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3)
녹취자: 이새봄, 조경훈
자, 이제 지난 한 주간 동안에는 <경건과 그리스도>를 들으셨을 텐데 우리 2주 차 강론, 18명이 제출하셨으니까 세 분은 아직 제출을 안 하셨는데 다음서부터는 꼭 제때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고하경 학생부터 발표를 해보겠습니까? 들으시면서 뭘 어떤 것들을 깨닫고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습니까?
“설교하신 것 중에 경건과 삶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그런 경험이 없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한테는 별로 그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민수? “이번 강론을 들으면서 십자가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어제 강론을 듣기 이전까지는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그게 그 하나님의 사랑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묵상을 끝낼 때가 많았는데, 이제 강론을 보면서 그건 제가 십자가일 때 정말 진정으로 묵상한 것이 아니었고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도 있지만 거기에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말 엄격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그렇게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도 함께 봐야하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마주해야 한편으로는 정말 사랑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을 받고 은혜를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되어서 그게 가장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번 주부터 말씀하셨던 경건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고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건과 그리고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 보면서 또 저의 삶을 한 번 점검해보았던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그러니까 아까 김혜원 자매가 학생이 이제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서 별로 못 느껴봤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되냐면, 밤하늘이 있잖습니까? 어두운 밤하늘이 있으면 그 밤하늘이 어둡기 때문에 별이 빛나잖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위대하고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학생이 과학시간에 선생님한테 물어봤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랬더니 “너희 집이 어디냐?” “우리 집이 목동에 삽니다.” 이랬더니 전 세계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하고 너희 화장실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데 거기에 날파리 8마리가 돌고 있는데 그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여기서 지난 시간에 그 인간의, 지난 시간에 본 것 기억나죠?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그런데 아무도 몰라요. 사실 우주의 크기가 얼마인지. 대개 160억 광년이라고 보고 많이 보는 사람은 960억 광년이라고 보는데, 그것도 관측이 가능한 한계 안에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거 어저께 보여준 그 자료 지금 찾을 수 있나? (시간 주시면) 그럼 이때 찾아놔줘.
최근에, 아니 최근이 아니라 1860년에 별이 하나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UY스쿠티(UY Scuti)라는 별입니다. 그런데 태양의 1700배입니다. 여기서부터 95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여기 이제 금방 보여줄 수 있을 모양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보여드릴 테니까. 여기 보면 UY스쿠티라고 했는데, 이게 그리고 옆에 지금 선(sun)이라고 했는데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주 티끌만한 게 있는데 그게 크기가 어느 정도냐면 목성이 지구의 천 배고 태양이 목성의 천 배입니다.
태양은 지구의 100만 배 크기입니다. 그 지구의 100만 배의 크기가 지금 점으로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7배로 줌을 했더니 그 아래 그림이 나오는데 UY스쿠티 옆에 작은 점이 하나 있잖습니까? 그게 태양입니다. 이 스쿠티 별 하나를 여러분들이 타고 다니는 보잉 747이나 이 비행기를 타고 쉬지 않고 돌아도 천년을 돌아야지만 한 바퀴를 돌 수 있답니다. 그래 봐야 결국은 그런 걸 놓고 보면은 이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라는 걸 알 수 있고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늘도 죽을 수 있고 내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런 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이거든요. 그니까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은 살았다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가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준 겁니다. 왜 그랬냐하면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사실은 죄는 미워하시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부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여주고. 그 죄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해서 우리가 감격하게 되는 겁니다. 비로소. 십자가에서 이렇게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까 그 김혜원 자매가 아니라 고하경 자매가 질문을 했는데 시간이 있으면 열린 교회 홈피에 들어와서 지난주 설교 ‘불행이란 무엇인가’를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라는 책의 첫 번째 파트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우리 김혜원 자매가 발표해보겠습니까?
“저도 자매 형제님처럼 십자가 사건을 생각할 때 구원해주신 감사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했지만 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엄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해서, 친구들한테도 복음을 전할 때 이 얘기를 꼭 빠트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반쪽짜리 복음을 가지고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했었구나, 라는 것을 느껴서 앞으로 좀 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떨림과 두려움을 좀 더 느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앙 자체가 출발할 때 사실 사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겁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진짜 신앙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앎이 없이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김동주 학생이 발표하겠습니다.
“저도 역시 십자가에 대한 설교 말씀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 요즘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자기가 이제 구원받은 이유가, 죄가 사해진 이유가 옛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또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때리고 몸을 잘 못 가누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죄가 사해졌다고 잘못 아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번 십자가 설교를 통해서 육체적인 고통들도 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육체의 고통보다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무한하신 진노를 그 분량이 다 차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다 부어내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봤습니다. 그 다음에 이승찬?
