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2)
녹취자 : 박나리, 백지영
혹시 책 받으셨습니까? 아직 못 받으셨습니까? 받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다 받으신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대해 강론을 들었는데 나누고 수업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김동주 학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동주 : 강론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중요한데, 마냥 떠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서 더 있고 싶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두려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음에 김민아 학생 발표하겠습니다.
김민아 :저는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데, 저의 마음 가운데 경건에 대한 은혜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일주일간 세 가지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지혜의 말씀이 마음 가운데 맺혀져서 경건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 되기 위해 이 질문을 놓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살도록 나를 초청해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했던 일주일이었습니다.
이성훈 학생 발표하겠습니다. 카메라를 잘 보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성훈 : 지식과 종교라는 바퀴를 균형 있게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맞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동수 학생 발표하겠습니다.
우동수 : 강론을 듣고 나서 소감문에 썼던 것처럼 강론을 듣는 내내 계속해서 얼른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 하는 위기감도 느끼고, 계속 소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중에도 나의 경건의 나무는 잘 자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나의 경건을 잘 쌓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고 등 저에게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서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을 때에도 한 장 한 장 넘기고 한 마디 한 마디 기도할 때도 주님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문주빈 학생 발표하겠습니다.
문주빈 : 경건의 개념을 소개해주시면서 이해할 때 경건한 삶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웠는데 경건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신 명령,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학우 말씀처럼 경건의 진보가 있냐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건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매일 죄와 싸우고 말씀에 순종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진보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 내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노력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경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은혜를 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하경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고하경 : 저는 경건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도 해소되지 않는 답답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경건이 없어서 하나님 사랑하는 데에 더 애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원형섭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원형섭 : 저는 얼마 전까지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다고 자부했는데 근래 들어 또한 강론을 통해 제가 얼마나 정리가 안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에서는 불안감,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경건의 부재에서 알게 되었고, 이제 알게 되었으니 감을 잡아가면서 경건에 대한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김혜원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김혜원 : 저는 두 바퀴 비유를 들으면서 맹목적인 믿음이 있는지 지식만을 추구하는지 고민했습니다. 좀 더 고민하며 기도하며 두 바퀴가 어떻게 하면 잘 굴러갈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이태하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이태하 : 강의를 들으면서 영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제 안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또 경건에 대해 스스로 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실망감도 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강론에서 교수님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떨리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하셨는데, 감사하게도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실망과 동시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임승연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임승연 : 경건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이끌리는 감정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돌아보면서 그 사랑에 이끌리는 감정은 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진 않았기 때문에 저의 경건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그 경건과 체계적인 말씀 공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씀 공부에 대한 열정도 없었습니다.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주혜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신주혜 : 저도 강론을 들으면서 경건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나의 삶에서 드러나는 삶의 체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건은 내 삶을 통해 모든 것이 나와야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성에 관해서도 무분별하게 살던 때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정확하게 잘못된 사례를 들어주시면서 영성보다는 경건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종교랑 지식이 함께 가야 한다고 알려주셔서 지식만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종교적이고 맹목적인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 불이라면 체계적인 지식은 장작과도 같다는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이승찬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이승찬 : 발표에 앞서서 뭔가 두렵고 떨림이 있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강론에서 경건, 경건과 영성의 차이, 경건의 소유와 연속이 어떻게 가능한지, 경건을 통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의 삶을 잠깐 나누자면 저는 전역을 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전역을 앞두었을 때 제 안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질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질문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 강론을 들어서 경건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의 핵심,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경건의 삶은 말씀과 기도의 삶을 통해 소유가 될 수 있고 연속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과제를 내주셨던 것 같이 항상 말씀을 읽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정말 제 인생에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과 기도생 활에 치중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원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김재원 : 저는 강론 들으면서 경건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했는데 우리 이웃에게는 그러한 경건한 모습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다니는 본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에게 두렵지만 사랑이 없었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에게도 두렵고 떨림, 도망치고 싶지 않은 사랑의 감정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하자면, 만약에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참답게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는 반드시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지만,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데 ‘to love’라는 라틴어입니다. 이렇게 되고 다음에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아퀴세티브’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티브스’입니다. 