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7. 구역장공과교육2
2016
게으름의 뿌리/자기사랑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잠 22:13)
녹취자:이경순
게으름 제2과입니다. “도둑이 든 날: 게으름의 뿌리/자기사랑” 잠언 22장 13절을 읽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사자가 길거리에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핑계 인 것입니다. 집안에서 뒹구는 사람의 게으름에 대해서 이 지혜 자가 누구를 통해서 체험했을까요? 가족들 아닐까요? 감히 왕 앞에 누가 게으름을 피우겠습니까? 또 자기 자신의 경험일수도 있습니다.
1. 예화의 직조인 본문말씀에서 게으른 자는 무엇 때문에 게으른 삶을 정당화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집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집 밖으로 나가야 되는데 나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나가고 싶지 않으니까 자기가 안나가야할 이유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계속 핑계를 대면서 결국은 하게 되고 안하고 싶은 것은 결국은 끝까지 안하게 되기 위해서 핑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사실은 해석의 능력에도 크게 작용을 해서 자기 자신이 이렇게 게으르고 싶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은 대개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기능을 게으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부지런한 모든 사람에게서 그런 것이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체를 한번 봅시다. 여러분이 이미 읽으셨지만 중국에 속담에 나오는 내용이라는데 출처까지는 확인은 못했지만 이미 일어나서 도적을 퇴치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밀려오는 잠속에서 더 자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젊어서는 참 이런 마음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요즘은 참 많이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회심하기 전에는 게으름을 좀 피웠던 같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맨날 나무라셨습니다. 어제도 새벽부터 계속 일을 해야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교리반을 했는데 진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너무 은혜롭게 집에 돌아가는데 알고 보니까 저녁을 안 먹어서 가는 길에 저녁을 간단하게 한술 뜨고 집에 들어가고 또 뭐 좀 할 일이 있어서 하고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시계를 일찍 맞춰서 단풍나무 그늘아래서 성경 읽고 음악 듣는 게 진짜 너무 좋아서 그러려고 했는데 아침에 벨이 울렸는데 죽어도 못 일어나겠는 것입니다. 정신으로는 ‘일어나라.’ 그러는데 몸은 ‘좀 더 쉬어라.’ 이런 속삭임들을 저만 느끼겠습니까? 여러분도 느끼시죠? 히브리어에 ‘아첼’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뜻은 ‘주저하다.’라는 뜻인데 즉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게으른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부지런한사람들은 묵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말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전도사일 때 교역자를 해봐도 진짜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하는 사람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교사회 모임 나온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진짜 말을 논리적으로 잘합니다. 결국은 그런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이라고 요새 그럽니다. 일하는 것과 자신의 삶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인데 사실 요즘에는 이게 뭐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는 뭐냐고 물어야 되고 이건 또 뭐냐고 우리는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일벌레처럼 미친 듯이 일만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그것의 의미를 가지고 목적이 연관되어야 합니다. 라이프도 결국은 개인의 삶이냐 돈 벌기 위한 삶이냐 이렇게 나누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런 삶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라이프는 우리는 뭐라고 봐야 되느냐? 세상 사람들이 소위 워라밸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우리들이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쉼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당연히 어두워지고 밤이 되면 인간은 자야 되고, 아침이 되면 깨고 깨어있는 동안은 무엇인가 노동을 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실현하면서 살게끔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쉬어야할 원인, 쉼의 원인이라기보다 쉬어야 할 요청이 무엇 때문인가 정당한 휴식의 필요한가? 누구든지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정신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비효율적입니다. 정말 그렇게 재생산을 위한 휴식인가? 아니면 게으름의 정적인가 이것을 우리들이 면밀하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냉정하게 검증을 하고 워라밸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2. 게으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왜 잘못된 것입니까?
‘게으름’은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식물이나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땅이 있고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분석해보면 이것이 게으름의 나무라면 이 뿌리는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안 해.”, “왜?” “내가 싫으니까”, “난 꼭 하고 말거야.” “왜?” “내가 하고 싶으니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정욕의 열매입니다. 게으름으로 정욕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게으르다고 그러지만 텔레비전에 빠져있는 사람이 일어나기도 싫어서 리모컨을 사용합니다. 우리 현대사회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전부다 자동으로 해놓고 그담에는 운동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때 미국에서 30년 전에 한국의 수입제품하나가 불티나게 팔려서 유관기업들이 아주 돈을 많이 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놋그릇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 그릇입니다. 동으로만 하면 너무 무르니까 동하고 주석이나 여러 가지 넣어서 놋쇠처럼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미국 주부들에게 인기를 끌었냐면 그것은 3일이나 일주일에 한 번씩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당에 놓고 계속 팔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서 체구 큰사람들이 헉헉거리면서 흙하고 여러 가지 세제를 넣고 막 문지르면서 반짝반짝 닦아서 사이트에다 올리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릇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들은 동양적인 그릇이나 문화에 대해서 약간의 동경심이나 호기심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게으릅니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가 텔레비전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 리모컨으로 자기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딱 고장이 났습니다. 한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게으릅니까? 아닙니다. 벌떡 일어나서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같으면 망가진 텔레비전을 끌어안고 전파상으로 뛸 것입니다. 그렇게 고친다던지 아니면 서비스센터에 의뢰해서 언제 오냐고 하니 내일 온다고 하면 지금 당장 가져가면 고쳐줄 수 있냐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내버려 두고 다른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러 가던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이들도 바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할 때는 바쁩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 입니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유익한 것들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데 이바지하며 살아 갈수도 있는 것이고 겉으로 볼 때는 매우 경건한 겉모습이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결국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심방을 갔는데 자매님이 심방을 받으면서 자기 직업에 대해서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목사님. 얼른 이 가게를 그만 둬야하는데 제가 진짜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무슨 가게를 합니까?” 했더니 비디오대여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직업이 결코 죄를 창조하는 직업이 아니고 예를 들자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찍는 것처럼 생산적인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당신을 여기 비디오가게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힌트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단골로 찾아오는 사람 모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마음에 허기가 져서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진짜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막 오는 것입니다. 