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
녹취자 : 장미연
어느 덧 제 10장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까지 왔습니다. 본문은 이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길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1. “그의 나라는 길 것이요…” 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192-193)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같아도 그의 날이 길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서 “그의 날” 이라고 하는 것은 수명입니다. ‘그의 날은 길 것이요.’ ‘그의 생명은 길 것이요.’ ‘그의 생애는 길 것이요.’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지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시고 그 다음에 승천하시게 됩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날은 길 것이요”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2. 부활의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194-195)
부활의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저는 어렸을 때 소위 ‘메멘토모리’라고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 확 밀려오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 같은 경험을 초등학교 5학년 쯤 경험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훨씬 더 먼저, 이어령씨 같은 경우는 7살 때 굴렁쇠를 굴리고 가다가 경험했다고 하는데 워낙 똑똑하신 분이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 느낌이 어디에 맞닿아 있느냐하면 ‘죽음’이라는 문제에 맞닿아 있습니다. 왜냐면 ‘죽음 이후에 뭘까?’ 그래서 어렸을 때는 죽음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후패해가고 병들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약해져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결국은 이것들을 마지막에 벗어버리고 다시 새 몸을 입게 된다고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고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얻었던 가장 큰 유익 중에 하나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이 삶이 모두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선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부활의 소망으로 표현이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의 소망으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로운 삶을 살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왜냐면 언젠가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고 부활은 곧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또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서 생명의 부활은 생명을 누리기에 적합한 부활을 심판의 부활은 심판을 받기에 적합한 부활로 떨어지게 된다고 하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사람이 넘어지고 그 다음에 다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이렇게 합니다.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걸어갈 것입니다. 이런 고단한 인생의 끝은 수시로 이런 부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넘어지고 걸어가고 하는 부심. 결국은 마지막에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을 아는 신앙인이고 그리고 낙원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한 날에 부활된 후에 우린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5-16) 이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참고 양보하고 이런 사람들은 좀 손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제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올바른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결국 관건은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해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것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정신없이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쁜 것과 정신없이 사는 것은 다릅니다. 바빠도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서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 회심한 청년들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죽기 직전까지 항상 동일한 원리입니다. 매일 매일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바울의 소망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노력한다고 부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 안이하게 살아서 알고 보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이런 일은 없도록 하자. 그래서 내가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나도 전심으로 성화로서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서 마지막에 부활의 그 날에 주님이 인장해주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의미입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잠시 모욕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고통이 와도 참는 것입니다.
3.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198-199)
첫째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뜻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속의 위업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동안에 당신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잘 사셨기 때문에 훌륭하게 죽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죽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의 생애를 초점으로 맞추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이게 무슨 떡이 아니라 요람에 아이가 누워있는 그림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먹이셨고, 고치셨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 때까지 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서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성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고 그다음에 섬기시고 병 고치시고 돌보시고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로 먹이신 것이 이렇게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고 또 이렇게 물고기와 보리떡이 다섯 개이고 고기가 두 마리여야 되는데 (개수가 안 맞습니다. 그림 그린 사람이 잘 못 그렸습니다. 내가 너무 디테일해서 이제 그리는 목사님이 괴롭다고 합니다. 떡과 물고기로 먹이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빵 안 먹었습니다. 원형으로 된 빵을 먹었지.) 이렇게 먹이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말하지만 하나님이 너희 굶주린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너희가 믿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한 번 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율법에서는 멀리하고 멸시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병자들을 어루만지시고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이었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뜻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4.