탈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공격하셨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홍은성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홍은성 :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하신 나의 삶에 경건의 진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생각하며 답을 찾자면, 오랜 시간 동안 저의 삶에 경건의 진보와 훈련이 매우 더디고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건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삶의 체계가 아니라 나의 삶의 체계가 나의 즐거움, 만족을 위한 체계였음을 알았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배우는 지식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나아가지 못하고 나의 지적 만족,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나의 삶을 돌아봤을 때 혼돈 가운데 있고 정리 되지 못한 삶이었다고, 그런 삶이 없는 기도는 열렬해질 수 없고 진실 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강론 중에 하나의 예시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가 어찌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하시는 말씀이었는데,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하는 마음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나의 삶의 모습과 체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것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열렬히 기도하고 삶 속 경건의 체계를 회복하는 것이 정말 절실히 필요하겠다고 느꼈습니다. 교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꼭 응답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싶다는 기도인 것처럼 나의 시간, 생활을 들여 다시 회복할 기도는 나를 만나주시고 다시 한번 두려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김민수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김민수 :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경건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재정립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경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고3 때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림, 하지만 사랑함으로 나아가는 감정에 대해 1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강론을 들으면서 그 기도가 지금은 제 삶에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강론을 통해 다시 한번 제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경건은 지식과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매번 스스로 경건한 삶을 이야기 하지만, 지식과 종교 중에 어느 한 가지 측면에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성했습니다. 가장 은혜가 되었던 말씀은 하나님은 저를 어떠한 기도보다 자신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충격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요즘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내가 삶의 유익, 만족을 구하며 하는 기도보다 가장 필요한 기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만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도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몇 분 못하셨는데 시간이 너무 가서 수업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누어주신 강의안의 제1번을 공부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 시간에 했던 것을 핵심적 내용만 간추려보겠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창조되었고, 둘이 결합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마음은 인간의 실체는 육체와 영혼인데, 육체는 알다시피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이고 영혼은 유시하지만 무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영혼의 기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기능의 대표적인 세 가지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지성과 관련되고, 두 번째 것은 감정과 관련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의지와 관련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내용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그 이야기 했던 것을 조금 더 확대시키면서 자세하게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날 때 영혼을 부여받아 태어났을 것이고, 나는 어렸을 때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지만 지금은 어른이 되어 어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지만 내가 30년을 더 살게 되면 그 때 쯤에는 내가 나이가 훨씬 더 많이 들고 인생의 경험이 쌓여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다. 성격도 많이 변합니다. 어려서는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경우 그런 상처를 받기 전후의 나의 성향과 생각,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등 우리 자신이 많은 세월을 겪으면서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 자신의 성향이 변해갑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봅시다.
영혼에 대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성경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혼이 가지고 있는 기능, 그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하는가 하는 것, 그 영혼이 망가질 때 어떻게 나쁘게 작동하는가 등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서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사실 영혼이라는 존재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이성의 범위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초월적인 세계를 내가 어떻게 접할 수 있는가 할 때 우리 육신으로는 접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 영혼을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고전에서 보면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굉장히 처음에는 물질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팔다리를 움직이는 힘의 반대편인 등 뼈 쪽에 모인다고 생각을 해서, 사지를 꽉 잡아주고 있는 것이 영혼이라고 보았습니다. 죽고 나면 모든 사람이 몸이 쳐져서 죽습니다. 끈이 풀어지는 것처럼 죽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 사람들은 우리의 영혼이 바로 등 뼈 뒤에 있고 거기에서 사지와 몸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것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봤습니다. 실제로 문헌에 보면 사람을 찌르고 등을 찌르니까 영혼이 바로 등뼈에서 칼끝에 묻어나왔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영혼을 신체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죽고 나면 영혼이 먼 다른 나라, 하늘나라로 간다는 생각까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이 많고 억울한 것이 있으면 하늘나라로 가든지 등 어디로 못 가고 구천을 떠돌면서 방황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살아있는 사람이 한을 풀어주어야지만 그 영혼이 자유함을 얻는 설화로까지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영혼이라고 하는 실체에는 우리가 태어날 때 부여받지만 영혼이라는 것이 결국은 변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하은 학생 발표해주십시오.
임하은 :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잘 안 변한다고 생각하는데, 순수성에 대한 부분에서는 변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질될 수도 있지만,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임하은 : 네. 맞습니다. 조금 더 깊이가 있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같은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 영혼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임하은 :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가슴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영혼을 잠깐 여기로 보내줄 수 있습니까?
임하은 : 그쪽으로 말입니까? 어렵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영혼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를 들어 태어날 때 2.8kg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영혼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커졌습니다. 그러면 내 몸의 어느 부분에는 영혼이 없는 부분도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영혼은 이러한 물건처럼 부피와 크기, 색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 영혼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출장 보낸다든지 아니면 내 영혼과 잠시 헤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 영혼은 힘과 경향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경향성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가깝게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욕구를 느끼고 하는 것들과 관계가 되고, 이것이 영혼의 저급한 기능입니다. 영혼의 고급 기능은 생각하고, 믿고, 느끼고, 감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그런 모든 것을 내리는 사령탑과 같은 기능입니다.
