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
녹취자: 조경훈, 오희열
이번 시간에는 잠언 4장 23절 버려야 할 마음,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신주혜 학생부터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신주혜학생 : 어제는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 교수님 강론을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들었던 내용 중에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은 인간이 정서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깨달아지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부분 중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 정서 없이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는 부분이 많이 깨달아졌습니다. 이것을 저한테 적용해서 말씀을 묵상할 때 피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과 어떠한 뜻과 정서가 함께 담겨 있는지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하지 못한 것 같아서 그 부분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이번 강론에서 마음에 대해서 많이 강조해 주셨는데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밖에서 교회 활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부분을 보면서 현재 내 마음이 하나님께 잘 바쳐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돌아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에서도 나오지만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돌려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지? 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 강론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원칙은 있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돌아보려고 할 때, 하나님께 무릎 꿇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부분에서 저한테는 명쾌하게 해결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저한테 그것을 적용해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나도 내 스스로 내 지성과 의지와 뜻을 다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 중에 끝에 진지하게 마음을 시험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서 있는지? 시편에 나오는 마음의 연단함을 요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도 은혜를 받았고 저도 그런 기도를 계속하면서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인지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은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 인간의 마음에 관해서 연구를 하면서 시종일관 놓치지 말고 잊어버리면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될 사실 하나는 인간은 주체적인 동시에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주체적이며 의존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가 우리를 다 길러주지만 우리는 부모의 몸에 있는 장신구나 가방 같은 존재하고는 다릅니다. 부모가 우리를 돌봐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돌봐주는 목표 그 자체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 주되 그 아이가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해줘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고 비주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사랑해줄 때 그 아이는 사랑받은 게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닌 잘못된 방식의 사랑을 받은 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태양학생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도 좋고 새로운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이태양학생 : 주체적이면서 의존적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게 강론을 들으면서 인상이 깊었습니다. 당장 어제 밤에 기도를 생각해 볼 때도 저도 하나님께 저의 전부를 드린 것이 아니고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게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셔서 은혜를 더 부어주셔서 저의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경험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 이런 게 그런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 주체적이면서 의존적이라는 말의 뜻은 이런 뜻입니다. 의존적이다. 라는 의미를 이해하면 지지난 시간에도 공부했는데 음식물이 썩게 하기 위해서는 애쓸 필요가 없고 그냥 놔두면 되고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냉동을 하든지 기름에 담가두든지 건조하든지 등등의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야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찬가지고 의존적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갖고 선한 삶을 살고 한 번 가진 그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 나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존적입니다. 심지어 나를 창조하고 마지막에 나를 데려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까 그런 점에서 모든 것들이 그분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는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로봇은 조종하는 데로 모두 움직입니다. 아무리 기능이 정교하고 놀라울지라도 이미 입력된 데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 평가해서 결정하고 자신이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런 것의 연속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주체가 인간입니다. 그런 고도의 지성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서 당신 비슷하게 생각하고 당신 비슷하게 느끼고 당신 비슷하게 결정하게끔 만드시고 그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기뻐하셨느냐 하면 시비 걸듯이 나오는 이야기가 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셨냐? 만들어놓았다고 하더라도 따먹으려고 할 때 손목을 붙잡아서 못 하게 하시지 왜 그랬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을 주체적으로 만드신 창조에 대한 중요한 법칙위반입니다. 이것을 따먹으면 결국 죄가 들어오고 이 세계가 망가지고 죄로 더렵혀지고 인간이 불행해질 것을 아셨는데도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결국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모두 경험하면서 하나님 의존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의존성을 ‘은혜’ 라고 부르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우리의 ‘의지’ 라고 부르면 의지와 은혜 사이에는 놀라운 조화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가 먼저냐 은혜가 먼저냐? 말하기 전에 논리적으로는 은혜가 먼저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는 의지가 있는 곳에는 이미 은혜가 있고 은혜가 있는 곳에 우리의 선한 의지가 행사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 굉장히 커다란 논쟁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과 인간의 자율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철저하게 타율적으로 움직인다면 책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책임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도 주실 수 없지만 벌도 내리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까뮈에 나오는 것처럼 법정에 가다가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그것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이지 않다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의지와 은혜와 문제는 아주 어려운 문제이고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깨어진다 라고 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깨트려 주실만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깨졌다고 말하면 논리적으로는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는 그저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 가 보면 원 플러스 원으로 팔 때 그라시아 라고 쓰는데 그것이 사은품입니다. get one, one free에서 뒤에 있는 one free가 그라시아입니다. 그것은 공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은혜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고 하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깨트려지는 은혜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주시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깨트려지고 안 깨트려지고는 나의 책임 혹은 나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밖으로부터 날아온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차이는 이 사람은 공짜로 주셨고 나는 공짜를 안 주셨다는 차이밖에 없다고 보면 책임성의 문제가 따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공부와 사색이 필요합니다. 철학적인 필연과 우연의 문제, 자유와 결정의 문제들하고 만나게 됩니다.