“네, 교수님. 저 같은 경우에 이번 강론을 듣고 나서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그 십자가의 경험이 내가 왜 존재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 앞에 가야지 비로소 알 수 있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게 가장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런 나에 대한 존재를 알려주는 게 십자가인데 이 앞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정말 참된 경건으로써 하나님 앞에 내 삶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동수?
“네, 설교를 듣는 내내 많은 위기감을 느꼈고 내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또 깨어있어서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라고 다짐할 수 있었고, 또 그런 강론을 듣고 또 기도를 하면서 가장 마음속에 많이 생각이 났던 건 내가 말할 건 예수님밖에 없구나, 정말 그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또 엄청 은혜를 받고 바뀌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정말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려도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동전이 뒤집어진 것처럼 다시 악해지고 메마른 저의 마음을 가끔씩 경험할 수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번에 강론을 들으면서 나는 철저히 안 된다, 라는 그런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나는 전혀 필요가 없는 그런 악한 존재인 거구나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면서 상기시킬 수 있었고 또 이렇게 저의 그런 악한 모습을 다시금 기억하고 상기시키니까, 나한테 진짜 희망이고 생명이고 소망은 십자가뿐이구나, 십자가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그런 주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실 신앙의 감격 속에서 매일매일 살면 너무 좋은데 그거 쉬운 것은 아니거든요. 여러분들이 다들 착하니까 부모님 만약에 돌아가셨다는 그런 말에 깜짝 놀랄 거 아닙니까? 그리고 부모님이 너무 소중하겠죠. 그런데 늘 효도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요즘에 이제 여러분 사춘기는 지났을 테니까 짜증은 안 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좀 우습게 알 때도 많잖습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도 매 순간 감격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도록 늘 경건에 힘쓰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네. 그것과 함께 체계적인 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던져주는 게 하나의 화두가 되어서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체계적으로 알아가도록 노력을 해야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자동차 하나 운전하려고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가서 면허를 따는데 인생을 운전하는데 그 공부 안 해서, 공부 안 하고도 그런 지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 너무 이해도 잘 되고 그럴 때니까. 나 여러분만 할 때 하루에 라틴어 단어 150개씩 외웠는데, 얼마나 지금 머리가 총명할 때입니까? 그때 썩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열심히 책을 읽으십시오. 그래서 좀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제가 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내가 권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체계적으로 읽으면서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읽겠다고 하면 내가 보내줄 용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우리 문주빈 학생이 발표하겠습니까?
“저같은 경우에는 두 가지 측면이 균형 잡기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두려움, 죄에 대해서 심각하고 엄격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크게 다가와서 죄를 짓는 저의 모습을 볼 때 많이 힘들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이렇게 하다가 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아가지고 죄에 대한 자유와 기쁨으로 또 살아나고 하다가 보면은 또 이제 죄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게 그냥 아무런 죄책감 없이 또 죄를 짓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할 때 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약간 이런 게 밸런스 잡기가 매우 힘들어서 계속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될지 항상 힘들어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계속 그런 어려움을 계속 갖고 살아가고 있는데 강론을 이번 주에 들으면서 그런 것보다는 그냥 십자가 앞에 매일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죄에 대한 무거움을 깨닫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가 있을 때 계속해서 그냥 사랑해 주시고 죄가 없을 때나 죄가 있을 때에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우리 이성훈? 네 말씀하십시오.
“하나님의 십자가,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때문에 신학을 했는데 오히려 신학을 하면서 제 그런 경건의 순간들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삶의 체계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나의 죄가 어떤 무게를 가졌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어떤 것을 가리키고 나를 무엇이라 하는지를 깨닫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경건을 회복하는 그 순간들이 제 삶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최주헌?
“저는 반쪽짜리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십자가는 많이 생각을 하고 많이 묵상을 해봤었는데, 진짜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주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을 위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셨구나라는 생각만 했지, 내 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네. 진짜 반쪽짜리 신앙생활이 아니라 내 죄에 대해서 심각성을 깨닫고 항상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때에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김재원a? 신학과 4학년?
