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르심과 중생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녹취자: 허혜숙
오늘 제 6장 부르심과 중생입니다. 주제 성경구절 인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아멘.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바는 현대인들이 정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절망적인 존재로 묘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되는데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긴 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선에 대해서 설교 속에서도 많이 논의를 했지만 굉장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국제적으로 돌아가는 정세를 한 번 보겠습니다. 미국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하고 북한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북한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한국 사람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서로 다릅니다. 한국 안으로 들어오면 돈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이 다르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도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심지어는 교육받은 계층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의 계층도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는 말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것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이렇게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냐?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어쩜 세상이 이렇게 선하냐? 세상이 어쩜 이렇게 질서 있고 아름다우냐! 이렇게 감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빈 플랑킨과 같은 철학자는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냐고 묻는 그 질문 자체가 유신론적인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원래 좋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들이 실존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 이 자체가‘카오스(무질서와 혼돈)’가 정상적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다. 당연하지 않느냐? 왜? 힘도 없고 질서도 없으니까 모든 것이 무질서한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니냐? 오히려 모든 것들이 질서를 가지고 있는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 사실은 근대에 들어서 인간의 관점 자체가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일부이고 뛰어나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사물들을 층차 대로 만드시고 인간은 바로 그 적절한 위치에 있으며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몸으로는 큰 개 한 마리에 지나지 않고 나귀만도 못한 덩치이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내가 없다면 세계의 의미가 결정되지 않을 정도의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정도를 가지고는 만족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간관을 오늘날 현대의 세속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간관에 동의를 만약에 안 한다고 하면 제대로 된 인간관을 가져야 하는데 그 인간관을 가지면 다른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자연과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위치를 정할 수 있느냐? 그것을 정할 수 있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인류가 이렇게 불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확실하게 장담하건대 날이 갈수록 불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하고 폭발적인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질문명을 우리들이 거부하면서 살지는 않되 적절히 마음에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때부터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런 것들을 가지고 강의를 하게 된 것도 전부 다 물질문명의 발달이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용해야 할 것이지 누려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내가 이 재산을 가지고 있고 이 물건을 소유하고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내가 무엇을 더 높은 상위의 목적에 도달할 것인가를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사실 제가 하는 모든 강의가 거의 유언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는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공부라고 하는 것은 수학문제 푸는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이번에 대입에 나오는 킬러 문항이라고 봤습니다. 그중 몇 문제를 봤는데 수학은 다 잊어버려서 모르는데 국어나 이런 것들을 보는데 해결에 대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도 해결에 대한 것을 많이 읽었는데 전혀 못 풀겠습니다. 30%는 감이 오는데 나머지 70%가 감이 안 왔습니다. 그런 문제를 내는 이유가 뭡니까? 개천에서 용 안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는데 그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느냐?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가 그 이야기를 읽고 혼자서 뱃살을 잡고 뒹굴며 웃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뜻 우리 모두 이해하시죠? 이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적인 법칙에 잘 안 맞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여기에 분명히 뒀는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는데 이것을 젊은 아이들이 어떤 때 그 말을 쓰는지 감은 잡았는데 ‘귀신은 곡할 놀이야’ 그런데 여러분 웃잖습니까? 이것을 젊은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도 안 웃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직까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20대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안 웃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편지를 받았는데 어느 남학생이 편지에 ‘우리 사구어 볼래?’ ‘나 사구기 싫어’ 그런데 여러분 웃는데 집에 가서 여러분 자녀들한테 이야기 해보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아십니까? 영상하고 핸드폰만 보고 책을 안 읽는 것입니다. 책을 안 읽으면 사유의 바탕이 안 생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선이 무엇이고 인간에 대한 관점이 무엇이고 이렇게 세 문장만 되면 머리가 뻐근해지면서 아무것도 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말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신앙교육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맡긴다?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사유를 하게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애들이 울면 핸드폰을 휙 줘버리는데 실리콘 밸리의 사장들의 자녀와 손자들은 핸드폰 안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벌어먹고 살면 되지 않냐? 그러면 뭐 합니까? 인생을 사는 것이 그것이 다가 아니잖아요? 인생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인간에 대해서 성경을 굉장히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을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견해가 비관적이면 비관적일수록 하나님에 대한 낙관이 제시될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스위니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셨는 데 여러분들 이 시대에 수이니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은 특권입니다. 지금도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가서 브뤼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저 같은 인맥이 있으니까 불러온 것이지 특권입니다. 어쨌든 이번에 본인이 미국에서 크리스찬 페이스에 대해서 아주 탁월한 책을 쓰셨습니다. 