그런 일들을 실제로 실행하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나옵니다. 마음과 영혼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영혼의 경향성은 마음의 성향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의 성향은 영혼의 경향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혼은 우리가 직접 알 수 없지만 결국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마음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학생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칭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의실에서 계속 노트북이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특정한 학생이 한 학기 동안 여러 대를 훔쳐 갔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 사람의 마음을 직접 볼 수는 없고 영혼의 경향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주 크다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마음은 성향입니다. 예를 들면 물에는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수증기는 아래에서 위로 증발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일정한 규칙과 통로입니다. 성향입니다. 마음에 도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만 보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그것을 훔쳐야 하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버릇이 성향이라면 마음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영혼입니다. 영혼이 경향성들이 악으로 기울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경향성이 마음에 투영되어서 노트북을 볼 때 그것을 훔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여러 대를 훔쳐다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설마 그것을 자기 집에 가져가서 10대씩 테이블에 깔아놓고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좋은 것 하나는 쓰고 나머지는 끊임없이 팔 것입니다. 거기서 생긴 돈으로 자기 필요한 것을 사고 먹고 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 영혼의 경향성은 마음의 성향을 통해 나타나고 마음의 성향은 삶의 행동에서 입증이 됩니다. 잠깐동안은 속일 수 있는데 오랜동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물이 가득 차면 넘치듯이 잠시는 숨길 수 있지만 그것은 영혼의 경향은 마음의 성향을 통해, 마음의 성향은 행동과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운명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노력하면 마음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도벽이 있어서 영혼의 경향이 악하다는 것, 마음의 성향이 도벽에 물들었다는 것, 도둑질을 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그런 행동도 안 하고 마음도 도벽이 없어지고 오히려 이웃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영혼의 경향성도 선한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승우 학생이 대답해보십시오.
이승우 : 영혼의 경향성을 악이 아니라 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서 사랑하는 것으로 바꾸면 저절로 마음도 바뀌고 행동도 바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해보십시오. 우리 모든 사람이 가슴에 잘 스며들도록 한 번 이야기해주십시오.
이승우 :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여기에서 성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성화가 무엇입니까?
이승우 : 성화란 악한 마음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 행동 뿐 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원래의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를 했는데, 아까 영혼의 그 문제에 대해서 허윤 학생이 이야기해보십시오.
허윤 : 영혼이 경향성들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향이라는 것이 어떤 것에 더 이끌리고 어떤 것을 더 선호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만약에 악한 것을 더 좋게 여기고 이끌린다면, 그 반대의 것을 경향하기를 원하고 그 목적을 위해 악보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경향의 여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둑질하는 것보다 내가 성실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나의 생계를 유지하고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좋은 것이라고 추구하게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 가운데에서도 변화하려면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의 경향성보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선의 경향성이 더 좋다는 것이 발견되고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아질 때 경향성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해야 바뀔 수 있습니다.
잘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영혼의 경향성, 마음의 성향, 육체의 행동, 이 세 가지가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이에 연관되어 있으면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인 면과 능동적인 면을 아울러서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독특성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체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하게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느끼고 하나님처럼 결정할 수 있는 독립체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연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인간이 독립된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논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성향은 자연적인 성향과 도덕적인 성향으로 나누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경향과 도덕적인 경향성, 두 종류로 나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산보다 바다가 좋다'는 것이 그 사람이 어려서 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자연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경향에 맞는 환경에 있을 때 기뻐하게 됩니다. 수학을 정확하게 푸는 것보다 상상 속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 좋다면, 아주 일관되게 똑같이 나타날 때 사람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수학보다는 문학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만들고 자연을 관찰하는 것보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의 자연적 성향의 문제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은 학교 다니는 것이 괴롭습니다. 물론 그가 노력을 안 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 할 수도 있지만 공부하기에 적합한 것도 하나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훨씬 잘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규범형 인간이 확실히 공부를 잘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창의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성향의 차이인데, 사회의 효율성과 관련지어서 전자에서 이야기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획일적 교육 체제 하에서 계속해서 좋은 성과를 이루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육은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교육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좋은 성향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서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이끌어 낼 수 있는 개방적 교육체제가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동안 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도 재미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학교에 가기 싫었습니다. 당연히 학교 성적이 좋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니까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원에 가니까 훨씬 더 공부를 잘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아예 그만두니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를 보고 학문에 있어서 열등생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나의 자연적 성향이 이 나라 교육과 너무 안 맞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잘 발굴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결국 마음은 육체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영혼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밥을 먹는데 거의 길거리에서 너무 더러운 토할 것 같은 환경에서 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과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감정의 차이가 있습니다. 육체가 그런 것을 가져다줍니다. 삶의 의욕이 넘쳐도 질병으로 고생하게 되면 그 의욕이 꺾이게 됩니다. 