 그를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 엄청난 차이 앞에서 우리가 제일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냥 입을 벌리고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러니까 찬송이 무엇입니까?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는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복음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그러나”의 하나님을 붙들어야지 역시나 하는 나를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무엇을 불러요. "그러나“의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이런 나의 하나님, 그 ”그러나“의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도바울이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그 구원의 은혜와 감격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정말 그 구원에 합당한 인생이 아니고,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영적인 은혜가 ”그러나“ 로 개입해주신 그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만을 자랑하게 됩니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또한 그러하니라. 이후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렇게 선언할 수 게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나”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 앞에서 “그러나” 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붙들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때요? 역시 할 수밖에 없는 나를 붙들면서 그것 하나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면서 울고 웃는 인생처럼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 하나에 자기 하나를 오늘은 대견해하고, 내일은 죽이도록 미워하고 또 내일은 죽이도록 미워하고 또 모래는 거기 가서 화해해야 되고, 글피는 그를 의지해야 되고, 그글피에는 다시 또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실인지를 입증 받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모두 “그러나”의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이 “그러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은 “자비”입니다. 저는 그 자비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그 “비”자가 뭐냐면 슬플 비입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자비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헤세드나 핼라어의 아가페 이 개념을 굉장히 기가 막히게 잘 갖다 줘요. 아마 저는 여러 개의 국어를 잘 할지 모르지만 그 말처럼 우리나라의 “자비”라는 말처럼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풍성하게 드러내주는 의미를 가진 말이 다른 나라에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다는 것입니까? 사랑이 많은데 어느 정도까지 슬퍼지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이해됩니까? 슬퍼지기까지 사랑이 가는. 그런 사랑을 해 본적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 슬프면 말을 안 하겠는데 그래서 삼류밖에 안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슬퍼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슬프다는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인데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인 사랑과 자비 속에 그것이 들어가느냐? 그것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바로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만약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시지만 논리에 풍부하신 하나님이셨다면 여러분 설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해보세요. “왜 그랬어.” 그러면 핑계 댈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주님이 모르고 넘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 왜 그랬어?” 그러면 계속해서 어디로 가요. 그러면 계속 밀려서 마지막에 여기 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쉽게 얘기하면 논리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앞서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하나님이 지배당하시면서 그 지배 하에서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의 가슴에 가장 와 닫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긍휼,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딱 대하실 때 그 때에 우리의 모든 죄 지은 외상 장부가 생각나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네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그러면서 우리가 느끼는 그 죄로 말미암는 그 고통, 그 아픔을 주님이 연민으로 한꺼번에 느끼시는 그렇게 우리를 대면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우리는 살 때보다 살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한 번도 우리는 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감히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늘 울고, 애쓰고, 눈물을 닦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에 완전히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기만하며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도저히 나도 내 인생을 용납할 수 없고, 내가 내 무게를 감당할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내가 가치가 없는 인생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 지점에서 무릎을 꿇고 “그러나 하나님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 그 지점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을 바라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논리로 다가오지 마시고, 자비로 다가오시고, 우리를 책망으로 다가오지 마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그 시점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혹신 선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즘 간증 보면 새마을 성공수기 같은 간증들 많잖아요. 자기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이 간증의 대 태마입니다. 나는 얼마나 약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그래서 간증이 끝나면 간증을 한 사람이 아니라. 그 간증은 그 사람의 그 위대한 하나님을 나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하나님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듣기를 원하는 갈망 속에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우리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니까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내 연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 그렇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 연약한 대서 강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 나는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따라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의 턱걸이를 하면서 소망을 가졌다. 낙망을 가졌다.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그러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는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삶, 그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시 하나님이” 가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래서 모든 죄인들이 “그러나”에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위해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으면 세상 끝날 까지 “그러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풍성한 “그러나”의 생애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