“네,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던 것 같습니다. 강론 속에서 십자가로부터 하나님의 두려움을 깨닫는 게 아니라 다른 것들로부터 깨달으면 잘못된, 공포?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그랬었는데. 그런 공포가 저한테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된 두려움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위축되고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서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고. 그 다음에 십자가를 생각해보면서 내가 어떤 존재길래, 내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이루셨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멤돌았었고 강론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이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 계속 그 생각이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끝날 때까지. 다시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야 되겠다, 십자가 아래로 나가야겠다, 그 두 가지 생각이 지금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자, 이제 발표는 오늘 여기까지 하고 2장을 우리 오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제 외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세계, 그 세계 안에는 당연히 자기의 육체까지도 포함되겠습니다. 손을 이렇게 들고 이게 자기가 이렇게 손을 보면서 ‘손이 너무 거칠어졌구나’, ‘텄구나’, 혹은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이 요새 왜 이렇게 새까매졌나’, ‘너무 놀러 다녔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습니까? 아니면 ‘작년에 비해서 너무 늙었네’ 생각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외적인 세계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적인 세계 하면 나의 영혼과 마음, 외적인 세계는 나의 육체를 포함해서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삶은 그런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끊임없는 소통에 의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거기에서 웃고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또 부끄럽게 느끼고 욕망을 갖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삶이 굴러가는 건 아닙니까? 어차피 영원히 살 존재는 아니지만은 그렇게 우리의 삶이 이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불행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격하게 현실을 바라다보면 사실은 진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혹시 또 행복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의 인생도 결국은 행복하고 말할 수 없이 기쁜 날보다는, 기쁜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괴로운 날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는데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만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내가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우리가 그렇게 되면 이제 어떻게 하든지 간에 결국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작용이니까 결국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계를 그리고 나의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내 마음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런 사고와 감정과 의지의 작용들이 일어나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내 마음과 어떤 관련이 있으신가,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이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그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클래스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이 결국은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마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기가 막히게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성의 호감을 당장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그 다음에 일단 사귀고 함께 살아보고 나서는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결국 마음 때문에 헤어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 때문에 인연이 맺어지는 것은 아닌데,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누구를 딱 보고 호감을 느끼는 게 0.3초랍니다. 마음이 끌리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외모에 끌리지만 그러나 같이 살아가는 것은 외모로 좌우되는 게 아니라 결국은 그건 동기일 뿐이고 마지막에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근데 같이 살아보니까 지옥이야, 이 인간하고 사는 건 지옥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 사람하고 살면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참 괜찮다, 그런 느낌이 드는데 이 사람하고 살면 지옥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결국 마음입니다. 그래서 만날 때는 외모 때문에 만나지만은 헤어질 때는 마지막에 마음 때문에 헤어지는 겁니다.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도 마음 때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인색할 정도로 공부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뒤죽박죽인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고 독단적으로 어디서 주어들은 이야기 하나 붙들고, 혹은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해서 이거다, 라고 꽂히는 대로 살아가는데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사실이면 다행이지만,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불행은 아주 명확하게 예견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야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이제 성경을 읽었으니까 생각이 날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반듯하게 이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신 이유도 결국 뭡니까? 겉모습은 번지르르하지만 너희는 마음이 틀렸다, 그래서 비판을 하시는 거란 말입니다.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첫 번째 나오는 게 ‘카르디아’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공부해야 되는데 이 마음에 관한 지식은 결국은 마음과 연관된 자기 자신과 세계, 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가운데에 파악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배워야 할 지식은 크게 그 대상이 이렇게 4개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 그 다음에 세계, 그다음에 인간, 인간인데 이건 다시 둘로 나뉘어서 일반적인 인간, 개별적인 인간입니다. 이것은 나입니다, 나. 나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얘기를 하자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지식을 가져야 되는데 인간에 관한 지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이렇게 일반적인 인간이 있고 개별적인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론이 되는 겁니다. 그런 학문을 가지고 보면 결국 이건 신학입니다. 성경, 신앙 뭐 이렇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세계는, 세계에 대해서는 이거는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로 나뉘었잖습니까? 자연 세계에 대한 학문이 있습니다. 도덕 세계에 대한 학문이 있습니다. 자연 세계에 대한 학문은 예를 들어서 물리학, 과학, 다 들어갑니다. 뭐 수학 등등등등 자연 세계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공부하면 자연 세계의 이치를 잘 깨우칠 수 있어서 자연을 자기에게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얘기한 것처럼. 그리고 과학기술은 이런 자연 세계에 대한 학문 없이는 결코 발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이 모든 문명의 기기들은 자연 법칙들을 찾아냄으로써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많이 발전해도 이런 것만 발전할 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도덕 생활을 향상시키지는 않은 겁니다. 그래서 최신 기계를 사용한다고 해서 최선의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면 도덕 세계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윤리학이 나오고 정치학이 나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인간론이 나오고 인간론이 나오니까 여기서 인류학이라든지 심리학이라든지 인지과학이라든지 등등등등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런 모든 지식들을 이렇게 토대로 해서 나라고 하는 게 누구인가 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겁니다. 공부를 이렇게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이런 많은 것들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게 내가 누구인지를 저절로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학문을 해나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오늘 여러분들이 강론을 들었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의 결합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속에 투영될 때 이게 인제 경건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은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라는 설명을 많이 들으면서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들으면 그게 결국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지 못하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라고 하는 설명을 쭉 들으면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다음에 신학적 사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 두 지평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연관 지음으로써 그 사랑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학문을 그렇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 사람들이 말입니다. 