원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결국은 영혼, 마음, 육체 이 모든 감각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수동적, 능동적 면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환경에 처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내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내 마음과 나의 육체, 나의 영혼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경적인 신앙관은 이런 생각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 안에서 인간은 세계와 만나고 동시에 하나님과도 만납니다. 인간의 비참함은 결국 마음의 비참함에 있고, 마음이 비참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 불쌍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관입니다. 절대로 인간은 마음에 대해서 당연히 자기의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인간이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자신이 마음을 고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이승우 학생이 성화라는 어려운 말로 설명을 했는데, 성화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과 함께 역사하여 우리에게 악하고 죄된 요소를 순결하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본성에 의해 자연적 모든 본성은 유용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빨리 결정하지 못하고 더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것이 죄와 결합되면 우유부단한 성격이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이 되면 신중한 성격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결정합니다. 이것이 죄와 결합하면 경솔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이 되면 아주 신속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사회가 이끌어져 가기 위해서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가난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서울 시내 언덕에 올라서 보면 다 판잣집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때를 지났는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GNI가 3만 1,700달러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의식 구조도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때나 이제나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있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펼치면 2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돌아가면 위만조선 시대 쯤입니다. 한사군 때입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도저히 우리 문화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매일 읽으면서 QT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달구지 타고 다던 시대나, 리무진을 타는 시대나, 구석기 시대의 인간의 평균수명은 18세, 신석기는 20세, 조선시대는 34세 정도가 인간의 수명이었습니다. 지금은 80세 넘게 삽니다.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인생이라는 문제는 거의 똑같기 때문에 2천 년 전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도움을 받습니다.
결국은 그 모든 인생의 문제가 같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그만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에도 물론 그때에는 오늘 저녁에 가서 컴퓨터 게임을 무엇을 할까, 아이폰 워치6가 나왔는데 그것을 살까 등의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없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엽적 문제이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등의 질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하는 질문이고 인생에 있어서 모든 질문들이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 많은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면서 인생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 번뇌를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도 우리가 결국 마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에게 없는 가장 중요한 특권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과 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과의 마음의 대화를 활발히 하게 됩니다.
시편42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방황하며 두려워하는가”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마치 남인 것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타이르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지요. 이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둘이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이 반성의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과 관련해서는. 그러니까 마음을 모르고는 이렇게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마음으로 알고 그리고 그 마음에 어떤 것들이 고쳐져야 되겠는지를 깨달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마음을 고쳐가는 그것이 신상생활입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객관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텍스트로 들어가서 1장의 1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좀 읽겠습니다.
마음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 영혼의 기능이다. 외부세계의 감각으로 반응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동물을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마음의 독특성은 인간의 독특성이다. 내적으로는 무한한 영혼세계와 외적으로는 무한한 물질세계가 인간의 의식 안에서 만나며 시공을 초월하는 영혼의 세계의 기억이 시공 안에 존재하는 자연세계와 접촉하는 곳이다.
인간의 마음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자연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지식과 도덕적 지식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은 정동을 경험한다. 인간의 마음은 또한 자신 안에서 스스로 작용한다. 이전에 존재하던 기억들과 새로 발생하는 사물들에 대한 관념은 서로 결합하며 또 다른 관념들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마음 안에는 이러한 상상력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마음 자체 안에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성향이다. 이 성향 안에서 마음은 고유한 힘을 가진다. 영혼의 이러한 힘과 경향성이 반영된 마음은 사람의 지문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로 인간의 마음의 다양함은 우주 안에 있는 물상의 다양함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마음의 다양성은 우주의 사물의 다양성과 함께 삼위 하나님의 다양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기 다른 인간들의 다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심으로써 온 세계를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채우신다.
인간의 마음의 탁월함은 그것을 통해 일어나는 도덕적인 기능과 관련할 때 분명해 진다. 세계에 존재하는 피조물 중 오직 인간만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피조물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창조목적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창조된 모든 세계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머리이므로 구속의 머리가 되시고 회복을 통한 재창조의 세계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시공간에 잠시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타락한 세상을 구속하셔서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가시적인 현현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로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 그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으나 이 땅에서 창조된 육체를 입기 전까지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인간은 땅에 존재하도록 창조되어 있는 동안 이 모든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하는 머리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위로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알고 또한 아래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피조물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함으로 충만한 영광의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원대한 하나님의 자신을 확대하는 창조의 계획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인간에게는 자기 밖의 두 세계 곧 하나님과 자기 외의 세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게 되었으니, 실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함에 있어서 마음으로 자신을 아는 지식은 원을 그리기 위한 중심점과 같은 것이다.
