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7장 (2019.08.25. 구역장 교육)
7. 기도와 말씀
거기 계시면 응답하시는 하나님 7장 (2019.08.25. 구역장 교육)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1-2)
녹취자: 이길순
옛날에 읽은 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물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를 열 수 있는 것은 금으로 만든 열쇠인가, 은으로 만든 열쇠인가?” (이에 대한 답은) 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은으로 만든 것도 아닌 거기에 딱 맞는 열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어야지만 정확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7장 전체의 요지입니다.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7장 (201.08.25 구역장 교육)
그러면 보겠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성경 구절입니다. 2절에 보면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이 끌려간 것이 약 605년경이었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은 586년입니다. 끌려가 그곳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으면서 바벨론의 왕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메데, 바사 이렇게 왕조가 세 번이나 바뀌는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 한결같이 그 나라의 중요한 대신으로 봉사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도대체 이포로 생활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을, 얼마나 궁금해 했을까요? 나라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잃어버렸을 때 이방의 땅에서 살면서 얼마나 괴롭고 그 나라의 회복을 바랐을까요? 그것을 예레미야의 말씀을 공부하다가 그 연수가 얼마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니엘의 기도 생활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1. 이방 땅에서 다니엘의 유일한 즐거움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2019.08.25._구역장 공과 교육 7)
다니엘은 그 땅에서 고관대작으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니엘의 즐거움일 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은 망한 나라를 위해서 분신자살하지도 않았습니다. 혹은 그 나라에 반역하기 위해서 결사대를 조직하는, 이런 방식으로 항거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유다 나라는 망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이 망한 나라를 통해서도 그루터기를 남기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 벌어지는 한 시대의 현상에 가슴 아팠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 우리의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고 당연히 이방의 나라에서, 우리로 말하자면 일본이 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 가서 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많은 정적들이 있었을까요? 아마 맘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함도 받고 왕의 부당한 명령으로 사자 굴에 던져지기도 하는 이런 아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다니엘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그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왕이 있는 곳을 향해서 말하자면 절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문을 열고 왕에게 문안하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으로 그 예루살렘, 하나님의 통치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세 번씩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전에 하던 대로..” 그랬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을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에 어인이 찍혔는데, 그것을 다 알면서도 이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남의 나라 땅에서 제상의 자리까지 누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상황이 바뀌었어도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상황이 바뀌면 아주 쉽게 신앙의 가치들을 양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러한 각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2.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책을 읽고 깨달은 바는 무엇입니까?
결국 다니엘이 예레미야 책을 읽고 깨달은 바는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이 끝난다는 것, 그리고 그 연수가 칠십 년이라 하는 사실입니다. 다니엘 9장 2절의 이런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깨달음이었는지 어느 해였는지까지도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황폐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의 모든 주권을 빼앗기고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진 그 황폐함입니다. 성전이 유린되어 버린 칠십 년 만에 남왕국 유다가 완전히 독립을 하고 나라를 재건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으로부터 포로들이 귀환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짓고 자치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 그것을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끝나는 시간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예루살렘 하면 성전, 성전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예배 이런 것을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말씀을 깨달아야 올바로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을 아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냥 살아가노라면 알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자식을 기르다 보면 자식은 엄마, 아빠의 마음을 영 모릅니다. 언제쯤 알게 됩니까? 자기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되게 고생을 하고 속앓이를 하다가 보면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들도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가 왜 이렇게 나랑 놀아주지 않을까, 왜 아버지는 주일이면 교회 갔다 와서 계속 이불 덮고 잘까’ (여기 있는 구역장들은 솔직히 그럴 시간도 없으니, 아이들이 그러죠? ‘평일 날에 아빠 얼굴 보기도 힘든데 주일날도 교회에 가서 보기도 힘드네’) 그러다가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생활을 해보면 그때 아빠 나이에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사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을 좀 빨리 깨닫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한 마디의 기도는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도 훨씬 낫습니다. 최고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그런 사람이 되고,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죽기 위해 기도하는 기도가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면 우리가 그 말씀을 깨닫습니다.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해하는 우리의 정신의 작용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조명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눈에 많이 들어와도 그것으로 우리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비춤으로써 우리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우리 안에 잘못 세워진 것들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가 무엇을 회개하고 내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막무가내로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받아내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구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점검하고, 자신을 깨끗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막혔던 하늘의 지혜를 얻게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학교에서 강의하는 수업을 듣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글 쓴 내용으로 봐서는 그 여학생은 신앙이 별로 없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괴로운지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고 결국에는 자신의 동맥을 면도칼로 끊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나았는데 새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자기 말에 의하면 그냥 연애도 하고 세상적으로 방탕하게 살면서 세상의 맛을 느껴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정말 별거 아니었고, 그러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수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잔잔하게 감동적으로 써서 제출했습니다. 