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승리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녹취자: 김정규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승리입니다. 이사야 5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아무 편견 없이 그냥 조용히 읽어만 봐도 예수님의 생애를 그림처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53장이 위대한 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계시 중 이렇게 분명하게 메시야를 드러낸 본문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구약의 복음입니다.
1. 구약시대의 맥락에서 볼 때, 이사야 53장 12절 상반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는 영적 전쟁이었고, 그리스도 고난은 전쟁 그리고 부활은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존귀한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여기서 몫은 히브리어로 ‘חלק’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고 난 다음 각자 몫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승리의 분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있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무리들이 있습니다. (쓰러진 무리들은) 뿔도 나고 창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고난은 그리스도에게 영적인 전쟁이었고 그 영적인 전쟁이 부활로써 완전한 승리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엄격하게 나눕니다.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의 양 측면이기 때문에 두 개를 찢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즉시 예언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원복음 또는 원시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사단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 속에 원복음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계속 남자가 남자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관련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었지만, 그의 몸을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마리아에게서 후손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의미는 결정적인 죽음이며,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게 치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을 성취하게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고 받은 상급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후에 더 큰 보상과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온전히 드려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셔서 모든 만물을 그 앞에 무릎을 꿇어 그 분이 주로 불리게 됩니다. 원래 주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אֲדֹנָ֥י입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고 부활하셨을 때 모든 만물이 그를 주로 인정하여 그 발아래 복종하고 그분의 통치에 복속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도 그 상급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상급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무릎에 꿇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주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를 가리키면 1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온 세계를 성부를 대신하여 다스리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난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무덤에 장사지내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시고 통치자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성도는 넘어지기도 하고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으로 일생을 삽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동일할 수는 없으나 이런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여 그 영광을 함께 누리고 그 영광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꽃길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명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고 연약해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상급으로써의 면류관이 있기 전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똑같이 성도들도 이렇게 사명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으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면 그게 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최소한 2가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고난 때문에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길을 전혀 가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길을 걸어갈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도저히 상상되지도 않았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에 이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직업이 목사였습니다. 실제로 60년대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신랑감으로 목사의 순위가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저에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번듯하게 지어 놓은 교회도 별로 없고 학고방같은 2층 교회에서 교인들을 데리고 당시 저의 표현으로 코 묻은 돈이나 받으면서 사는 게 어떻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리도 없지만 내가 그런 일을 강요받는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리라고 고등학교 때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러주시지 않아서 죽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말이 씨가 된다고 그렇게 내가 하찮게 여기던 성직을 택했고 그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후 바깥에서 볼 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큰 싸움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저를 설교하게 했고 저로 하여금 책을 쓰게 했지 그게 아니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구역장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누가 대접을 해줍니까? 구역 원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구역장을 존경해주고 앉을 때 방석이라도 내줄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구역장을 10년째 계속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킨다고 하겠습니까? 그 속에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낸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2-34) 두 번째 유익은 하늘나라의 소망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육신도 쇠해가고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엄습하고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잠시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소한 2가지 유익입니다.
3. 메시야가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은 이유 2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의하면 첫째는 자신의 영혼을 버리심입니다. 여기에 영혼이라고 한 것은 ‘נֶפֶשׁ’입니다. 이것은 목숨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을 버리셨다는 의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죄인처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아들을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일들이 여기에 나옵니다. 몇 가지 사건이지만 첫 번째는 요람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있고, (이것은 삼병이어가 아니라 오병이어입니다. 떡이 5개가 있어야 합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사건이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외롭고 불쌍한 자들을 용납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였지만, 이렇게 하나님만을 섬겼고 인간들을 섬기셨지만 마지막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고백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십자가에서 겪으신 하나님과의 무서운 단절의 경험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자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과 68절에 이 예언이 그대로 응합니다. 침 뱉고 때리고 욕하면서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라며 이렇게 멸시를 당하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며 그 예언이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으나’에서 응한 것입니다.
4.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은 채 망각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신비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낮에 설교했지만 젊었을 때 예수를 믿으면 궁금한 것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오해받기 쉬운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셨을까? 만약 사람의 몸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 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을까?’입니다.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기 위해서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그분을 직접 볼 수 있게 하여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사역과 삶, 인격 고난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말고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히려 그를 심하게 꾸짖으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기꺼이 체포되어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남기신 인상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근데 이렇게 하면 이런 일-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고 심문받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이 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5.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받은 고난에 대한 오해를 겨냥하여 “그러나”라고 선언한 후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 밝힙니다. 그가 밝힌 진실 2가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범죄자 중 하나로 여김을 받아서 사람들의 멸시와 욕을 받지만 사실, 실상은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함이었고, 오히려 우리의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고 흠 없는 분이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지은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피 흘리는 고난을 당하신 것은 이분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는 당신이 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의 깊이를 보면서 우리는 이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생애 전체는 피와 땀과 눈물의 생애가 되었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의 삶은 온 통 피로 얼룩졌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고난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래서 생애 전체가 40일의 금식, 전도를 위한 기도, 사도들을 택하시고 변화산의 사건을 겪고 고난의 십자가를 맞이하시고 기도 중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이 모든 사건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생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잘 알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이 기도의 사역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계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고난을 가슴에 새기며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