자, 이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헬리콥터가 떴습니다. 돌아갑니다. 이제 엄청 높습니다. 여기에서 바위를 떨어뜨렸습니다. 거의 봉고만한 바위를 떨어뜨렸는데 아래에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입니다. 잔잔한 호수입니다. 이게 떨어집니다. 떨어지면 물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물결이 일어나겠지요. 요 떨어지는 것 이것이 여기가 마음이고 마음이 이렇게 출렁거리게 됩니다. 이것을 정동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 혹은 지식입니다. 그게 마음에 떨어질 때 이 지식과 감정이 결합하면서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얘기 들으니까 미국에 7월 이후의 모든 여행지가 다 예약이 끝났다고 합니다. 항공사와 호텔이. 그리고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우리가 코로나 나면서 다시는 크루즈 안 탈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180일짜리 6억 원짜리 여행상품이 있는데 상품 내 논지 이틀 만에 매진이 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여행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국은 새로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왜 그렇게 좋을까? 정동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자, 보십시오. 매일 살고 매일 왔다 갔다 하던 학교, 집 여기는 느끼는 게 별로 없습니다. 아주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느끼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자면 내가 이탈리아 시칠리 해변에 갔습니다. 시칠리 해변에 가서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여기 있을 때와는 다르게 움직이겠지요. 이렇게 출렁거리겠지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 도표로 보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인식이 생겼는데 시칠리 해변에 대한 인식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여기는 감각도 있는 것이지요. 생겨나게 되니까 이게 감정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출렁거리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러한 풍경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칠리 해변에 너무 좋아서 갔는데 “너 거기서 유배생활이다. 넌 거기서 절대로 못 나온다.” 그리고 한 20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해변에만 있게 된다고 쳐 보십시오. 그러면 처음에 거기 여행 갔을 때 그 느낌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또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여행을 간 것과 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하기 위해서 갔을 때에 그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또 다르겠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이 정동은 결국은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 이것과 감정이 결합되면서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동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될 때 이것이 마음의 한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향은 궁극적으로 영혼의 경향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일까요? 인간은 과연 있기는 있는 걸까요? 그리고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영상을 하나 보여드릴 테니까 한번 보고 각자 자기의 느낌을 한번 이야기해보십시오.
잘 보셨습니까? 자, 김태웅? 지금 영상 한 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생각은 아니고 벅참이 느껴집니다.” 어떤 면에서? “존재에 대한 벅참, 그러니까 사람이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벅참이 느껴집니다.” 그게 어떤 점에서 벅찰까요? 그 벅찬 느낌의 기원이 무엇일까요? “제가 말하는 게 너무 신학적인데 너무 신학적이라서 너무 뻔하지만, 이 존재가 갖는, '나'라는 존재가 갖는 그 의미, 어떤 의미에서 내가 알기 전에 내가 깨닫기도 전에 내가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정말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지만 그 안에 또 넓은 우주가 있어서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있는 존재, 그러니까 의미를 부여받는다면 무한하게 의미를 받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하면 아주 티끌과도 같아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 있겠는데, 신학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받았는지 알기 때문에 저는 그 속에서 인간이 이 우주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벅참이 느껴집니다. 인간이 주인공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으니까. 그래서 벅찹니다.”
또 신학과 4학년 김재원? 얘기해 보겠습니까?
“왜냐하면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거리이어서 그때도 지금하고 똑같이 이해가 하나도 안됐던 것 같아요. 왜 인간이 이렇게 조그만데 그렇게 큰 거리가 있어야 할까? 내가 가지도 못할 텐데 평생을 가도 그런 것 오늘도 똑같이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왜 인간이 이렇게 작은데 우주는 저렇게 클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크게 만드셨을까? 우리가 다 가보지도 못할 곳일 텐데 그런 생각도 하고, 진짜 창조하신 그 위엄? 아, 하나님이 정말 힘이 있으신 분이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분이시구나,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런 단순하지만 힘이 있는 명제들로 좀 많이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신학과 4학년 최주헌?
