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기도와 회개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3-4)
녹취자: 김연희
오늘은 8장 기도와 회개, 회개할 때 기도가 강해진다. 라는 주제를 보겠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이야기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라고 나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까?
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시는 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들이 물에 빠져있습니다. 삶의 상황이 이렇게도 어디에서도 절망을 맛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시선 앞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습니다. 1번은 제가 읽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은 금식하였고 두 번째는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다니엘이 예루살렘의 멸망이 한 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70년이 되리라는 것을 예레미야의 서책을 통해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다니엘이 한 것이 금식이었습니다. 70년이 끝나면 “바벨론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이 말씀을 깨닫고 결국은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멸망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바벨론, 갈대아 땅 이들도 역시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폐허가 될 것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다니엘이 금식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이렇게 자신이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금식하게 된 이유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공동체 적인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결심했던 것입니다.
3. 깊은 기도의 세계를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로 인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깊은 기도를 막습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회개’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사랑이 변질된 사람이며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9장 1절과 2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갈라놓고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장 큰 담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E. M. 바운즈는 남북전쟁 시대 때에 군종으로 봉사했던 분으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퇴한 이후에도 하루에 8시간씩을 기도하면서 보냈고 이 사람의 책은 한 편의 시와 같이 이론서가 아니라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처럼 되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의 심장>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죄를 버리든가 기도를 중단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차갑고 형식적인 기도를 들으면서 악행을 일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사람을 고칠 때 그만큼 강해진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에 기도는 강해진다.’참 감동적입니다.
4. 금식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금식은 그야말로 음식을 끊는 것입니다. 육체가 활동하기 위한 그 힘을 음식을 통해서 공급을 받는데, 마시는 것은 물을 마시더라도 자신의 몸에 힘을 줄 수 있는 어떤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어떤 유익이 있느냐 한다면 마음의 죄를 끊고 정결하게 합니다. 금식 자체가 이런 걸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함으로 육체의 욕망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고 금식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우리 영혼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활기 넘칠 때에는 관심을 끌고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막 하고 싶어지던 일들이 기운이 하나도 없으면 하는 것이 싫어집니다. 근데 그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금식을 통해서 힘을 낮춤으로써 우리 안에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들을 통제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식을 짧으면 하루, 혹은 아침마다 금식을 한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끼, 한 끼씩 따로따로 금식을 해서 그게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삼일을 금식하는 것, 일주일을 금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열흘 심지어는 사십 일씩 금식한다고 할 때 그 것은 모두 자신의 육적인 것을 끊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게 하는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유익입니다.
그럼 설명해보겠습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다니엘이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이 내용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첫 번째로 금식을 하면서 제일 먼저 욕망을 저하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망을 저하시키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죄의 죽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커 보이고 하나님은 작아보이던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만이, 내가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으며 하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작용이 일어나면서 금식은 나름대로의 효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신의 영혼이 특정한 죄가 있을 때에 금식이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그런 것들이 특별히 발견 되지 않아도 마음이 산란하고 뭔가에 경건이 집중되지 않을 때, 그때에는 결국 분산된 마음에 자잘한 욕망들이 계속 끓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집중할 때에 마음속에서 기도의 불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육체적으로 막 무엇을 한다고 해서 기도의 열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육신의 욕망을 죽여서 마음의 산란함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때 자신이 의지하던 것들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968년에 소련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정보가 없어서 잘 몰랐지만 사실은 그 폭발사고가 연속해서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만약 한 번 더 폭발이 일어났다면 유럽 전체가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수 있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무시한 폭발사고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사람들이 그 속에 뭔가 원자로를 시험하고 있었는데 진짜로 제대로 된 시험을 하기 위해서 안전장치를 껐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했는데 여기서 사고가 일어나서 폭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불길이 1,000m 높이로 솟구쳤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1km입니다. 롯데타워가 550m입니다. 불기둥이 롯데타워의 두 배의 높이로 특정한 장소에서 하늘 위로 솟구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금방 꺼지지 않는 불길이, 그 불길을 타고 방사능과 오염물질들이 구름을 삼켰고 오염된 구름이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비가 올 때 쏟아져 내리는 데 모든 나라가 자신의 나라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염되어 갔던 것입니다. 얼마나 죽었는지 아직 통계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조종사들이 그렇게 계속 끓고 있는 롤을 봉쇄시키기 위해서 납덩어리를 떨어뜨리는 작업을 했는데 600명의 조종사가 동원되었지만 모든 조종사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은폐하고 계속 사람을 투입해서 사람들이 갔다 오면 죽고 갔다 오면 죽어 소위 예비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십 만 명이 동원되어 오염이 되고 죽었지만 얼마나 동원되고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를 한 이유는 그렇게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불기둥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러한 기도의 불꽃은 하나님을 향해서 집중된 가운데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속에서 그러한 불꽃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넓게 말하면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그런 가능성을 주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시고 신자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이 녹아지면 그렇게 치솟는 불꽃처럼 기도할 수 있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와 하나님 가운데 사이에서,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자신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하는 동안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일이 거의 없이 인생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 우리는 행복한가?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면서 기도 속에서 주님과의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토마스 보스턴은 영국의 청교도입니다. 이 사람은 후기 청교도인데, 이 사람이 금식의 유익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신앙의 참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 금식이다. 영적으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준다. 다시금 퇴보하는 것을 방지하고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금식이다. 시련의 때에 금식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그리고 금식은 죽음을 통과해야 영원으로 들어가는 일, 즉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죽음의 순간이 올 때 금식은 그런 모든 세상의 미련을 끊고 영원한 행복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준다.”