지금은 데카르트 이후에는 이 학문의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게 학문을 우리의 어떤 물질적인 것들의 번영을 누리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을 하지, 이거를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공부 방식들이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많은데 결국 실제로 인생의 무게는 더 무거워지는 상황이 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자연적인 사물에 대한 생각과 그다음에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연결을 하는 것이 교육의 전통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물리, 자연이라는 뜻이잖습니까? 자연에서 어떤 사실을 파악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논리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여기에서 윤리를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자연을 찾아내고 자연에서 이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적용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까지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예를 들어보면 이렇게 물이 흘러갑니다. 아, 이게 물이, 이게 사람이 여기서 본다, 이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자연입니다. ‘아 이 물이 흘러가는구나.’ 여기에서 ‘법’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결국은 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자연이고 논리고 그다음에 여기에서 윤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순리적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선한 인간의 삶이다, 라는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무슨 책을 읽든지 무슨 지식을 갖든지 마지막에는 그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이 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이 진정한 삶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세계, 인간, 일반적인 인간, 개별적인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지식을 함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까지 한 이야기 중에서 여러분들의 질문이나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십시오.
임하은? 네. 얘기해보십시오.
“앞에서 해주신 말씀 중에서도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서,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이 무언지를 알아야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겠죠. 그다음에 원형섭?
“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목하시는만큼, 그런만큼 우리들 역시 내 마음의 행방을 잘 추적하고 주의해서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합니다. 한 사람만 더 얘기해볼까? 자, 이태양?
“네, 당연한 이야기긴 한데요. 이 세상 자연 세계와 도덕 세계를 내가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논리적으로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새롭게 배우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롭게 배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라는 결론을 우리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그 사물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또 사물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영국의 19세기 사상가 가운데 체스터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입니다. 근데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의 세계는 난파된 보물선의 유물과 같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자면 바다 밑바닥에서 배 한 척을 건졌습니다. 그래서 그걸 간신히 끌어냈습니다. 아니 끌어낸 게 아니라 잠수부들이 내려갔습니다. 그 배의 모양을 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배를 인양했습니다. 위로 올렸습니다. 육지로 옮겨놓고 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당연히 풍랑을 만났거나 포격을 받아서 침몰했을 테니까 질서정연한 상태로 있지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다음에 어떻게? 복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 실린.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는데, 예를 들으면 서해 앞바다에서 침몰했는데 로마에서 나는 물건이 거기에 실린 것입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 때 무슨 도자기가 실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배는 틀림없이 외국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와서 여기다가 팔고 여기 있는 거를 사가지고 가서 또 다른 나라에 가서 팔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 뭐 16세기, 17세기 영국의 유물들을 보면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서 간 도자기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렇게 광범위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놓고 해석을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해석을 기다릴까? 이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 텍스트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장입니다. 5페이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수많은 행동을 보내는 문 같다. 신자의 삶은 마음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또 그 마음이 어떠한지를 유추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삶과 행동을 산출하는 본성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매일 계속되는 신자의 삶의 근원을 추적하면 일정한 스펙트럼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정신세계 속으로 유추해갈 때 최초로 마음에서 모아지게 된다. 마음을 중심으로 다시 인간의 영혼과 정신 세계 속을 향해 무수히 뻗어 있는 수많은 갈래의 또 다른 스펙트럼이 발견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프리즘과 같아서 생각이 삶과 행동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행동과 삶은 필연성을 가지고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니 이는 본성의 일관된 작용과 힘이 거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고형적 물체처럼 변하지 않는 항구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다른 정신 작용의 영향을 받으며 양태가 바뀌어간다. 욕망과 기쁨, 두려움과 슬픔의 작용들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무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이는 본성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은 운명이다’라고 얘기합니다. 못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나부끼지만 어떤 점에서는 뿌리와 같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 그리고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인가를 보여주며 이 본성이 되어 인간의 마음 안에 작용할 때 그 작용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신앙의 자리이기도 하고 욕망의 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앙도 욕망도 영혼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움직이는 작용은 마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을 통해 영혼 안에 일어나는 작용을 감지한다. 생각과 정서와 의지는 마음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다. 마음은 행동의 모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움직일 수 없는 성향은 행위를 가져오며 그런 점의 영원의 경향성은 필연적으로 어떤 마음을 만든다. 마음의 본성은 행위와 삶에 대해 필연성을 갖는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슬러 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영혼 안에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영혼 안에 있는 경향의 필연성은 마음을 통하여 구현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제일 먼저 성령으로 중생으로 작용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거듭난 영혼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 마음 안에 형성된 새로운 하늘에 속한 본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해석하고 또 사랑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행동을 생산해내는 공장과 같으며 이는 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을 올바르게 간수하며 지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탄하고 죄악된 삶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신자의 삶은 이 마음이 어떤지를 유추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매일 이어가는 신자의 삶의 근원을 추적해간다면 그 삶과 행동의 스펙트럼은 마음으로 모아지게 되고 이 마음은 프리즘같이 삶과 행동으로 뻗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어떠한 상태에 따라 그의 행동과 삶은 숨길 수 없게 흘러나오는 것이니 본성이 작용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다.’