그 여학생이 하는 자기가 가장 충격받았던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한 것,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걸까?’ 알고 보니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 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지 않는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기도를 배워가는 즐거움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결국은 아무리 인간이 몸부림을 치고 괴로워하고 그래도 냉혹할 정도로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길을 쭉 걸어오면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나이가 들면 인간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커다란 무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소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위대합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큰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무게를 젊어서는 모릅니다. 나중에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면서 사람으로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책이 한 권 나왔는데 바다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 사람이 다이빙으로 물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물 위로 떠올라옵니다. 밑으로 발을 젓고 손을 헤저으면서 들어가야지 밑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120m까지만입니다. 훈련이 잘된 사람들은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헤엄쳐서 120m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공기 중에서는 우리가 2분도 숨을 참기가 힘든데 물속에 들어가면 굉장히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닭을 죽일 때도 대기 중에서 숨 쉬는 구멍을 막으면 금방 죽지만 오리 같은 것을 물속에서 공기를 막으면 훨씬 오래 살고, 사람으로서 기록이 11분 30초인가까지 물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20m를 기준으로 해서 0이 됩니다. 거기서는 떠오르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데 120m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중력이 작용합니다. 막 잡아당겨서 밑으로 끌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중력에 의해서 인생의 저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가는 그런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못났다고 보면 안 됩니다. 다만 우리와 다른 상황에 있을 뿐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그런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깨달음이 오고 나면 기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너무 외향적입니다. 자기가 힘든 모든 것이 주위의 환경에 있다고 보고 그것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정돈이 되면 자기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하나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속임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깨닫고 나니까 다니엘은 그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금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슬픔을 뜻하는 것이며, 재를 덮어썼다는 것은 자신은 재와 마찬가지로 (원래 티끌이라는 말 ‘아파르’는 히브리어에서는)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티끌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이라고 되어있는데 원래 먼지입니다. 그 티끌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진정으로 너라는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티끌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준 영혼 때문이다. 네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그냥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소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런 구도를 모두 알게 된 것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때의 기도와 말씀을 깊이 깨닫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하는 기도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쉽게 생기지만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의 빛을 받으며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기도는 허공을 치는 것 같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시간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더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올해 들어서 읽은 책의 문장 가운데 가장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문장입니다. 이것을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가 자기 책에 쓰셔서 이 엘리엇트가 어느 책에서 이 말을 했느냐고 제가 물었더니 하도 읽은 지 오래되어서 본인도 잘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찾으면 어디서 찾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T. S 엘리엇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적었다가 구역원들에게 한번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읽는 순간에 무릎을 쳤습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의미가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어 나를 움직였는데, 그냥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자기가 예전에 살았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자신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신앙의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자같이 하나님 의지하고 살던 사람이 불신자처럼 되는 일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경험을 되살리고 싶은 것입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옛날에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뜨거웠는데, 옛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정말 꽃밭을 거니는 것 같았는데, 옛날에는 예배드리는 것이 나에게 말 할 수 없는 행복이었는데’ 그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일까요? 경험을 했는데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 경험을 살릴 수 있습니까?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최면을 걸어보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도 하고, 아니면 미친 듯이 기도를 하기 위해 육신적으로 뜨거워 보려고 애도 쓰고, 심지어 안 되면 은사집회라도 가보려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기도도 부탁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캐들어가자 경험은 회복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무엇과 연결이 되는가 하면 이해하기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경험했으나 잃어버린 사람은 이런 말씀의 비춤을 얻을 때,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 속에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 경험이 회복되고 다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동이 되지 않으십니까? 제가 금년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제 마음을 찌르는 문장이었습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캐들어가자 경험이 회복되었다.” 가슴에 새길 말씀입니다.