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펑펑 울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덧없이 방황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204)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우리들도 사람을 다룰 때 그 아이가 아무 철없는 아이인지 혹은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청년인지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공부해라. 그럼 사탕하나 줄게. 공부 안 하면 사탕 못 먹어.’ 그렇지만 이제 철이 들었으면 네가 공부를 게을리 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학문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이상하게 소설책이나 허접한 것 보면서 독서한다고 어디 가서 자랑하지 말고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고전들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신앙으로 그것을 해석해서 탄탄하게 다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수많은 고전들에 대한 이야기들 있잖습니까? 『실낙원』, 『복낙원』 그런 것도 있고 그 다음에 『로마 제국의 쇠망사』라든지, (이번에 고등부 얘들 데리고 북 콘서트하는데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계획했는데) 그런 고전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비록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지만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보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를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부모가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해서 아이들과 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지성을 인도해야 합니다. 조금만 하면 됩니다.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에 많은 설교를 들었으니까 조금만 차분하게 들으면. 결국은 그렇게 펑펑 울었던 것은 신앙의 감정이지만 이후의 삶이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쭉 삶이 모든 것들이 정렬, 정돈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정렬이 되잖습니까? 군대 가면 핸드폰 다 반납해야하고 친구들 술 먹으러 나오란다고 전화하고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군인으로서 의무에 적합하도록 딱 질서가 지어집니다. 그렇게 질서 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도 그렇게 질서 지어져야 합니다. 그 내용을 상세하게 보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지만 사도 바울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허망한 복설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혼란시키느냐?’ 그래서 ‘잡아넣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서 갑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비로소 그 분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살리신 분이라면 죽으셔서는 안됐고 죽으신 분이라면 하나님이 살려내실 리가 없는데 이게 무엇인가?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이전에 자신의 삶의 모든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과 동포도 잃어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36살 되던 해에 춘천에 폭설이 와서 기도원에 갇혔는데 초가집에서 이걸 읽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신자의 목표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초점이 흔들리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기해야 할 교육을 받거나 올바른 생활을 안 하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때는 잠깐은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출을 해본적은 없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가출하는 아이들 보면 제일 신난 날은 가출하는 그 날입니다. 엄마 주머니에서 돈 빼오고 심지어 애들이 재봉틀 뽑아 가지고 도망가는데 청계천 가서 팔아서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고 돌아다니는 그 날은 너무 신납니다. 한 이틀째, 삼 일째 돼서 돈이 다 떨어질 때는 너무 불행하고 우울한 것입니다. 그 우울함과 괴로워하는 깊이가 첫째 날 기분 좋았던 그 높이를 상쇄해 버립니다.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딴 짓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살 때 잠시는 그것이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지만 즐겁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인생을 살려는 모든 태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이 먹으면 먹는 것도 없는데 자꾸 살이 몰립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밥을 안 먹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기 싫습니다. 왜냐면 본성에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점점 체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리반 같은 거 공부해서 (그때는 막 요즘은 좀 덜 그래요. 옛날에는 전투적으로 했거든요. 우황청심환 먹고 중간고사 보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제가 훨씬 못 되서 매주 시험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막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면 관둬라. 그대는 영원히 열린교회에서 교사나, 구역장은 절대 못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하게 해줘도 되는데 어쨌든 그때는 대차게 밀어 붙였습니다.)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막 열심히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5개월 약간 안 되고 4개월쯤 되는 교리반 동안에 1,500페이지씩 읽고 외워야 합니다. 모든 친구의 만남 끊고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좋잖아요. 그러면 눈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면 책이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련된 이 정신적인 체력을 가지고 꾸준하게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둬버립니다. 그 다음에 퇴화 돼버리는 것입니다. 교리반 마쳐놓고 그런 사람들이 바보같이 이단 협력 공부하는데 가서 고개를 디밀고 기웃 기웃 거리고 그런 쪼다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때에는 몰라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은혜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의 것이 이미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매일 매일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현재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다음에 현재적인 십자가의 감격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208)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다음에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 참 사람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달콤하게 들리지만 싫어하는 빚쟁이의 음성은 아무리 달콤하게 이야기를 해도 듣기 싫은 소리가 됩니다. 여학생하고 대화를 하면 즐거워도 엄마의 잔소리는 듣기 싫을 거 아닙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뭐가 결정 합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결정합니다. 결국 문제는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그 지식이 자꾸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마치 바위에 파도가 밀려오면서 깎여 나가듯이 그렇게 닳아져 나가듯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그 지식을 보존하게 하는 화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매일 매일 사랑하고 경건 생활을 하면서 그 사랑을 간직하고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고 이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 늘어납니다. 하나님은 공평 하십니다. 그 말씀의 은혜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삶의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말씀을 더 하시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