자, 여기서는 이제 서론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인간, 인간의 마음의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우리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잖습니까? 그 신앙의, 신앙이 있는 자리, 자리가 마음입니다. 신앙이 있는 자리가 영혼이 아니라 신앙이 있는 자리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것인 것과 동시에 또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 안에서 사실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만 마음에 있는 게 아니라 죄도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가 전쟁터입니다. 신앙이 있으려고 하면 욕망이, 죄가 항거하고 죄가 있으려고 하면 신앙이 항거하면서 서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이길 때 그때 신앙과 사랑을 선택하게 되고 어느 한쪽이 이길 때 죄와 욕망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 어떤 때는 전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예전에 전혀 유혹이 되지 않던 것들이 매우 큰 힘을 가지고 나에게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 차이는 결국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세해졌느냐 아니면 나의 욕망을 위한 사랑이 우세해졌느냐, 라고 하는 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제가 예수 믿고 나서 5년 정도 지났을 때 주일학교 지도자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작아서 사람이 없으니까 예수를 믿은 지도 얼마 안 된 대학 다니는 학생 한 명이 교사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교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나는 내 마음을 이제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시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더 황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황당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갖게 하실 때도 씨를 뿌리는 것처럼 신앙을 갖게 하시지 드릴로 뚫는 것처럼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려서 길가에 떨어지면 날라가 버립니다. 옥토에 떨어지면 씨가 땅으로 파고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습도와 온도가 영향이 맞으면서 생장의 작용을 합니다. 자연스럽게 땅에 착상이 되어서 뿌리를 내리면서 땅과 하나가 되어서 영양을 끌어 올리고 그게 성장하게 만들고 그것이 다시 뿌리를 더 자라게 하면서 하나의 작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의 씨앗을 심으시고 우리의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지 드릴을 뚫어서 그 속에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간섭하시지만 기계처럼 간섭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지성에 감화를 주셔서 우리의 자율이 이루어지도록 간섭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치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해야 하고 자기 자신이 마음을 소유하는 데 책임을 져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는 이유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은혜로운 자율성을 제대로 발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6페이지 내적 세계와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 자신의 내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인간 자신이 자기의 영혼과 정신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신비한 작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divinity)과 인간의 성품(humanity)가 서로 만난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의식 세계와 만나기 위해 찾아오시는 곳이며 또한 인간이 자아와 대화하고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 인간의 마음의 작용의 일관성과 상태는 영혼의 상태의 반영이며 또한 아래로는 그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행동과 삶에 대한 인상이 영향을 주는 곳이다.
마음은 외부세계의 사물에 대하여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마음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상상하고 회상함으로써 새로운 관념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또한 다른 것들과 조합하고 분리하여 연결함으로써 외부의 사물의 세계가 전달해 주지 않은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 낸다. 이게 상상력입니다.
또한 외부의 사물세계에는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데아나 가치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창조적 행위이다. 여기에서 신자의 내면의 역동성이 발휘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마음의 작용은 자신에게 조차도 낯설다.
이러한 마음 안에서 육체와 영혼의 수많은 작용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또 다른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구현해 간다. 인간은 마음 안에서 영혼 안에 있는 다양한 힘과 기능들이 정신세계 안에서 펼치는 수많은 활동들이 질서 있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그 마음으로 집약된다. 인간 존재의 특이성이 마음 안에서 발견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감각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기억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첫째로, 인간은 육체의 감각기관들을 통해 외부의 사물들을 접하게 되고 그것들은 사물에 관한 정보들을 인간의 정신에 전달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감각이라고 한다. 둘째로, 이렇게 전달된 정보들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해석의 작용을 거치게 되는데 아직 그 사물에 대한 명료한 지식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덩어리를 소유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지각이라고 부른다. 셋째로, 이 지각을 질료로 사용하여 지성 안에서의 해석 작용을 통해 사물들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을 인식이라고 부릅니다.