내가 설득되고 남을 가르칠 때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깨뜨리시는데 깨뜨려지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깨트리시고 깨뜨려지지 않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안 깨뜨리신다. 안 깨뜨려지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 깨뜨려질 때는 그 상황이 변하여 깨뜨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될 때 깨뜨려지는데 사실 내가 주체적으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존 화이트라는 신학자가 자기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의 회개하는 주체성과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객체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골에 가면 장작을 패는데 여러분들은 도시에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산에서 큰 나무를 톱으로 잘라서 이만한 나무를 구해서 도끼 한 자루가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무를 어떻게 놓겠습니까? 당연히 직각으로 세워놓고 때릴 것입니다. 나무가 크면 정 가운데를 때리면 안 깨집니다. 내리칠 때 모서리를 내리쳐야 되는데 가장 악력이 크게 들어갑니다. 때리고 부족하면 다시 때릴 것이고 그러면 둘로 나눠질 것입니다. 불을 때기에는 너무 크니까 반 나눠진 것을 엎어놓고 쪼개진 부분을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다시 모서리를 때립니다. 그러면 네 개로 쪼개질 것입니다. 그것이 크면 다시 똑바로 세워놓고 한 번 더 때리면 여덟 개로 잘라지는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가 질문하는 게 이것입니다. 동서양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않아도 나무를 자를 때는 다 결을 보면서 자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나무를 자를 때 나무를 옆으로 뉘어 놓고 무를 썰듯이 자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르려고 마음을 먹고 자르면 몇 주 지나면 힘들겠지만 빈대떡처럼 잘라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무의 결이 옆으로 눕혀 졌는데 도끼가 결을 반대로 자른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수고가 드는 것이고 성공할 보장도 없습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도 어떻게 써느냐에 따라서 맛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아십니까? 근육의 결이 있는데 그 결을 따라서 자르면 고기가 아주 부드러워지고 결을 반대로 자르면 고기가 이상하게 같은 고기인데 잘 안 씹힙니다. 고수들은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쓰는데 최소한 2년 이상은 만져야지만 고기를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일식집에 가서 물어보니까 생선 같은 것은 3년 6개월이 지나야지 생선에 손을 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회개했기 때문이고 저렇게 보면 하나님이 회개할 마음을 주신 것인데 그것이 은혜와 의지 사이의 신비로운 작용입니다.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우리가 경험을 하고 나면 분명히 우리가 회개할 마음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진짜 우리가 깨뜨려졌던 적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진정으로 깨뜨려진 사람은 자신이 자기 마음을 깨뜨렸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나를 깨뜨려 주셨다고 말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깨질 마음을 가진 게 진정으로 깨뜨려진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을 하면서 자기가 깨뜨려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허윤 학생
허윤학생 : 저의 안에 강퍅해지는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 부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부패하도록 방치하는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강론을 들으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성화도 구원을 받는 것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라고 생각하는 생각들 아니면 나는 성화에 있어서 아무것도 행할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참여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예전에는 있었는데 강론을 들으면서 그 생각들을 얼마나 미워해야 하는 생각들인지 강론을 들으면서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부패성을 방치하도록 내버려두는 생각들이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강퍅함을 계속 키워나가는 생각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제 안에서 계속 성화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연약하다고 핑계하는 생각들을 끊임없이 미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금 은혜와 주체에 대해 들었던 생각이 신주혜 학우님이 출애굽기 본문을 말씀해 주시면서 생각난 게 유월절 사건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어린양을 너희가 직접 잡아서 피를 우슬초에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식을 통해서 속량하실 것이라는 의존적인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없이 문설주에 바르지 않고 집 안에 들어와서 나는 하나님을 믿어. 구원하시겠지. 라고 했다면 과연 심판의 천사가 그 밤에 임했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짜 믿고 의존한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방도를 따라 어린양을 직접 잡아서 이 양이 대신 죽어서 피를 뿌림으로 우리 집은 유월하시고 구원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인 로마서 5장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저는 은혜 안에서 죄의 노예된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진정한 은혜 안에서의 주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노릇 당하고 통치를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은혜 안에서 생명 안에서 신자가 왕노릇 하리로다. 라는 것이 저는 성화의 또 다른 표현인 것 같아서 좋아합닌다. 앞으로도 강론의 말씀을 따라서 강퍅함을 일으키는 생각들을 미워해야 되겠습니다. 신학과 2학년 김재원B 학생. 마이크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기계를 점검해 보세요. 다음 고하경학생.