이 자매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할 자신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디오가게 옆에다가 열린 교회 설교테이프를 세트로 비치를 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디오 빌리다가 “이거는 뭐냐?”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디오 보다가 재미없으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시편23편”을 빌려가고 “목자와 양”을 빌려갔습니다. 불신자였습니다. 시편23편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곤고하면 그렇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겉으로 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베짱이 안 맞으면 집어치우는 것입니다. 베짱이 맞으면 좀 해 보고 영광을 받으면 좀 해보고 별로 인정을 안 해주면 집어치워 버리고 이런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빛나간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사랑은 똑 바를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리고 똑바르면 그것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은 똑바르면 자기를 굳이 사랑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3. 자기사랑에 빠지지 않을 방법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전의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살던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 때도 그렇게 뭐 친구들하고 술 먹고 다니고 어울리고 그러는 것을 그렇게 썩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그런 형이었고 친구들하고 있어도 한두 명이 앉아서 깊이 이야기하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는데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기 좋은 것을 따라서 살고 이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러면 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결혼까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자매인데 진짜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바를 향해 회심을 했습니다. 맘마미아를 부른 아바그룹에 깊이 심취했는데 이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돈이 많으니까 아빠 돈을 갖다가 아바그룹의 레코드 컬렉션을 다 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너무 공연을 좋아하는데 한국에서 안하니까 아빠를 졸라서 미국에 가서 공연을 보고 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우리교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아바그룹의 모든 레코드 컬렉션을 불 질러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그 자체는 죄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싫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이렇게 미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소비하면서 어마어마한 것을 모아놓은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다 없애버렸답니다. 그분이 서울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 큰 집에서 사셨습니다. 그 간증을 저한테 직접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제가 아바 그룹에 거의 미쳤습니다.” 저도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자매는 다 불 질러 버렸습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것을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회심하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신자가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4. 노동자체는 형벌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의무 중 하나입니다. 노동이 우리의 육체적인 삶과 영적인 이유에서 축복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흔히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 짓기 전에도 노동은 있었고 죄 지은 후에도 노동은 형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노동은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도 역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맨 처음 아담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짐승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면 이 아담이 하나씩 하나씩 짐승마다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게 한 두 종류가 아니고 얼마나 노동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름 하나 붙이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이름하나에 모든 특징이 나타나야 되므로 이름도 없는 짐승들이 마구 돌아다니는데 이름을 붙여서 “돼지야.” 할 때 돼지가 오고 “개야.” 할 때 개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이 아담이 느꼈을 성취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므로 노동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노동은 단순히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 노동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의 직무에 대해서 노동을 하므로 내 존재의 가치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아주 작은 것을 하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전도사가 되고 나서 제일보람 있었던 일중에 하나는 내가 교사 모임을 잘 준비해 놓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차도 준비하고 간식도 준비하고 정돈을 깨끗이 해놓고 교사들이 왔을 때 “와!” 하고 좋아할 때 굉장히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런 성향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혹은 단기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난 다음에 주부로서 느끼는 뿌듯함 이렇게만 말하면 이것이 또 성차별이라고 합니다. 깨끗이 청소해놓고 느끼는 남편으로서의 뿌듯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디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동의 축복입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삶의 영역들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도로서 교회에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성도로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성도로서 부모가 되어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성도라고 하는 한 신분으로서 살아가는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우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노동을 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가치 있는 존재로 주님께 쓰임 받나 라고 하는 것들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화) 이번에도 또 자매 이야기인데 연봉을 그 당시에 20년 전인데 7천만 원 가까이 연봉을 받았는데 “내가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랬더니 연봉을 1억을 제시하더랍니다. 그게 1999년도 일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매입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집어치워버리고 연봉 3천만 원짜리 직장으로 옮긴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이렇게 뼈 빠지게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그리고 와서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결국은 주식투자하는 사람 돈벌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보람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고 직장으로 갔는데 월급이 거기서 주겠다는 연봉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기쁘게 살기위해서는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되는데 보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일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람입니다 그 보람은 사실 물질적인 보상보다도 훨씬 더 우리의 인생을 보람차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속에서 자기가 불완전함을 깨닫고 이렇게 나아가는데 이게 성화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마지막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게으른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의 그라운드위에 선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답답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운동장을 달리는 선수에게 휴식은 없습니다. 경기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울리고 인생이라는 운동장을 떠나게 될 순간까지 거기선 선수의 사명은 승리를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릴 때 승리의 환희를 느끼며 감격스럽게 우리의 인생의 감독이신 하나님과 포옹하십시오. 손흥민이 골인을 하고 막 달려가서 감독의 품에 뜨겁게 안겼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옵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누리되 궁극적으로는 이 목표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