이때에 마음은 이것에 대해 싫음과 좋음, 받아들임과 배척함 등의 정서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나는 정동(affec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동은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고통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인간은 그 마음 안에서 사물들에 대한 지식과 그것에 대한 감정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나 미움의 경향성들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지각 작용이 어느 방향으로 정동이 일어나느냐를 결정하는 경향성이다.
마음의 성향이 나쁩니다. 기본적으로 악합니다. 그러면 내가 보고 듣고 관련되는 모든 정보들을 악하게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해 무지하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고 치면 돈을 볼 때마다 저것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성향이 매우 크면 돈에 관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공금을 횡령한다던지 심지어 남의 돈을 빼앗는다든지 훔친 다든지 심지어 살인을 해서라도 강탈을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합니다. 누구든지 다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보든지 무슨 돈을 보든지 ‘저것만 있으면 불행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방향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들을 해석하는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된 것을 이용하려는 삶의 행동들이 다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정동의 원인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애호하는 감정에 정동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사랑의 경향성이 마음과 영혼 안에 발생하게 되고, 반대로 추함을 발견하여 싫어함의 정동의 경험이 반복되면 그것이 배척의 경향성을 형성하게 되면 미움이 된다. 미움과 사랑의 감정은 마음의 서로 다른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을 구심으로 하는 하나의 동심원을 이루는 외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사랑은 미움과 통하고 미움은 사랑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대역이 싫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보면 그림이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뭔가를 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의 정동을 반복해서 느끼게 되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한 번에 사람을 확 잡아 끌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감정이 내 안에서 반복해서 일어날 때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편으로 가면 추함을 발견합니다. 이런 정동이 역시 반복이 됩니다. 이것은 미움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중립적일 것입니다. 미운 쪽으로 가든지 반대쪽으로 가든지 할 겁니다. 밉거나 사랑스럽지 않고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이 싫증입니다. 권태의 대역입니다. 특별히 미운 것도 아니고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니고 보기 싫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인간의 게으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정신의 문제이고 이것은 육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객관적인 요소도 있지만 주관적인 요소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이 술꾼이라면 좋은 양주를 만나게 되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같이 술을 전혀 안 먹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싼 양주가 주어져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아름답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느끼면 그 선한 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선한 것을 향해 좋은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선하지 않고 나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좋은 감정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면 악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은 일찍이 플라톤 때부터 있었던 고민이었습니다. 플라톤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사람들은 선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선을 지향해야 할 도덕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들어보시겠습니까? 지난 학기에 중간고사를 봤는데 비대면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비대면인데 어떻게 시험을 봅니까? 학생들은 리포트나 몇 장을 내기 바랐을 것입니다. 교수인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욕먹을 일도 없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부가 되겠습니까? 시험기간 중에 집중해서 배운 것을 익혀야 되는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성에서 SAT시험을 보는데 커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려고 하니까 이 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한 번 쓰려고 구매해서 보내 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서 50문제를 내고 모두 들어와서 톡으로 답변을 보내는 것입니다. 문제가 뜨면 30초 안에 답을 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짧은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물을 볼 때 감정이 계속 움직이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정동’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안 해왔습니다. 몇 학생들이 수업 평가서에 그것 진짜 불만이 많다고 올린 것입니다. 이번 중간고사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들어보세요. 내일 모래가 시험이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공부를 해야 됩니다. 지금 공부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게임이 예뻐서 내일 모래가 시험인 학생에겐 공부하는 게 선한 것인데 공부하는 것 보다 게임하는 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선한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고 선한 것을 해야지! 하는 사람은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있고 자율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 유혹을 못 느끼고 사실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빠지는 사람은 자율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미성숙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단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들 주위 친구들 중에 유리멘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나쁘지는 않지만 유리멘탈입니다. 맨날 상처받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남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무너집니다. 남의 말 한마디에 교만해지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유리멘탈을 가진 사람하고 연애를 하면 엄청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 것을 받아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공주처럼 모시고 왕자처럼 모셔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안 받아줍니다. 어떡하든지 자신의 멘탈을 튼튼하고 강하게 해야 합니다.