고하경학생 :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얘기를 많이 듣고 스스로도 순종하려는 노력을 나름대로는 하려고 했던 것 갔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내가 강퍅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순종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통해서 오는 관습들 당연한 행동양식들 나눔을 하니까 교회에서 나눔을 하기 위한 수단처럼 전락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강퍅한 마음은 아직 그대로고 어떻게 보면 한 번도 꺾인 적이 없구나. 내가 교만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죄성에 스스로 집중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완전함에 기대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찬학생 : 저는 이번 강론을 통해서 왜 신자의 마음이 강퍅하게 흘러가도록 두시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강퍅한 순간에도 신자의 마음에 강퍅함의 끝을 두시고 그것마저 영혼을 완전히 쇄신할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값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이 은혜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 김민수 학생. 마음을 지키기를 포기할 때 왜 그러는 것 같습니까? 그대의 경험에 비춰볼 때 마음을 잘 지킬 때도 있었겠지만 지키기를 포기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제 못하겠다 하는 때도 있었을 건데 그 때 심리를 잘 생각해서 왜 그렇게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을 거의 포기하거나 포기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까?
김민수학생 : 제게 마음지킴에 있어서 힘들고 좌절하고 마음지킴에 대해서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을 한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끊임없이 약하고 타락한 죄인임을 바라볼 때 내가 마음을 지켜도 또 다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데 죄를 짓는 반복적인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저의 삶에 대해 회의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마음지킴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정말 없을 때 계속 좌절하고 넘어질 때 마음 지키기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 : 저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마음 지키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다가 왜 다시 회개하고 마음을 지키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다시 마음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동수학생.
우동수학생 : 경험에 의해서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 중에 하나는 마음지킴을 포기하면서 이렇게 살아서 뭐해. 그냥 내 마음대로 살지. 이런 마음이 들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멋대로 살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처음에는 편하고 아무런 삶의 지장이 없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나? 라는 회의감이 들고 이렇게 살아도 행복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살아도 내 욕구와 내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더 내 마음이 채워지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내가 은혜를 받았을 때 만족감과 행복감을 알기 때문에 회의감과 포기감에 휩싸여있을 때도 좀 더 행복하고자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마음 지키기를 포기할 때도 힘들어서 그만 둔 것이고 다시 마음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할 때도 너무 고통서럽기 때문에 다시 마음을 지켜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강론에서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지키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이 지옥이 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행복했던 사람들 중에는 불신자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무엇인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말씀이 사라지고 나면 마음이 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는 지겹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잠시 즐겁지만 마음에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 자기 욕심을 따라 방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따르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일단 요정도로 하고 다음 시간에 더 하도록 하고 지난 시간에 공부한 그 다음 28페이지 제 2번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2페이지 1번에서는 마음의 방향에 대해서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배향, 전향, 정향 그리고 마음의 방향과 힘, 마음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성령님. 우리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성령님이 돌이키신다는 점에서 성령님은 힘이십니다. 힘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철학적인 담론들을 이야기하면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2장에서 다루어 볼 것은 마음의 전 포괄적인 영향입니다. 설명하자면 마음은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모든 삶의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보는 인식도 확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사물을 판단하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택’ 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아니면 ‘버림’ 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무엇을 가지고 하시냐 하면 첫째는 인간의 이성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물에 대한 감성입니다. 감정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데 일종의 정서입니다.
