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녹취자: 김은영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벌써, 깊이 있는 팔복 5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절반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거 아세요? 한 7, 8년 동안 부르짖었던 욜로(YOLO)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당신 생애에서 당신 생애는 한 번뿐이다. 그러니까 잘 즐기며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욜로) 유행이 지금 사라져가고 있는 것 아십니까? 이제 더 이상 웬만한 사람은 욜로를 부르짖지 않습니다. 욜로 이후에 무엇을 잡아야 할 것인가? 아직 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팔복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적실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50년에 걸쳐서 졸업생들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일단 지금 현재로 연 소득 9천 불이 넘어가면 더 이상 수입이 행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놀랍게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다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가족관계, 친구 관계,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봅시다. 그럼 좋은 관계가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한 번 태어났는데 모든 사람하고 최악의 관계만 맺으면서 살아가야지.’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모두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관계라고 하는 것은 사람 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유난히 재수 없게 이상한 사람들만 만났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불행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훌륭한 사람만 만나는 사람도 없고, 날도둑놈들만 만나면서 평생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그런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사람 됨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사람이 참 좋고 만난 사람도 너무 좋으면 훌륭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또는) 나는 좋은 사람인데 저 사람이 안 좋으면 내가 힘든 관계가 되고, 또 반대로 저 사람은 괜찮은데 내가 안 좋은 사람이면 저 사람을 지옥처럼 만들게 됩니다. 결국 행복은 사람 됨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이 욜로 (이후의) 시대의 대안이라고 생각됩니다.
공과를 하기 전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책이 나왔습니다. 광고에서 보셨겠지만, 광고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예뻐요. 그리고 여기가 헝겊으로 돼 있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제 책을 100권 가까이 냈는데 이 책만큼 예쁜 책이 없었어요. 정말 예뻐요. 그리고 아주 그립감이 매우 고급스러워요. 그리고 이 책은 205페이지인데 이게 289페이지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양도 뭐 많이 변경하지 않았지만 어떻든 그렇게 됐어요. 그리고 이 책을 제가 18개월을 봤습니다. 그래서 현상금을 걸겠습니다. 여기서 오자가 생긴 거를 찾아내시는 분들에게는 구하기 어려운 열린 공간 소금빵 하나씩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찾으셔서 여기 우리 원고실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더 기쁜 소식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책 공과 공부 끝나고 30분 여유를 드릴 테니까 30분 안에 이 팔복 책을 여태까지 공부하면서 읽은 거에 대한 리뷰를 써서 홍보실로 보내시면 그중에서 10명을 추첨해서 이 책을 주일날 받아 가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괜찮겠죠? 보내드리진 않고요. 열린 교회에 와서 찾아가시게 그리고 개별적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5장 의에 줄이고 목마른 자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오.’라고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몇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란 무엇일까? 두 번째,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 번째, ‘복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그 복이 도대체 무엇일까? 네 번째, ‘배부를 것이며’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렇게 네 가지 정도로 축약이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앞 절부터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다음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다음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다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네 개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온 복이 온유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자의 마음의 특성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특성은 결코 나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온유한 자의 부드럽고 친절한 마음속에 있는 열망(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오늘날 정의에 목마르다는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수의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속에 어떤 원한이나 미움 그리고 복수심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의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과 정의가 얼마나 하나가 되기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이 두 가지가 양립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의 마음의 성품은 온유하면서도 동시에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마음은 하나님 백성의 마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는 건 무엇이냐면 간절히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강렬하고 절실하게 열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배고픔과 목마름은 대체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배는 고프지만 좋은 경치를 보여줄 테니까 위로로 삼으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목마르지만 너를 모든 사람에게 영광을 받게 해 줄 테니 그것으로 목마름을 대신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면 그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욕망을 주리고 목마름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어봅시다. ‘신자에게는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배고픔과 음료로 해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34에 보면 다들 이제 제자들이 뭘 어떻게 먹을까 하고 고민을 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시는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그것으로써 나는 배부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육적 양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가지고 말함으로써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육신으로 배고픈 것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한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민감하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겠습니다. 