아주 얇은 유리로 되어있는 포도주 잔이 있습니다. 그것을 쓸 데가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되고 곱게 모셔 놓습니다. 너무 위험해서 거기다가 김치 담가 먹고 물 담아 먹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유리장에 곱게 모셔두고 일 년에 한 번씩 꺼내 쓰는 커다랗고 얇은 포도주잔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바가지같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 두툼한 사기그릇처럼 수시로 부딪히고 탁자 위에 올려놓고 싱크대에서 씻고 그렇게 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멘탈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림을 다시 보면 올바른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고 그것에 계속 감동을 받으면 선한 것을 사랑하게 되지만 반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고 이것에 계속 감동을 받게 되면 결국은 악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오늘의 마음의 사용은 내일의 나의 운명이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7페이지 14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미움의 정동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접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스스로 상상하고 사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보이는 가시적 물체가 없어도 마음은 스스로 상상력을 통하여 형이상학적인 가치나 영원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동일하게 마음에 미움과 사랑이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신주혜 학생. 요즘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입니까?
[신주혜학생] 요즘 파스타를 맛있게 먹고 싶습니다.
내가 파스타 아주 잘 하는 몇 집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가 막히게 맛있는 파스타가 있는데 나는 거기 갈 형편도 안 되고 시간도 없습니다. 너무 먹고 싶은데 밤 12시입니다. 너무 먹고 싶어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파스타 생각을 막 하면 코에서 파스타 냄새가 납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속도 모르는 침샘에서 침이 계속 쏟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생생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의 없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있는 것보다 더 실감나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상상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음식이 없으면 못 먹지만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김재원 학생 어떻게 생각합니까? 먹는 거야 음식이 없으면 못 먹지만 사람은 사라지고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사랑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잊어야 되는데 못 잊으니까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마음에 상상력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힘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성경구절을 묵상하다가 올라 왔는데 마태복음 26장 바로 앞에서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는 가룟유다에게 배신당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팔리리라고 예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라. 종말은 지금 없습니다. 아직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말은 아닙니다. 최후에 종말이 올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먹고 싶은 파스타가 마음에 떠오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을 앞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분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봄은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상상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상상이 아니라 그에 관한 진리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상상이며, 그러한 진리가 주는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을 정서적으로 느끼는 동정이 마음 안에서 결합함으로써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습득된다. 그리하여 보이는 육신의 감각적 사물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가치에 대해 더 많은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원적인 특성이다.
15. 이러한 모든 정동의 작용들이 지식과 함께 감정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안에서 발생한 정동의 작용들은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경험된 지식은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보관된다. 뿐만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경험했던 감정들까지도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 일단 마음의 표면을 통과하여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고통의 감정 없이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16. 마음은 스스로 그러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불러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의 회상이다. 이 회상의 작용은 마치 바다 밑에 가라앉은 물건들을 바다 밖으로 건져내기 위해서는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때 정동 없이 존재하던 기억들은 마음의 표면 위로 올라오게 되고, 표면 위로 올라온 기억들은 또 다시 그것들에 대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때에 과거에 대한 회상이 마음 안에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방식을 따른다. 첫째로, 지식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이다. 어떤 계기에 의해서 자극을 받든지 혹은 연관된 사물들을 감각하거나 상상함으로써 그 기억들이 이끌어내어질 때 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함께 따라오게 됨으로써 마음에 다가온다. 둘째로, 이렇게 어떤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회상되어 마음의 표면에 떠오르게 될 때에 그 사물들을 접하면서 경험했던 감정들도 함께 회상되는데 이것들이 마음에 떠오른 지식과 함께 결합하며 또 다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정동의 정도는 그때마다 각각 다를 것이다.
17. 인간의 영원한 사물들, 혹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에 대한 이러한 정동의 작용은 항상 회상에 의존한다. 만약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자신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행복한 상태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같은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인간이 진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난생 처음 접하게 된 진리에 대해 그것이 진리라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선재하는 영혼 속에 주님이 이미 공통적으로 소유하게끔 갖게 하신 기억이든지 혹은 개별적인 영혼들을 창조하실 때에 그 개개의 영혼에 심어주신 공통적인 씨앗과 같은 인식이든지 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영혼 안에 있는 지식이든지 간에 그것을 지금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 안에 선험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나 진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은 마음을 통과하여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감각적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경험을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감각적인 사물들은 인식 하는 주체인 한 인간을 중심으로 배열된 시간과 공간의 순서를 따라 감각되고 지각되며 인식되고 정동되어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가치들과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러한 사유적인 이데아나 형상들이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영혼도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18. 인간의 마음 안에서 경험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정동은 영원한 특성을 갖는다. 감각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기억도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즉 외부의 감각적 사물들이 마음 안에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나 일단 기억 속으로 들어간 모든 지식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존재한다. 방금 기억된 것이라고 해서 오래 전에 기억된 것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앞서지 못하며, 과거에 기억된 것이라고 해서 방금 기억된 것보다 뒤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분명한 지식과 커다란 정동을 느낀 정도에 따라 어떤 것은 두드러지게, 어떤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우리 기억 속에 남으며, 그것이 아주 기억 속에 없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그것을 다시 불러 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망각이라고 부른다.