이성은 이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본질에 관한 답을 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순환구조에서 인과관계의 구조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이것은 이성에 속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서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해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의 차이와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판단이 합쳐지면서 여기에서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지식의 탐구를 통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호불호의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짠 음식을 먹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나는 모든 음식이 짜야 맛있다’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덕과 관련될 때 좋아하지 말아야 될 것을 좋아한다든지 좋아해야 될 것을 싫어한다든지 할 경우에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교육을 어려서부터 시킬 때 도덕적으로 선하고 훌륭한 것을 좋아하게 하고 나쁘고 열등한 것을 좋아하지 않게 하는 정서 속에서 사람이 자랄 때 훌륭하게 인간의 삶에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굉장히 힘든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술 자체를 안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이 유혹이 될 리는 없습니다. 안 마시고 있지만 술을 마시는 성향이 옛날에 술을 마셨는데 아직까지도 성향이 사라지지 않은 사람은 굉장히 힘들게 그 상황을 이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습관이 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인생을 가볍게 사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큰 무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면 인간이 사물을 판단할 때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도 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이 싫으냐 좋으냐? 의 관점에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함께 판단합니다.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이런 것들이 두 개가 함께 공존해서 뭔가를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가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배제시켜야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어서 낭만주의도 나오고 하는 굉장히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 이것이 무엇이냐? 끝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사색함으로만 인간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데카르트의 오류입니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끝까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느낌 이런 것에 의해서 사실 많은 판단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두 친구가 있는데 이 사람도 모르고 이 사람도 모르는데 객관적으로 얼굴도 멋있고 모든 면에서 공부도 잘하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에게는 끌리지 않고 저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모두 한 사람을 만났을 때 한 사람을 세부적으로 뒷조사해서 사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끌림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에 대한 끌림도 그런 것과 유사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소위 이야기하는 레종이라는 이성만이 아니라 꼬르 혹은 생띠몽이라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심정을 의미합니다. 과학적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은 자연세계에서만 설명이 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높은 정신세계로 들어가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신앙도 이런 것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겠습니다. 2번 마음의 전 포괄적 영향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순일을 회복하게 될 때 그러한 마음의 정향은 그의 온 삶에 영향을 미친다. 순일이라고 하는 것은 integrity, 불어로는 앙떼그리떼입니다. 어떤 사물이 그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꽉 채워진 상태입니다. 물이 물로만 순수한 물로만 꽉 차있을 때 그것은 진짜 물이 됩니다. 거기에 다른 것을 섞으면 물이 아닙니다. 더 맛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순수한 물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이 순일성을 가지고 있을 때, 인간의 영혼이 영혼인 것으로 순수하게 꽉 차 있을 때 그 때 인간의 영혼은 가장 훌륭하게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의 작용이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별 우스운 답안지가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지난번처럼 시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순일성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마찬가지로 순일성을 가질 때 가장 아름답고 균형 잡히고 건강한 육체가 됩니다. 이상적인 것은, 물론 그것도 각기 다르겠지만 저는 마블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주인공 같은 근육질은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으로서 아주 멋있으면서도 탄탄한 몸이 되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생활을 육체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가 순일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몸속에 적합하지 않은 온갖 나쁜 것들이 들어오게 될 때, 육체는 순일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암입니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이 되는 비결은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비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자아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데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주 순수한 순일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는 자기를 비운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영혼과 육체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인 인간 존재는 존재와 마음 그리고 그 존재의 작용의 결과인 삶이 하나로 되어 있는 통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전향하게 되면 그의 삶은 전포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킨 신자들의 전포괄적인 변화이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곳이며, 따라서 자아의 핵심을 이룬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그 마음의 변화 때문에 인간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인간 정체성의 기저가 된다.