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의는 그리스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디카이오오(11:43)가 원형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그리스어를 많이 알면 영어 단어를 거저먹고 들어갑니다. 굉장히 유사한 단어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카이오쉬네는 의입니다. 그러면 의가 무슨 뜻이냐 하면 책망받을 것이 없는 무죄한 상태, 그래서 예를 들자면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서 정적들이 다니엘의 모든 것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의로운 상태입니다. 그것은 옳음 혹은 허물이 없음인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마태복음 20:19에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예수를 처형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의로운 사람을 해롭게 하면 그 해를 자기가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입니다. 그래서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할 때 그 옳은 사람이 예수였습니다. 그 옳은 상태, 그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도표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데 이것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품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복을 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현재이고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동시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는, 현재적으로 복이 있는 조건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겠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의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이 여기에 이렇게 속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좀 더 넓은 의미고 이것은 아주 고유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건 이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옳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밥을 먹습니다. 그때 밥그릇을 들고 먹나요? 아니면 밥그릇을 땅에 놓고 숟갈로 먹나요? 후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어려서 배울 때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으면 재수 없다. 복이 나간다. 경망스럽다. 이런 책망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보면 아무리 세대가 바뀌었어도 젊은이들조차도 밥그릇을 들고 먹지는 않아요. 그것은 아주 경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문화가 반대입니다. 일본에서는 밥그릇을 반드시 손으로 들고 먹어요. 그런데 놓고 먹으면 굉장히 거만하다고 해석을 합니다. 정말입니다. 믿어도 됩니다. 이것은 제가 일본 목사님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가 일본에 갔을 때도 여러 번 갔는데 한결같았습니다. 펄펄 끓는 라면 그런 것은 못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되게 뜨거운 솥 밥 같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너무 뜨거운 것을 전 세계에서도 유별나게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솥 밥이 좋거든요. 그러니까 솥 밥 같은 것은 이렇게 손에 들고 먹을 수가 없이 불가능합니다. 펄펄 끓는 뜨거운 라면 같은 것은 특수 용기가 아닌 한 들고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공깃밥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규동이라고 드셔보셨죠? 원래 일본 사람들이 펄펄 끓는 뜨거운 밥에다가 안 합니다. 한 번 일본 갔을 때 좀 놀랐던 적이 있는데 밥공기하고 계란을 줍니다. 그래서 종업원한테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냐 그러니까 ‘그냥 깨뜨려서 밥 위에 얹으시면 돼요. 그리고 이렇게 슬슬 비벼서 드세요.’ 그러는데 난 당연히 밥이 뜨끈뜨끈하겠지 이랬는데 밥이 싸늘합니다. 뜨거우면 이렇게 깨트려서 밥을 펼치고 속에다 집어넣고 덮어놓으면 다른 거 먹을 동안에 익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비린내 나서 어떻게 먹나 그러나 그래도 한번 해보래요. 맛있을 거래요. 그래서 깨뜨려서 차가운 밥에다가 넣고 비볐습니다. 천천히. 그런데 중독됐습니다. 3일 동안 먹는데 집에 와가지고도 몇 번을 그렇게 해 먹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밥에 할 때는 계란이 익어버리는데 찬밥에다가 계란을 집어넣으니까 이것이 익지를 않으면서 밥알 속으로 이 계란 성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기에 ‘아이고 그걸 어떻게 먹어.’ 그러죠? 한번 해보세요. 세 번 먹기 전에 중독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참 비비면서 기다리면 미끌미끌한 성분이 싹 없어집니다. 아무튼 일본 사람들이 손으로 들고 먹는 것이 예의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그 기준을 어디에다 정할 것인가? 우리가 ‘어떤 행위가 옳다.’, ‘옳음이 의다.’라고 할 때 그 기준을 어디서 정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냐면요. 