“저는 영상에 대해서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나는 정말 너무 작은 존재여서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이렇게 작은 존재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게, 그러니까 너무 작은데 하나님이 이런 나도 사랑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비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물질 차원에서 인간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몸에서 1미터 떨어지고 2미터 떨어지고 10미터 떨어지고 100미터 떨어지고 이러면서 지구 밖을 벗어나가고 그리고 보면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은하계라고 하는 행성과 항성을 포함해서 약4조개 별들로 이루어져 있는 원반형의 바람개비모양의 우리 은하계의 왼쪽 하단부의 중심으로부터 약2만6천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그 지구인데, 그런데 그런 은하계가 우주 안에 관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약 2000억 개가 있다고 하니까 그 넓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별들의 수명은 수십억 년에서 수백억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한 60년, 70년, 80년 정도 살다가 죽는데 그것의 시간의 길이 같은 것을 대조해 보면 참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관심의 주제인 마음으로 이동해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이동해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우주가 어마어마하게 넓지만 그러나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마음은 우주보다 더 넓지 않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상상과 인식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파스칼은 “우주가 넓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우주 자체를 감싸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크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우주보다 파멸을 당하는 인간이 훨씬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우주는 그 의미를 모르지만 인간은 그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면서 인간의 위대성을 물질적인 크기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가 이 마음에 관한 수업에 집중해야 하는 한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7번을 보겠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신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통한다. 왜냐하면 자아에 대한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만 자아에 대한 지식이 객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자신에 대한 의식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자기를 떠날 수 없다함은 곧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함이니, 이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든 인식의 작용들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도덕적 행동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경향성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다. 곧 인간의 행동은 선한 행실의 올곧음을 버리고 스스로 수많은 모순율들을 지니게 된다. 타락 후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래서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격상시키고 하나님처럼 살아가고자 한다. 인간이 가지는 이러한 악을 향한 필연적인 경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으로는 더 이상 창조목적을 위하여 이바지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게 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마는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구속하시기 위해 위대한 계획을 영혼 안에 실행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구속하시므로 다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신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죄의 경향성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새롭게 창조된 새 본성과 자아를 위한 옛 본성의 갈등이 그것이다. 영혼 속에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은 마음속에서 실제로 구현되며 인간에게 의식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외부세계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사물들의 정보들을 인지해야 하는 마음의 고유한 작용을 혼란시킨다.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세우신 존재와 가치의 질서들을 전복한다. 하나님을 거스르게 한다. 그 모든 감각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마음 안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창조세계 안에 무한히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심미하며 즐거워하게도 하신다. 창조된 세계는 유한하지만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힘과 영광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력을 다해도 이 세계의 무한함을 포섭할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독특한 영혼의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의 행사가 마음 안에서 실현된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마음의 주인이 마땅히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을 드려야 한다. 마음을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의 방향과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신자는 이 땅의 피조물이면서 하늘의 하나님과 교통한다. 인간은 이 마음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욕망하고 의지하는 바를 행사한다. 인간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존재 외부의 세계와 그리고 또한 인간 존재의 내부의 세계와 관련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정돈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삶이 외부의 세계로 나오는 문과 같으며 또한 내적 세계에 대해서는 그리고 들어가는 문과 같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단지 그 의식들을 통과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안팎으로 향하는 모든 의식의 근거지가 된다.
3페이지 각주 보겠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마음의 독특성이 있다. 동물에게는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의 세계를 감각하고 그것에 의해서 생명을 보존하는 행동을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육체는 자연적인 질서 안에, 영혼은 도덕적 질서 안에 있으며, 이 두 질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함께 역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씨줄과 날줄로 역어진 금술주단처럼 이해가 된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성의 회복의 정도와 비례하여 이해된다. 인간도 육체로서는 자연적 질서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동물적인 생존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마음 바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능이 육체의 기능의 일부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능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동물의 경우 이러한 감각은 육체와만 맞닿아 있으나 인간의 경우는 영혼과도 맞닿아있다. 따라서 동물은 배고프면 앞에 있는 음식을 먹지만 인간의 마음은 먹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구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기다린다. - 예를 들자면 음식이 있지만 그게 남의 음식이라면 먹을 수 없도록 도덕적 판단을 내려주는 것이지요. -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안팎의 경험과 도덕적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안팎의 경험을 포섭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걷다가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른다고 하자. 그는 고통을 느끼며 속히 그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반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한 작용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일까? 