4. 예레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제가 보기에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흔히 많은 신학자들이 예레미야서를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 후서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고난에 넘치는 책이라는 점에서 두 개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왜 비운의 선지자였는가 하면 다른 많은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망한다는 것을 예언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망하고 그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죽은 후에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루살렘이 망한다는 것을 예언하고 두 눈으로 똑똑히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자기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선지자에게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정신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박국하고 비슷하지 않을까요? 나라가 망해서 무화과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포도밭에 소출이 없어도 무화과 열매가 없어도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세상은 타락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셔서라도 이스라엘의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 그루터기를 통해서 또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적 사랑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그냥 설명을 지나가고 여기를 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김에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이것이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을 보면서 부른 탄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탄식하다가 3장 22절, 23절이 나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이것이 번역이 조금 바뀌어서 “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성실하신 주님’ 그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또 다른 하나님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이 언약적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사하고 심판받은 황폐한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5. 어려움과 괴로움이 찾아올 때,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어려움과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계속될 때에 상황에 몰입함으로써 해결되는 경우보다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받아 적으라고 했던 말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은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일어난 일이 없어지지도 않고 만난 사람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상황 속에 뛰어들어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예레미야나 다니엘은 어려운 현실들 속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붙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은 끊임없이 요동을 치지만 진리는 그 상황 위에서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있는데 여기에 뭔가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근거에서 ‘너희는 어떻게 살아라’라는 계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입니다. 도는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하신 것이고 거기에서 수많은 계명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전부 다 바깥에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동의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받은 명령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전부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동의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것으로 인생의 문제가 모두 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내가 그렇게 살 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해결의 길은, 이것은(위의 말) 객관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주관적으로 이 도를,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 도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내 마음에도 좋아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이 두 개 밖에 없습니다. 객관의 문제와 주관의 문제, 이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화에 대한 교리들은 2번(주관)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가르침들은 1번(객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개, 1번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2번에서 자기가 충분히 그것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살 수 있는 의지의 힘이 있을 때, 지성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정으로 그것을 느끼는 이런 구조가 되어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고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모든 것이 더 복잡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예수를 믿으신 것 아닙니까?
6. 다니엘이 기도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전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책을 읽고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특별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았던 삶의 환경도 바벨론, 메데, 바사에서 아주 중요한 직책을 맡고 지냈다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특별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위치의 문제이지 그가 직면하고 있는 괴로움들은 유사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한 회사의 CEO가 되어서 겪는 괴로움이나 말단 직원으로서 살아가면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차원은 조금 다르겠지만 똑 같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니엘 9장 3절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저절로 되는 일이면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숨쉬기로 결심합니까? 아니면 저녁 먹기로 뜻을 세웁니까? 아니면 집에 들어가서 손을 깨끗이 씻기로 결단을 내립니까? 그런 용어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큰 결심 없어도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가 얼마나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기도의 수많은 방해 요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처하면서 그다음에는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런데 은총을 베푸는 응답이 옵니다. 다니엘을 향해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큰 은총을 받았구나,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가 이같이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큰 힘이 나도록 만듭니다. 작은 위로, 작은 격려, 사람에게 받는 것도 너무 소중하고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이진 않습니다.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이런 응답을 우리가 받는다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그래서 오늘도 교회에 성경공부 가르치려고 오면서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요동치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연약한 사람을 강하게, 그래서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을 힘이 나게끔 하나님이 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무엇이든지 이제는 순종할 수 있사오니 나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모두 바친 사람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눅 들고 좌절하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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