하나님의 말씀 그러잖아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두 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율법, 하나는 복음입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확히 말하면 율법과 율법에 부합한 상태, 더 넓게 말하면 율법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상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르친 다음에 반드시 윤리를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면 그게 곧 그 안에 이미 윤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이 율법에 부합한 상태라고 한 것은 구약의 개념에서 보면, 당시에 신약이 없으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상태, 그것이 바로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다음이 은혜에 덕입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얻는 의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다음의 시편의 기록자들이 이 개념을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면 다윗도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을 때 가장 가슴 아파하고 염려했던 것은 자기가 이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악인들 중에 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다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용서해 주심으로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으로 충분했다면, 다시 말하면 이것으로써 의가 충분했다면 계속 그렇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또 다른 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3:21에서 또 다른 의가 나타났으니 하면서 새로운 의를 말합니다. 그 의는 율법과 대조되는 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율법적 의라고 이야기하고, 존 오왠 목사님은 이것을 복음적 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이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이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다음에 좁게 보면 이 안에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2번은 이제 1번 2번 3번이면 2번은 3번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두 개가 신학적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명쾌하죠?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하고 이것 두 개만 이야기하면 사실은 이런 구약의 얘들이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 개로 나눠서 설명하면 명쾌해지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어떻게? 이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능력이 안 됩니다.
최근에 F-16K 비행기 한 대가 추락했습니다. 추락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면밀히 조사를 했더니 볼트 하나를 빠뜨린 것입니다. 빠진 지도 모르고 여태까지 운영한 것입니다. 십 년이 넘도록. 끝까지 규명해 가면 공장에 나올 때부터 그 비행기만 빠진 게 아니라 그 기종이 전부 다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누군가가 실수를 했을 것입니다. F-16K의 비행깃값이 얼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F-35가 한 1200 정도 되고 F-15K도 1,000억은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잘못했지만, 그것을 변제할 능력이 있을까요? 월급을 차압 붙이면 아마 10대에 대물림하면서 갚아도 못 갚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그런 것을 무한대로 확대해보면 인간이 죄를 짓지만,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형벌을 내리기는 하겠지만 그런다고 살인죄 같은 경우 그 사람을 아무리 한 번 죽인다고 해서 죽어 난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이태원 압사 사건 때문에 지금 계속 국정조사를 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만 허무합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제가 보기에 사형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또 설령 유죄 판결을 받아서 복역한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인간 세상에서도 자기 죄를 짓지만 사실 그것을 갚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자기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이 대신 죽으신 십자가로 획득하신 그 의를 믿는 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냥 그 대가로 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신 그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의의 전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전해지는 것인데 전가, (즉) 의의 전가입니다. ‘너의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지 마라.’라고 할 때 그 전가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보면 ‘죄인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 이런 명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죄인이면 율법을 지킬 수가 없고,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인이면 율법을 지킬 수가 없고 만약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인간이 지금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과도기적인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유일하게 획득하여야 할 의는 이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돱니다. 이것에 대한 감사로서 우리가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생활입니다.
그다음에 2번입니다.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 이것은 여러분들이 거의 외워두셔야 할 정도의 명문입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중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줄을 칠 테니까 천천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이 그분께 참여하여 의로워지듯이 당신의 지혜에 참여하여 지혜로워지는 분이 아니시다.’
자 여기부터 해설하겠습니다. 이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성도 무한하셔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아, 내가 이런 존재였구나.’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법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자신에 대해서 다 알고 나면 재미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앎도 무한하신 것입니다. 다시 도표로 돌아와 보세요. 그런데 인간의 지성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할 때는 그분께 참여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분께 참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내가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시를 통해서, 조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당신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그러나 정의에 관하여 말할 때는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의로우신 그 정의뿐만 아니라 불 경건한 인간을 의롭다고 해 주실 때에 그에게 부여하신 정의도 하나님의 정의라고 한다.”