인간의 이 마음은 도덕적 질서에 속하는 영혼과 물질적 질서 안에 있는 육체가 함께 만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도덕적 질서를 규정짓는 도덕적 본성과 자연적 질서를 따르는 자연적 본성이 만나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인간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대해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육체에 의해 우리 마음이 영향을 받고,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너무 피곤하고 몸에 뭔가 활기가 없으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활기차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힘이 없던 몸에도 새 힘이 솟아납니다. 대표적으로 군인들이 힘든 훈련을 할 때 기합을 넣고 군가를 부르는 이유도 그런 것들을 북돋으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보를 할 때 혼자 뛰어가면 너무 힘들지만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줄을 맞춰서 군가를 부르거나 “하나 둘, 하나 둘!” 기합을 넣으면서 간다든지, 혹은 어디까지 도착하며 어마어마한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육체가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과 육체는 굉장히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문에서 수반물리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퍼베니언스라고 하고 한자로는 이렇게 씁니다. 물리학인데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정신과 물질 사이의 어떤 관계들을 추적해가는 것입니다. 약간 유물론적인 접근을 하지만 거기서도 우리가 배울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밀접한 연관 관계 속에 만드셨기 때문에 사실 학문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과학적으로도 많은 부분에 대해 설명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선택이 지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의 입을 열고 내시경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원숭이를 막 놀리면 위장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화면에 보입니다. 피가 몰리면서 위가 새빨갛게 변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편안할 때나오지 않던 위산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쓰면 위가 나빠지는 것이, 한의학에서도 위와 뇌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위, 장, 뇌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와 장이 안 좋으면 뇌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통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대부분 위와 장에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신장에서도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이 우주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는 서로에 대해서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나이에 운동하라고 말입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나는 그렇게 못해서 굉장히 후회가 되는데 지금은 자매들도 운동해야 합니다. 자매들은 남자가 서너 명이라면 힘들겠지만 운동하지 않은 남자 한 사람 정도는 가볍게 눕힐 수 있도록 하십시오. 유튜브에 보시면 국기원에서 이탈리안 갓 탤런트나 브리티시 갓 탤런트,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가서 최고의 상을 받는 장면을 보십시오. 보시면 자매들이 3m 높이로 뛰어올라서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지금 젊었을 때 부지런히 운동을 하십시오. 그러면 정신적으로도 덜 쳐지게 됩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열심히 운동하십시오.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육체를 갖게 되고 그것이 좋은 정신을 갖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좀 더 나가겠습니다. 육체의 환경을 통하여 마음은 어떤 일을 겪으며 또한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의 상태를 인하여 마음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마음은 육체와 영혼에 대해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은 영혼과 육체에 대해 능동성도 갖는다. 영혼 안에 악한 경향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것에 대한 정동을 일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한 예이다.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한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정동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은 궁극적으로 영혼의 경향성들과 힘들을 바꾸어놓는다는 점에서 마음은 영혼에 대해 능동성을 갖는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에게 명령함으로써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
문제는 마음이 마음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안 듣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쁜 지시를 내릴 때 안 듣는 것은 좋지만 올바른 지시를 내리는데 마음이 안 듣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마음이 고장났기 때문에, 질병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으면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장애가 있으면 마음이 마음에게 올바른 것을 명령해도 잘 안 움직이게 됩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가끔 이 마음이 또 다른 마음에게 나쁜 것을 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그 마음이 그것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충분히 그런 것들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유혹을 만나지만 거기에 다 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굴복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마음을 지키며 살지 않으면 그것은 언젠가는 자기도 지킬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문제가 시작될 때, 그 때가 가장 마음을 지키기 쉬운 때이고 그것이 계속 발전하고 진전하고 나면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댐을 생각해보십시오. 댐에 조금씩 구멍이 생기고 물이 새기 시작하면 그때는 조금만 노력하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커져서 호스로 쏟아지듯이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흙을 들이부어도 계속 흙이 물에 휩쓸려 가버립니다. 그러다가 둑이 터지고 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자가 없게 됩니다.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기 마음을 떠나야만 자기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나의 결함을 끝까지 모르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수없이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대도 자신에게 그런 성격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지혜롭고 덕스러운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을 아주 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갇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수시로 탈출해서 바깥에서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마치 남을 대하듯이 공정하게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렇다.” 라는 이야기를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에게는 아주 놀라운 반성의 능력과 함께 삶의 다양한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마음의 개방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옛 사람들은 “지혜자”, 혹은 “현자”라고 불렀습니다. 현자와 우둔한 자의 차이는, 우둔한 자는 자신의 마음에 갇혀있고, 현자는 자신의 마음에 갇혀있지 않고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아서 그 마음을 고치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 현자입니다.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에게 명령함으로써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 인간이 육체적인 어떤 습관에 빠지게 되는 것들 중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는 성향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다든가 혹은 잠을 덜 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체의 이러한 습관화된 욕구에 대해 저항하는 마음의 반복적인 선택은 결국 육체의 경향성들을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마음은 육체에 대해 능동적이다.