인간의 마음 바깥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운동 가운데 반사운동이라는 게 있다. 신체가 뜨겁고 차가운 것에 닿았을 때 대뇌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소뇌의 작용으로 즉시 자신의 몸을 반사운동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이러한 작용들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라도 상황에 대한 기억은 대뇌를 통해 기억되고 인간의 마음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지만 무의식 안에 발생함으로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기능이 육체적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서 내정하신 기능으로 스스로 육체의 작용 가운데 함께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육체의 생명을 위한 여러 감각 작용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작용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마음의 작용과 더 많이 관련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기능이다. 이 마음 안에서 인간은 영혼의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곧 기억하고 알고 욕망하고 의지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단순히 외부의 사물이 전달해 주는 감각에 대해 수동적으로만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고유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느냐 하는 여부는 그가 지성으로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영혼이 진리의 빛 아래 있을 때에 존재와 가치의 질서는 올바르게 인식된다. 이 모든 일들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동물에게도 있는 자기 생존을 위한 자연적 욕구가 도덕적 욕구와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만날 때 마음의 도덕적인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많은 교만과 타락은 이 두 욕구의 만남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의 오류에 빠짐으로서 더욱 악해진다. 따라서 마음은 모든 동물에 비해 인간의 존재적인 탁월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또한 인간은 이것의 잘못된 작용 때문에 동물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인간에게 마음에 있는 작용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할 때 역사적으로 고전철학에서는 지성의 작용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 아는 낭만주의시대가 도래하면서는 인간의 감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니체 같은 사람은 의지에다가 방점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인간이 과연 진짜 주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최초로 생각하는 존재로 부각시켰고, 그러한 생각 안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라고 했다는 점에서 근대는 주체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프로이드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이제 “인간이 의식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행동하는 많은 것들은 지극히 일부의 자료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그것을 움직이는 더 어마어마한 자료들은 무의식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무의식이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라깡 같은 사람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이 끊임없이 경험하고 느끼면서 변화해 가는 그 자체일 뿐이지 인간이 주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 우리는 마음에 대한 고전적인 생각들이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결국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그것이 정말 독단적인 생각이 아닐까 이렇게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망을 앞세우는 그런 견해들을 이제 내세우는 것이지요.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과 씨름해서 무엇인가 보다 더 나은 건전한 자신의 존재를 신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그런 책임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그 존재에게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 절대적으로 “이것은 진리다.”라는 기준이 사라졌으니 결국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결국 인간의 지성이 이성과 의지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그런 이성의 힘을 아무리 믿어보아야 결국 그것이 인간의 불행을 해소하지 못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굳이 이성이 우리의 깡패노릇을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는 엄청난 억압 아니냐, 우리가 굳이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반기를 들면서 마음에 대한 생각들도 이제는 마음에 대한 논의 자체가 갈 길을 잃고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리고 이 마음을 어떻게 자신이 체득하면서 그래서 이 마음으로 지식을 습득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알아야 할 대상은 셋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세계, 사람, 이 세 가지 지식입니다.
다만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지식과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나도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공통적인 본성을 내가 가지고 있지만 그게 내가 다가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나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어떤 전자기기가 있다고 치면 동일제품 동일모델 동일회사에서 생산된 것은 기능이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이폰12를 한참 쓰다가 잃어버렸고 그래서 내가 다시 아이폰12을 샀습니다. 더 이상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렸지만 그 제품하고 모든 게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생각되는 것이 나에게는 다르게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런 일이 일어날 때 저 사람은 저런 마음이 들어서 저렇게 행동합니다. 그 중의 어느 부분은 모든 인간에게 모두 다 공통적이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부분은 전혀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는 아무리 많이 인간에 대해서 공부를 해도 그게 나를 아는데 도움을 줄 뿐이지 나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탐구해 줄 것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나는 탐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까지나 일부분이고 인상일 뿐입니다. 결국 나 자신을 탐구해야 될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남이 사용할 마음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야 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아무리 못된 개라도 개만도 못한 개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그래도 모든 면에서 개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존엄성, 있습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잘못하면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스스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 아주 동물만도 못한 단계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위대함 때문에 인간이 비참해 진다는 이상한 공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비참해진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비참해 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모든 인류가 다 죄인이 되었다고 하면 왜 하나님은 그런 것을 만드셨을까?" 그리고 더 많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은, "아니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하는 인간의 손을 붙잡으셔서라도 못하게 하시지 왜 인간에게 그런 범죄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리고 범죄할 때 왜 인간을 말리지 않으셨을까?" 