출판 전에 미국에서 출간하는데 왜 제 추천서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추천서를 써 주면 영광이겠다고 해서 써서 어제 저녁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분도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과 에드워즈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타락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타락한 것이 캄캄한 밤이었다면 그런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어두움을 가르고 작렬하듯이 폭발하는 불꽃놀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렇게 비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낙관주의가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그림을 보겠습니다. 부르심입니다. 인간의 반응이 먼저냐 하나님의 일하심이 먼저냐 이것입니다. 이것을 시간으로만 재지 말고 논리로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범죄 한 이후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이 몸이 죽었다는 것은 완전히 숨을 쉬지 않고 맥이 끊어진 상태로 썩어간다는 뜻이지만 영혼은 불멸의 존재이니까 그런 식으로 죽음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 죽었는데 죽었다는 의미는 스스로 하나님을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활기와 활력을 잃어버려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능력이 없나? 아닙니다. 도처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그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구속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간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성령님이 인간의 마음에 부르십니다. 어려운 말로 소명, calling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전도의 말씀이 첫째는 외적인 부르심을 통해 전해지고 성령의 내적인 부르심으로 그 말씀이 죄인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두 개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두 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부분을 외적 부르심으로 이야기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을 믿도록 설득하는 진실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외적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갑시다. ’이것은 외적 부르심의 요건에 충족하지 못합니다. 최소한 사영리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 정도 아니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어서 인간이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하십니다. 이런 정도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갈 때 이것을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끊임없이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마음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은 그 외적 부르심의 메시지를 이 사람이 듣고 생각하게 해서 성령님이 그 말씀의 의미를 이 사람의 마음속에 불을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외적 부르심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다면 전도지 십만 장을 돌리면 십만 명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전도지를 받고 교회에 오는 사람이 1만 장을 돌리면 한 명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로 해도 그것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부르시는 것은 유효합니다. 반드시 그 사람이 그 부르심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게끔 하시기에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적 부르심, 내적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 요약 되어 있는 것은 거의 머릿속에 외워둬야 합니다. 제가 사실은 서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까지 일곱 권을 쓰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 한 권밖에 못 썼는데 그래도 이 한 권이라도 기독교 신앙에 뼈대를 잡아주는데 많이 이바지한 것은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많은 대형교회에서 교리반에서 이 교제를 쓰고 있는 것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적 부르심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첫째는 도덕적 설득의 방법으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쓰레기야’ ‘너는 개 XX야’ 이런 식으로 욕을 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외적 부르심을 다 듣고 나면 마음에 설득이 되는데 아, 내가 비참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는 선하지 않구나, 그리고 나는 행복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참한 것이구나, 라는 것이 설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득은 사실은 이성의 설득이 아닙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야 말로 진짜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직관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하고 몇 시간을 토론을 해도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하시면 한 순간에 하시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좋게 믿음 생활 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우리 교회에 나채연 집사님이라고 안수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26년 동안 멸치도 안 드셨답니다. 불교의 한 종파를 믿으셨는데 진짜 열심히 믿으셨고 열심히 믿으시기 위해 가족들하고 그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까지 가셨다고 하니까 굉장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둘이 교회를 나오는데 얼마나 박해를 하는지 태워버린 성경책만 다섯 권이라고 합니다. 엄청나게 생활력도 강하고 강인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핍박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아들도 안수집사님이 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박해를 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내가 너의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보통 분 아니라고 해서 나도 보통 사람 아니다 한번 만나자, 일단 이야기라도 해 봐라, 집에 가서 아버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정방문을 오시겠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더니 한참 생각을 하시더니 아무도 안 데리고 혼자 온다고 하면 만나준다고 해라 그래서 갔습니다. 심방대원들은 저기에 세워놓고 혼자 들어갔습니다. 둘이 앉았는데 분위기가 범상치 않으셨습니다. 인사를 하시는데 불교 합장으로 인사를 하셨습니다. 들어가서 앉았습니다. 다 물러가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소득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도를 열심히 했더니 대답은 안 하시고 목사님이 이렇게 와 주셨으니까 내가 남자로서 약속하는데 이후로는 내가 우리 아들들을 박해하지 않겠습니다. 깨끗하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돌아오고 진짜 박해가 사라졌습니다. 말하자면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주쯤 아들한테 심각하게 그러더랍니다. ‘얘야 목사님이 이 누추한 곳을 방문해 주셨는데 동양적인 예의가 굉장한 분이셨는데 나도 답례로 교회에 한 번 방문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고 오셨는데 그날 마침 지하실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이었습니다. 이분은 자녀 넷을 택시 운전을 하셔서 대학 대학원까지 모두 졸업을 시켰습니다. 바퀴 하나가 아들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달렸다고 합니다. 저는 오신지 모르고 설교가 끝나고 바깥에서 인사를 하는데 이분이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새빨갰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딱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세상에서 나 같은 부모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 정말 제가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분에게는 그 날이 교회에 처음 나오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도덕적 설득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설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그렇게 하면서 어느 큰 교회 버스를 운전하셨는데 항상 시편 23편 테이프를 틀고 다녔습니다. 그쪽 교회 성도들이 아니 우리 교회 버스를 운전하면서 우리 목사님 설교는 안 듣고 남의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느냐고 하니까 ‘들어봐요 들어봐. 가만히 앉아서 좀 들어 봐.’ 