좀 어려워요? 설명해드릴게요. 잘 들어보세요. 제 설명을 듣고 나면 명쾌하게 얘기해 드릴 거예요. 이제 지혜는 이해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지성에 참여함으로써 ‘아 예전엔 몰랐었는데 내가 이런 존재구나.’ 이렇게 되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지성에 참여함으로 진리를 알게 되고, 그래서 지혜로워집니다. 그렇지만 정의는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의로우시잖아요?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의로우시므로 하나님의 정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롭지 않은 인간입니다. 그것이 불 경건한 인간이라고 했는데 이런 인간을 이렇게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불 경건한 인간인데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혹은 칭의를 통해서 이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보면 간음죄를 저지르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해서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불 경건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을 하나님이 악인 중에 하나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너는 의롭다 이렇게 인정해 주시고 의인의 반열에 세우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정의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정의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을?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를 그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다윗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다윗의 정의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라고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셨나이다. 이렇게 많이 나옵니다. 그때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은총에 덕 입은 의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사실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우리를 여겨주신 것, 그렇게 해서 부여하신 정의, 그것도 하나님의 정의라고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도다.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이것은 제가 직접 사역을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잘 보세요.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그랬잖아요. 그럼, 여기에는 뭐가 포함된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율법에 흠잡을 데가 없는 상태 그 의, 율법적인 의와 그다음에 두 번째 의, 복음적인 의,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의 의는 우리가 완전하게 얻을 수가 없으니까 결국은 이 복음적인 의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세계 속에서 펼쳐지고 그 의가 그의 은총에 덕 입은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용서받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 그것에 대해서 의롭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의 두 영역으로 나눠서 얘기할 수 있는데 자기 안에서는 거듭난 신자 안에서 생겨난 의에 대한 목마름. 이것은 자기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회 안에서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살고 있는 곳은 세상인데 정체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육으로는 세상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나라가 육의 나라를 지배하게 되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목적은 세상이 주께 돌아와 순종하는 땅이 되도록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애통함 이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만족은 두 가지인데, 현재적으로는, 추구하는 자는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만족을 누립니다. 왜? 내가 의롭지 않은데도 하나님이 은총으로 나를 의롭게 덕 입혀주셔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또 다른 사람 안에서 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마음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만족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우주적으로 실현될 때 그때 우리는 한없이 즐거워하겠죠?
마지막 구절을 읽어봅시다. “인간과 만물은 그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최고의 복, 최고의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도 한때는 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의를 위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정욕을 따라 살던 나그네 같던 우리를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은혜를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힘을 주실 것입니다.”
1번. 디카이오쉬네. 책망받을 것이 없는 무지한 상태. 옳음. 허물없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율법인데 이제 복음을 통해서 획득된 의도 똑같이 디카이오쉬네라고 부릅니다.
그다음 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봅시다. 율법에 부합한 상태. 은총에 덕입은 상태. 구속의 은혜에 덕입은 상태.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의가 실현되어야 할 두 방향을 설명해 봅시다. 자신 안에서. 사회 안에서.
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누릴 종말론적인 행복에 관해 설명해 봅시다.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성도들은 최고의 복, 우주적이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5번. 의를 추구하는 자들이 누릴 현재적인 만족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신령한 영혼의 만족이 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평화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 안에 이룩되는 의 때문에 누리는 만족이 있습니다. 확장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니까 가보지도 못한 나라, 반대쪽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많이 받고 은혜를 받는다고 했을 때, 거기에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로 행복하게 사시고, 팔복 열심히 읽으신 소감을 이 책을 읽었어도 상관없습니다. 이 책을 이번 주에 그 지난주에도 광고가 나갔지만, 이번 주에 혹시 이 책을 교회에 오셔서 구입하게 되면 이 책 읽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SNS에다가 리뷰를 올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참 생명의 말씀사에서 이 책을 출간했는데요. 이 책 사시는 분들에게 3천원짜리 굿즈를 드린답니다. 여태까지 드린 것 중에 최대인데 아주 예쁜 파우치백 3천원짜리를 준비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떨어지기 전에 yes24나 교보에 들어가서 주문하셔서 할인도 받으시고 또 많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책 광고해서 미안합니다.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