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장 교회의 아름다움
녹취자: 김경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6장 ‘Chapter 1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은 늘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공부할 내용이 그렇게 양이 많지 않아서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보겠습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공부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봅시다. 1장에서는 사랑, 삼위 하나님의 교통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2장에서는 교회가 삼위 교통의 모상이라는 것, 3장에서는 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교제 4장에서는 사랑과 일치 그리고 5장에서는 그리스도와 지체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6장에서는 교회와 사랑의 확장으로 막판에 접어들었습니다.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회론에서 선교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전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랑의 측면에서 보면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신자가 되는 것이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의 중간 목표라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믿음과 사랑이 찢어지게 되면 그것은 참사랑도 될 수 없고 참 믿음도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의 이야기도 결국은 본성이 변화되어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에서 새로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에 맛보기로 보여주신 샘플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인간이 그런 사랑으로 한번 돌아가면 영원히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은혜를 받는 일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요약을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6장에서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다루게 되겠습니다. 1분단부터 읽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참 신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참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교회가 본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가 최고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위에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으로 교통합니다. 그 교통을 그대로 본떠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 사람이 원래의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이웃을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며 사랑의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철저히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이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을 끊어버리고 그리고 인간 하나를 고립시켜 놓고 보면 여기에 이렇게 맺어진 관계들이 단절되니까 이 사람은 의무도 사라지고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간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기에 가서 제가 누구인지 설명해보십시오. 나의 존재는 관계 속에서 설명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문제는 인간의 자기 이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찾고 자기 속에서 이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고 그 다음에 자기를 성찰하면서 관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둘의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 찼을 때 사람들은 그 사회를 보면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행복한 사회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사회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막 북 치고 예수 믿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만이 전도가 아닙니다. 존재로써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의무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것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이 되면 그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여러 가지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사람은 세상에도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때 그 이유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게 됩니다.
그 다음 2분단이 보겠습니다. 2-1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고자 하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격과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과 관련이 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하게 구원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하는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런 구원계획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합치하는 모습이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가장 잘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역사를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전달해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다.” 당신의 성품에 아주 찬란한 아름다움을 인간을 창조하고 구속하시고 완성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긍휼히 여기시는지, 그리고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방법은 교회가 참된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사람들이 왔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이상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움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신데 그분이 아름다우시니까 교회도 그분 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비록 잘 못살고 미끄러졌어도 교회가 그리운 이유는 교회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거기에 나는 미치지 못해도 내가 꿈꾸고 그리워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했고 또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다른 위격의 아름다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교회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길이 무엇입니까? 아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는데 이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말씀 속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 구원계획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하나님백성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찬란한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그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가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하게 빛나고 죄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악독하면 악독할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또 그들을 심판하셔서 올바르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죄가 없었더라면 심심했을 세계에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발산을 구원역사를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약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둡고 칙칙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3분단 읽으십시오. 신자는 그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첫째는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나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본바탕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부패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원래 의도하셨던 작품으로써의 그 영혼이 이 죄와 자기사랑이 들어오면서 뭉그러지는 것입니다. 참된 영혼이 아닌 것들이 섞이는 것입니다. 섞인 만큼 이렇게, 이렇게 섞여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활동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 어느 부분에 염증이 있어서 썩어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몸의 활동이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영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영혼이라고 본다면 이 영혼에서 마음이 나오고 마음이 사람을 어떤 행동으로 데려가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이런 결점들이 마음은 물론이고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꽉차있는 상태 이것이 나쁜 나무입니다. 