이런 의문들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물론 당신은 인간이 범죄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그런 것을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인간의 의지로 결정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단지 기계에 불과한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어느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서서 허리를 숙이면서 “어서 오세요. 손님” 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기계음입니다. 똑같은 사람 크기인데 인형입니다. 그런데 인사를 합니다. 거기서 기분 좋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인격성을 거기서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런 존재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 이런 정도의 명령을 인간에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계의 인간으로서는 그런 사명을 받들 자격이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위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비참한 것이고, 비참하게 된 인간을 보면서 사실은 그의 정체가 참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이나 혹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이야기 하셔도 됩니다. 없습니까? 자, 묻고 싶은 것 그리고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자기가 새롭게 갖게 된 생각 한번 얘기해 보십시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강의안 1페이지에 보면 영어로는 '어펙션(affection)'이라고 하는데 '감정'을 교수님은 '정동'이라는 표현으로 쓰는 게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과 정동을 이렇게 구분하시는지요?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영어에 ‘어펙션’이라는 말이 쓰이면 사실 적당한 번역이 없습니다. 감정이라고 하지만 미운 감정을 나타날 때는 어펙션이라는 말을 사용 안 합니다. 이것은 애호(愛好)의 감정입니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어펙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게 러브냐? 러브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인간의 심리 문제와 관련해 볼 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원래 이게 라틴어에서 '아팩투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영향을 받은’ 그런 뜻입니다. 아팩투스. 그래서 이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 유명한 작품 중에 'Religous Affection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종교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 '릴리젼(religion)'이라는 말이 에드워즈 때만 해도 일반 종교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지만,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유럽에서 종교는 하나였습니다. 기독교 하나.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썼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 ‘릴리기오니스’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종교의 대강(大綱)' 혹은 '종교의 요강(要綱)에 관하여'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경건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것을 '경건적인' 혹은 '신앙적인 정동'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되는데 감정이라고 번역을 하면 다 번역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심리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펙션(affection)이 있는 게 아닙니다. 중립적인 감정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중립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중에 좋아하게 되면 중립이 될 수 없지만 중립입니다. 사람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제 남학생이 학교에 들어와서 여학생들을 죽 봤습니다. 사람이지요. 애정이 없을 때는 그냥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특별히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면 좋아하게 되는 과정이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을 딱 보는 것이지요. 아름답습니다. 용모가 아름다우니까 끌리겠지요. 그 다음에 용모가 아름다운데 조금 말을 걸어보니까 인간성이 꽝입니다. 그러면 매력을 느꼈다가도 마음이 멀어지겠지요. 대화를 해보니까 인간성이 너무 좋습니다. 아니면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용모는 별로 끌리지 않았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너무 사람의 마음이 훌륭한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람이 마음을 보았던 외모를 보았던 이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게 될 때 그것이 나의 마음에 좋아하는 감정을 주고 마음을 출렁거리게 함으로써 좋아함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팩션(affection)의 의미라 이것입니다. 원래 의미가. 자, 답변이 됐습니까? 또 다른 질문 있습니까?
3쪽의 10번에 구원받은 신자라도 할지라도 자신 안의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죄의 성향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왜 죄의 잔여물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여생동안 끝까지 남겨두시는지 궁금합니다.
참 어려운 질문이지요? 핵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마음의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일평생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며칠이 안 갑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마음이 변질되는 것이 느껴지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자신의 죄를 발견하면서 자기가 이런 존재밖에 못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코비드 백신을 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맞으려면 가을에나 돼야 맞으려나 모르겠지만 우리는 맞을 때가 다가오는데, 백신의 원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감염병이니까 메커니즘이 좀 다르겠지만, 예를 들자면 천연두나 아니면 예방주사 맞는 것 있지 않습니까? 원리가 균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동원령을 내려가지고 그 균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균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집어넣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만 집어넣는 것이지요. 그래서 싸워서 항체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독감예방주사, 천연두예방주사 모든 것에 대한 기제(機制)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안에 죄는 나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죄를 인식하고 결국은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야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매달리고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잔존하는 죄 때문에 우리가 더욱 하나님 앞에 깨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쓴 ‘죄와 은혜의 지배’라고 하는 450페이지짜리 책에 그 문제만 집요하게 다룬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한번 빌려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주 수업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오늘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이것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러분들이 한 주 동안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을 모두 읽어 오셔야 됩니다. 읽으면 한 시간 반 밖에 안 걸립니다. 읽는 시간으로는. 그러니까 부담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다음주에는 말씀 각론 듣는 것 하나 빼드리겠습니다. 스킵하고 그냥 넘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때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던 밤’을 읽고 오셔서 한 사람씩 발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포트를 한 페이지만 내십시오. 그래서 다음 주에는 그냥 이 순서대로 각론을 나누면서 강의를 진행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각론을 스킵하고 대신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그 책을 읽고 발표를 하는 것으로 그렇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배운 것들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희들이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