제가 스물한 살 때 회심하고도 가장 많이 싸웠던 것은 잠이었습니다. 그렇게 잠자는 것이 좋았고 많이 잤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자는 것입니다. 한참 자다보면 허리가 너무 아파서 깹니다. 할머니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렇게 싸웠습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 보면 “건강한 사람이 여섯 시간 이상 자면 죄 짓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이었지만, 지금은 구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잠 안 오는 약을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그 약을 계속 먹었습니다. 타이밍이라는 약인데 그것을 먹으면 정신이 초롱초롱합니다. 각성제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두 시간씩 자면서 승진시험을 공부하고 국가고시를 공부했는데 지금은 잠이 안 와서 잠이 오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마음이 저항하면 육체의 습관도 바뀌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시간의 순서에 있어서 마음을 통해 산출되는 행위에 앞선다. 그러므로 마음에 머무르는 생각이 아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그의 삶과 모든 행동에 대해 전 포괄적 성격을 갖는다. 심지어는 영혼에 대해서도 그러한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를 보고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나 인간의 마음을 보면 그의 영혼까지도, 미래의 행동까지고 예측할 수 있으니 마음이 인간 존재에 미치는 전 포괄적 영향 때문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영혼이 변화되라고 하거나 영혼을 돌이키라고 하거나 바꾸어 놓으라고 당사자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인간의 마음을 겨냥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져야 하는 마음이며, 세상에 대해 사랑을 끊어야 하는 마음이며, 또한 하나님을 향해 정향하여야 하는 마음으로 등장한다. 그 마음은 순전함을 지켜야 할 마음이며, 흔들리지 말아야 할 마음이며, 또한 사악한 욕망에 점령되지 말아야 할 마음이다. 이렇게 성경이 마음을 겨냥하는 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전 포괄적 영향이다.
계속 하겠습니다. 29페이지 중간 아래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은 인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마음 안에서 영혼의 신성(divinity)과 육체의 인성(humanity)가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참된 마음을 지닌 인간 존재이다. 성도의 영원한 숙제는 이 마음을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만드시고 중생을 통해 재창조하신 그 상태를 유지하고 그 순일성 안에서 온전해져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싸움터는 자기 밖의 세상이 아니라 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경험되는 그 상태를 외출적인 삶 속에서 그대로 구현하며 궁극적으로 그것에 모자라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삶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 백성의 지상 삶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 하실 때, 제일 먼저 그들의 마음을 거론하셨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므로 신자는 일생동안 자신의 마음의 중요성을 알고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배우며 자아를 알아가고 진리에 합치하는 여부를 판결하며 그 마음을 갈고 닦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한다. 치열한 전투를 치룬 군인들이 여가의 시간에 총기를 분해하고 청소하며 정비하듯이 인간은 수시로 이 세상이라는 부르심 받은 소명의 터 위에서 전투적인 삶을 살고 수시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가를 살피며 성찰하여야 한다. 인간의 동물과 구별되는 위대함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의 존재로서 마음을 가진 피조물들도 인간뿐이고, 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들어다 보고 반성하는 것도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와 닮은 방식으로 자신을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30쪽입니다. 마음, 하나님과 만나는 곳.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자기 자신인 인간의 성품이 만나는 곳이다. 이것은 곧 성령과 인간 본성의 작용의 만남을 의미하며 여기에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니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며 여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인간은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나누게 된다. 또한 죄악 된 본성과 은혜의 성령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 “자리”라고 하는데 신앙의 자리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승우 학우, 신앙의 자리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이승우 학생 :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 그러면 죄의 자리는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이승우 : 죄의 자리도 똑같이 마음일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그렇습니다. 사랑이 깃드는 자리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겉보기에는 편안해보이지만 인가의 마음속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 그리고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고백들은 굉장히 많은 부분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데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와 함께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오?” 합니다. 선이나 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고, 죄는 그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자신의 한 마음 안에서 싸웁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나는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신학적인 논쟁이 있지만, 로마서 7장의 그 구절을 저는 청교도들의 전통을 따라서, 그리고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라서 사도바울이 신자가 되기 전의 고백이 아니라 신자가 되고 난 후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도도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잘 지키지 못할 때 엄청난 죄와 유혹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인한다”는 말은 말로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해서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기도하시고 최고로 성령에 충만하실 때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분에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출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고대의 문학가들이 인간을 묘사할 때 인간 속에 악마와 천사가 동시에 있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가 이야기한 것도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매 순간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살아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A. 마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마음 자신이 자기를 봄으로써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의 존재의 위치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이 확인되는 존재이다. 하나님 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며, 인간 또한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니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 자체이시니 시간 안에 묶인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마음을 통하여 그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시간에 묶이면서 지상의 사물을 관측할 뿐 아니라 또한 시간에 묶이지 않은 채 사물을 관측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마음에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하나님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영혼의 고향인 영원을 아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어떻게 이 두 가지 작용 시간 안에 묶인 사물들을 한시성 안에서 바라보는 작용과 그 사물들을 한시성을 초월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물을 보시는 것처럼 그와 유사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작용이 공존하는가? 