여기에서 꽉 차있는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항상 일치를 이루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르게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름다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깨끗이 지워서 영혼에 잘못되게 들어온 것들이 모두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영혼으로 꽉 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변화가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이고 마음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신자의 영혼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완벽하게 아름다워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자의 영혼이 완벽하게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에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라도 동일한 신자라도 그가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에 있을 때와 아주 추루한 상태에 있을 때의 그 차이는 너무 큰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는데도 거의 짐승과 같이 사는 사람이 있고 또 은혜를 많이 받아서 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본성적 연합, 영적 연합,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본성적인 연합을 하나님의 형상의 맥락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설명 드렸지만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말로는 다 하나인데 한자로는 크게 이렇게 세 개의 낱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상(形象) 맨 위의 것은 조각 같은 것을 깎아놓은 신상을 이야기합니다. 형상(形相)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형상과 질료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써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물질들이 질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질료위에 형상이 작용함으로서 각각 다른 사물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드는 비유로 질료를 빵가게의 반죽으로 비유하는데 열린 공간에서 반죽을 잘해서 빵을 만듭니다. 반죽을 잘해서 숙성시킵니다. 그것을 잘라서 둥그런 빵도 만들고 네모난 빵도 만듭니다. 늦게 오면 다 팔리고 없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최고의 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빵을 반죽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납작한 카스텔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형상입니다. 그것을 여기에 도입을 하면 카스텔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질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써의 형상입니다. 질료는 이렇게 씁니다. 형상(形狀) 그 다음에 마지막 형상인데 이것이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쓰는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형상을 만들지 말고’ 할 때는 1번이고 ‘주님의 형상을 닮기까지’ 이것은 3번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맡기신 일이 매우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이렇게 독특하게 당신의 형상을 주셔야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알고, 하나님처럼 선택하고, 하나님처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이 형상을 따라서 인류가 창조됩니다. 타락할 때 이 형상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형상이 남아있고 그 형상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한 무지막지한 인간도 그가 행한 그대로 그에게 갚아주어야 한다는 식의 칼리오의 법칙이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법을 따라 재판을 받고 처벌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여전히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역시 그 존엄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잃어버린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유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은 이러한 절차를 거칩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통입니다. 이 교통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성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사랑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것들도 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회복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살아감으로써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모두 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신자는 그 아름다움의 일부입니다. 1분단 읽으십시오.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신자에게 요구되는 삶은 무엇입니까? 보편적인 질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부어짐으로써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변한 사람들이 사랑의 질서 속에서 이렇게 이런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돕고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져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간직하면서 한 사랑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이루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미끄러지지 않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사랑이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상황이 어렵고 많은 고난이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신자 안에 가득 있을 때 그때에 우리는 그 시련을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은 지위나 세상에서의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어떠한 처지에 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 사람의 행복 그리고 그 기쁨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아름다운 모습을 교회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2번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로써의 신자의 아름다움 2분단이 읽어봅시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통해 드러납니까? 신자 개개인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배를 드릴 때는 같이 있지만 흩어집니다. 흩어지면서 우리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보면서 ‘어떤 사회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개별적 신자들을 쳐다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는 다른 곳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불신자가 한 번에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그리스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로써 교회의 아름다움 읽어봅시다. 아름다운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은 무엇입니까? 영혼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은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비천해도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하는 선한 의지가 큰 사람이면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존엄하다는 이유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인간의 가치는 모두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악인의 가치와 선한 사람의 가치가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세상의 지위나 재물이 아닙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룹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이 그냥 걸어가는 길도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은 빨간 카펫을 깝니다. 세상은 그렇게 취급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 인간이 얼마나 영혼이 아름다운가? 그리고 얼마나 선한의지가 큰가? 하는 것입니다. 적으십시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인간 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다.’
신자는 교회의 아름다움의 일부다. 아름다운 영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지순의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영혼이 영혼다운 것으로 꽉 차있는 상태 그리고 그 영혼이 힘과 경향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이런 사랑이 지순의 사랑을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의 계명들을 사랑하는데 주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다음 영혼의 자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영혼 안에 경향성으로 존재하고 기능적으로는 인간의 애성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향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향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마음을 통해서 육체의 행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거듭날 때 사랑의 경향성이 생기고 이것이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 안에 존재하고 이것이 작용할 때 인간의 마음 안에서 육체를 사용해서 실제로 행동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행동과 현저히 다릅니다. 마음으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하는 행동과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하는 행동은 현저히 다릅니다. 왜? 마음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입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성향이 마음으로 나타나고 육체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을 돌이키라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마음에 반영되고 마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은 다 고려하지 않고 이것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겉은 회칠하고 속에는 썩어가는 뼈들을 간직한 무덤과 같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우리의 삶의 모든 행동들은 마음이 우리의 육체를 사용한 결과이고 그 마음의 흘러가는 방향은 우리의 영혼의 성향에 달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결국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마음도 사랑의 성향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순종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사랑을 이 세상에 확장시키는 것이고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