하면서 틀어놓고 다니시다가 이분이 홀로 회심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진실한 크리스찬이 되셨습니다. 죽는 날까지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도덕적 설득의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의 의식세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생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데 내적인 부르심은 의식 세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뭔가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는데 예전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감동이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이 내적인 부르심은 유효하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하는 법이 없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중생입니다. 중생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말이 물과 성령이 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사람은 이 물은 세례라고도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세례 없이 구원이 없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 개혁 신학에서는 그렇게 안 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굉장히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심하면 조산원도 아이가 죽으려고 하면 세례를 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세례에 집착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물을 세례라고 해석을 하지 않고 정결의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정결하게 하는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성령의 역할이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과 성령이라고 했는데 물 그 자체가 성령의 비유이고 그래서 물 곧 성령 이렇게 해석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세례가 중요하긴 하지만 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입증하는 성경 구절은 아니다 이렇게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생이 무엇이냐? 외우셔야 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안에 심으시고 영혼의 주도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 이것은 논리적으로 사람이 살아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시간의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새로운 생명을 인간 안에 심으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하나님이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생명이라고도 부르고 이것을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사랑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랑?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이 이 안에 심겨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중생과 함께 심겨진 사랑은 약화될 수는 있지만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안 그런 사람도 많이 있지만 한 사람이 한 번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면 평생 못 잊습니다. 평생 똑같은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못 잊습니다. 잊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중생과 함께 인간 속에 예전에 없었던 당신을 향한 사랑을 심으시고 생명을 심으셔서 집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피지칼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힘으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중생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그 사람은 성화가 잘 이루어지는 환경 속에서 살면, 성화를 잘하면서 살면 이 사랑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런데 성화 생활이 신통치 않고 침체에 빠지고 죄를 짓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이 사람은 점점 더 식어져서 거의 없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무도한 사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중생의 필요성은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세계가 이루어졌다면 또 다른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이 중생을 통해서 혼동 속에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 중생 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아름답게 하나님을 설명해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 신령한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지루하고 아무런 관념이 없이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어두움은 생각과 총명 이것은 판단력입니다. 이것은 성향입니다. 여기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중생하지 못하면 삶 자체가 계속해서 오류에 빠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며 살게 되고 눈에 보이는 이 감각적인 세계가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눈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철 타고 가면서 말씀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아니면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사람들이 보면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처럼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혼의 어두움은 생각의 허탄함을 가져옵니다. 아무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일에 자기를 끊임없이 소비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총명을 상실하게 됩니다. 판단하는 능력을. 그래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이고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굳어져서 진리의 빛에 완강히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확신하는 사람들중에서도 심하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욕설도 서슴지 않고 기독교 자체를 증오합니다. 신의 존재 자체를 증오합니다. 웃기는 것은 여러분, 없는 것을 증오할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까? 신에 대한 증오심 자체가 유신론적인 사고입니다. 아니 있지도 않은 것을 왜 증오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미워합니다. 자가당착의 모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극단의 회의주의자는 극단의 믿음주의로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 1) 구원과 관련하여 외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168~169)
답 :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지시하여 사죄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는 진실한 권고.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진실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시하는 것.
문제 2)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특징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169~171)
답 : 내적 부르심이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유효한 부르심임.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부르시는 부르심. 도덕적 설득의 방식으로, 의식 세계 안에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함.
문제 3) 중생이란 무엇이며, 중생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71~175)
답 : 중생은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고 주도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며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남. 중생하고 나면 자신이 중생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최초로 느끼게 되는데 그것 첫 번 째 회심이라고 부르는데 구원에 이르는 길임. 모든 사람은 거듭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필요함.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에 대해 어둡고 캄캄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