이것은, 한시성이라고 합니다. 시간 안에 한정되어 있는 성격입니다. 예를 들어, 한시성 안에서 사물을 보면, 여기 사람이 있고,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물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한시성 안에서 보면 자연세계인데, 또 다른 인간이 감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크기, 모양, 색깔, 사물의 종류까지 다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한시성 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시성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문제, 그리고 이것과 이것에는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있다면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은 자연세계를 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시성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예를 들어, 늙다, 젊다, 늙어간다, 점점 젊어 보인다, 뚱뚱해진다, 날씬해진다, 이런 것들은 파악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변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가? 그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시성 안에서만 보면 안 되고 이 한시성을 넘어서서, 한시성을 초월해서 사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파스칼의 이야기를 해보면, 커다랗게 세 수로 시제를 나눕니다. 여기의 시제는 “무”입니다. 여기의 시제는 “유한”입니다. 여기의 시제는 “영원”입니다. 따라서 자연은 여기에 속합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완전히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이론도 나왔다가 깨어지고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또 깨어지고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를 읽어보셨습니까? 그 책에 보면 인류 최대의 사기가 있는데 그 중에 하가 화폐라고 합니다. 농업도 그렇게 봅니다. 농업 이전까지는 모두 평등한 자연, 수렵 채취 사회에서는 인간이 평등했는데 농업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니까 돌아다니면서 확실성이 없는 사냥이나 작물따기 같은 일들을 안 해도 되는 정착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평등했던 사회의 자유가 있었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억압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땅을 중심으로 작물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은 저장시설을 가지고 그것을 권력으로 삼아서 그렇게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족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제도적인 국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학설도 뒤집힙니다. 수렵, 채취사회에서도 절대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증거들이 볼리비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나타나는데 분명히 수렵, 채취 사회였는데 어마어마한 무덤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결코 공평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같이 몰려다니는 그룹이 있어서 함께 공동사냥을 해서 고기를 나누는데 권위를 가지고 나누는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계급입니다. 그런 수렵사회인데도 평범한 사람들이 구할 수 없는 부장품들이 발견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버려진 채 짐승의 시체처럼 들판에 묻혀서 사라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부장품들이 발견됩니다. 이런 증거가 드러나면서 자꾸 새로운 스토리들이 나옵니다. 결국 인간 불평등이라는 것은 물론 농업사회가 도입되면서 불평등이 촉진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과연 평등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은 항상 누군가에게 지배받기 보다는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하는 원초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점에서 인류의 불평등은 오랜 역사적 전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라멕이 나와서 자기를 해치면 가인보다 훨씬 더 큰 벌이 주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내들에게 자신의 폭력적인 힘을 과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성적인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무력에 의한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소년들이 실수해서 자신을 상하게 했는데 나는 그 아이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힘의 불평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들이 벌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데 그것도 가인은 불평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서 동생을 죽인 것 아닙니까? 이런 인간의 불평등은 인류사회에 도입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타락하자마자 바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파스칼로 돌아가면, 여기 표에 나온 것처럼, 이 안에 있는 어떤 사물을 올바르게 알려면 이것과도 관계해야 하고 이것과도 관계함으로써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뿐이라고 한 사람들이 데카르트나 몽테뉴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었고, 파스칼은 독실한 기독교적인 세계관 속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써는 이 연결된 세계를 알 수가 없고, 알 수 없다면 사실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이성과 함께 신앙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쌩띠몽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성 이외에 또 다른 판단의 감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다음입니다. 조금 더 하겠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시간에 묶이면서 지상의 사물을 관측할 뿐 아니라 또한 시간에 묶이지 않은 채 사물을 관측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마음에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하나님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영혼의 고향인 영원을 아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어떻게 이 두 가지 작용 시간 안에 묶인 사물들을 한시성 안에서 바라보는 작용과 그 사물들을 한시성을 초월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물을 보시는 것처럼 그와 유사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작용이 공존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시간 안에서 변하는 사물들을 관측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밖에 있는 현재적 사물들을 지각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자기 밖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은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도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관측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박막과 같은 현재 속에서 그 사물들을 인식한다. 사물의 움직임과 작용들은 박막의 현재 속에서 관측된 그 사물의 기억들은 과거가 되어 인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현재적 사물을 보면서 박막의 시간의 현재 속에서 그 사물들을 보지만 그 사물들을 볼 때, 그 사물의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되는 것으로 본다. 단, 그 연속은 인간의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것이니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물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며 현재를 보게 됨으로써 박막의 현재 속에서 대면하는 사물들의 움직임이 관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속에서 현재의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단면적으로 그것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무수한 기억을 현재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현재를 보는 것이며 그 현재는 그런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과거의 기억으로 회귀되며 그러한 인식들은 언젠가 그 사물들을 대면하거나 혹은 상상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기억 속에 보전된다.”