5. 다니엘이 조상들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기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가 모두 이스라엘 한 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자손으로 불리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 죄는 개인의 것인 동시에 또한 한 몸으로서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죄도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도 남의 것이라고 느낍니다.
베옷과 재라고 했는데 이 베옷의 의미는 죽음의 상징이자 슬픔의 상징입니다. 자신이 ‘죽음의 처한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절망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 앞에서 베옷을 입을 때에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재는 Ash인데 무엇이 타고 남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티끌입니다. 이것은 가장 가치 없는 것의 대명사입니다. 화려한 이 궁전이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이 궁전도 타버리고 나면 재가 되는 것입니다. 궁전을 태운 재와 초가집을 태운 재 사이에는 아무런 가치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 위에 있다.’ 라고 하는 말은 자신과 재의 동일화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아무런 중요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죄를 위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사람들은 이렇게 공동체의 죄악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경건한 에스라가 그랬고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물론 이 지도자들 말고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에스라 10장에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그 많은 죄를 짓고 타락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에스라가 울면서 회개하니 모든 백성들이 모여서 같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죄가 오염되듯이 이런 거룩한 슬픔도 사람을 감동시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잡혀왔을 때 왕의 상에서 나오는 것을 먹지 않겠노라 말했던 용기를 보더라도 이미 죄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소에도 알고 있었지만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이 정당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 그의 심판은 모두를 쓸어버리기 위해 복수하는 심판이 아니라 거기에서 새순이 돋아나듯이 남은 자들을 다시 살리셔서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는 계획을 보고 그 백성들의 죄의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구역의 식구들의 죄나 나쁜 점들을 짊어지고 기도한다면 아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기적은 이 산과 저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가장 놀라운 기적은 죄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6.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에 너무 잔인한 것 같고 비참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하신 것이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심판 받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잔인하고 비참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였습니까. ‘그들이 다 죽게 죄를 범하였나이다.’포로로 끌려온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공동체의 죄, 개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으로 완전하게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으니 진짜로 좋은 것에 분명합니다. 그 좋은 것에 나쁜 것이 들어오게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저자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랑한 결과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타락할 수도 있고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방종 모든 나쁜 것은 나 자신이 근원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인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그래서 우리 자신 때문에 나빠진 것에서 돌이켜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문자 혹은 의문이라는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진리의 길이 숨겨져 있다면 자유의지는 죄 짓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죄를 짓는 것은 아주 자유롭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예를 들자면 만약에 어떤 사람의 손을 어떤 사람이 강제로 들어서 옆의 사람을 때리고 이가 부러졌다면 그 손에게는 책임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항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집어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힘을 발휘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과 자유로운 선택을 격려하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인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좋은 것을 알아서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상당한 진리의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이것을 진정으로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정말 죄를 안 짓고 올바르게 산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죄를 짓는 것일까요? 똑같이 아주 자유로운 의지, 죄짓고자 하는 자유로운 의지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옳은 사람이 될 때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옳은 사람이 될 때의 차이는 무엇일가요? 불신자는 그렇게 해서 옳은 사람이 되어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 받을 것이 크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내려와서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잡고 사랑해야할 것을 사랑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똑같이 인간도 신자도 그 죄성을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이 명문이기 때문에 조금 더 보겠습니다. “행하여야 할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고 분투해야할 목적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뻐하고 사랑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행할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선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자유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짐으로써 노예의 상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선을 행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7. 다니엘이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으로 기도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자신이 너무나 하찮은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겸비’입니다. ‘겸손하고 낮아진다.’라는 뜻입니다.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알고 자신은 그분의 은총으로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공과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배워서 구역 식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세우게끔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