19. 마음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광활한 기억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어떠한 가치들에 대한 경험도 인간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 지상에서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이 마음의 문을 통해 우리의 영혼 속을 봄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우리를 향해 선을 베푸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불순종하고 거스르면 진노하시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아를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인간 영혼 안에서의 무소부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영혼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본뜬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물들을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마음의 표면 위에 떠올리고 시간적으로 이미 사라진 사건이나 도래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정동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마치 우리의 몸 안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처럼 원하는 어디에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당신 닮게 창조하신 가장 훌륭한 증거 중 하나이다.
20.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지식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만큼 이나 제한적이고 희미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의 영혼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세계는 무한할 것이며, 하나님처럼 무한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천국에서조차 인간 영혼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완전히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날마다 증진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빛 아래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영혼을 아는 지식도 성장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내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 사이에 어떤 일치를 말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거를 하나의 얇은 막이라고 치고 이것이 의식의 세계이고 이게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다양한 일을 겪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든지 하는 슬픈 일을 만납니다. 그러면 이게 마음에 와닿을 때 막은 막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계속 슬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주 기쁘고 행복한 일을 만나면 감정이 막 떨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다든지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든지 아니면 어마어마한 직장에 들어가게 됐다든지 유학가려는 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했다든지 하면 기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항상 기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강을 해서 무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만 더 할까요? C가 있는데 분노할 만한 일입니다. 이게 내려와서 치를 떨고 죽여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도 항상 그렇지 않고 가라앉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서 마음에는 잊혀졌는데 우연히 A’ 라는 사건을 만나게 되면 이것이 마음을 움직여서 옛날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 참!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다시 올라와서 이 막을 건드립니다. 그러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처음 일어난 일처럼 똑같이 마음의 막이 움직이게 됩니다. 상처의 기억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렸을 때 부모님이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너무 무서워서 울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어느 날 결혼했는데 식구들이 다 어디를 가고 자기를 혼자 놔뒀을 때 멘탈이 약해지면서 옛날의 생각이 떠오르는 공포가 심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의 막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생하게 그것이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일어나도 추억이 이런 식으로 떠오르며 마음의 막이 움직이면서 좋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를 한 번에 끝장낼 수 없다. 라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항상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인드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와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고 그의 마음에 기쁜 감동을 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삶이 훨씬 행복할 것입니다. 저 사람하고 남아있는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할 때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추억이 너무 많다고 그럴 때는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어도 좀처럼 헤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오늘 들은 강의에 대해서 혹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나 질문이 있으면 해 보십시오. 허윤 학생. 무슨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허윤학생] 수업을 듣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지만 끊임없이 외부의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라고 많이 느낍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갓난아기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가 항상 가르쳐주실 때 이거를 만져보라. 한 다음에 말랑말랑하지? 하고 그것을 느끼게 하시고. 애가 상처 입을 정도는 아닌 따뜻한 것을 만지면서 따뜻하지? 하면서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실 필요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체적으로 무엇이 나와 연관돼서 의미가 있고 그것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돼냐? 하는 것입니다. 배운 것처럼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에 있어서 내가 어떤 것에 더 일치되기를 원하느냐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더 좋은 삶, 더 좋은 인격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어릴 때와는 다르지만 비슷하면서도 더 어려워진 느낌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나 자신에게도 너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 하겠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내게도 너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적인 상태에서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수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교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한 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김민아학생.
[김민아학생] 사람이 선한 것을 보면서 계속 아름답다고 여기게 되고 그 선한 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하나님과 접목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생각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내 안에 들어오게 해서 그 선한 것들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구나. 이것을 저한테는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선한 마인드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람들은 좋은 감정이 생기는 것인데 내가 교회가면서 나오지 않던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뭔가 좋은 감정을 일으켜주는 사랑이 있을 때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나 전도에 대한 내용들이 그들 안에 심겨질 수 있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 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친구 중에 한 사람이 미생물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맨날 학교를 가서 실험실에서 하는 일이 현미경으로 병균 같은 미생물들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그것들이 너무 예쁘다는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예쁜 것은 휙 본다고 해서 그것이 예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쁩니다. 그 예쁜 것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작품이고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천재성이 들어있는 작품이라고 그러는데 저거 뭐야! 나도 만들겠다!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습니까? 그것은 잘 모르니까 거기밖에 못 보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것을 예쁘다고 느끼지 않는 이유는 선한 것을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이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악한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지 않다는 것을 결국은 알게 됩니다. 여기서 진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강론을 스킵하고 다음 주에는 아사밤을 읽고 리포트를 내고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발표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