이것은 인식론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나비를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이 나비를 봤습니다. 예전에 나비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칸트와 플라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플라톤은, 인간의 마음 안에 나비의 이데아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인간이 볼 때 그 이데아와 연결시키면서 나비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봅니다.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여덟 개의 범주가 있다고 봅니다. 크기, 모양, 색깔 등등입니다. 나비를 볼 때 이 여덟 개의 기준, “놈”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결국 어디에 귀속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식물인가? 아니다.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 포유류인가? 동물 중에서 다양한 종류가 나올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이다. 새인가? 아니다. 등등, 이렇게 하면서 마지막에 나비라는 파일로 들어가게 되고, 그 나비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까지 보았던 나비와 다른 나비일 경우에는 이 파일이 확장되면서 내가 예전에 보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나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기억 속에 저장되고 다음에 이와 유사한 나비를 볼 때는 판단력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동영상을 보게 되는 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뤼미에르에 의해서 영화가 처음 나오게 되었을 때, 찍어 놓은 사진이 하나, 둘, 셋...있는데 이것을 여기에 붙여서 감아놓고 빨리 돌려보니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 속에 있는 잔상의 효과 때문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진짜 없어져도 이 잔상이 30분의 1초 동안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장 이상을 돌리면 이 잔상이 남아있는 동안에 다음 것이 오고, 또 그 다음 것이 오면서 동영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처음에는 이 정도로 해서 움직임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과학 기술과 함께 영상기술이 발전하여 수백 장을 돌리면서 어떻게 보면 실물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실감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것들이 잔상의 효과입니다. 이 속에 있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시신경의 부정확성이고 인간의 뇌의 작용 사이에 있는 간극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상이라는 문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인간 속에 남아있는 사물에 대한 인상,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상이 남아있음으로써 그것들이 계속 연속해서 이어지면서 우리가 이런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넓게 보면, 어떤 사건이 있고 나면 그것이 우리 뇌 속에 축적이 되고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그때의 학습한 바를 가지고 활용해서 빨리 판단하고 생각하는 데에 도움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이패드 같은 기기를 사다놓고 처음에는 작동을 잘 못하다가도 몇 번 연습을 해보면 잘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은 하나의 오토마톤적인 지식입니다. 뭔가 자판기에서 꺼내는 것 같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육체를 위해서는 자연적인 것만 필요하면 될 것입니다. “벼락이 칠 때는 절대 나무 아래로 가면 안 된다, 전에 그랬다가 죽을 뻔 했다.” 라든지,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칠 때는 언제 너울성 파도가 올지 모르니까 뚝방에 나가면 안 된다, 한 번은 떠내려가서 죽을 뻔 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육체를 잘 보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과 관련하고 도덕과 관련하여 이야기할 때 그것은 뒤에 감춰져 있습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친구와 다퉜는데 그것은 매우 나쁜 일이라서 반성을 하는데, 다툼이 왜 일어났을까? 그때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그것이 무엇 때문에 상대방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고칠 수 없지만 나는 나 자신을 고치려고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으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보면서 옳음과 그름을 구별해내고, 또 필요하면 그 사람과 대화해서 “이런 이런 것들은 내가 잘못했는데 너도 앞으로 조심해라, 그래서 우리 서로 좋은 사이가 되자.” 하는 반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삶의 기예, 삶을 사는 예술 같은 기술을 말합니다. 그것을 갖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억 속에서 반성하고 저장하면서 이런 art of living 들이 생겨납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의 인생에는 끊임없는 고통밖에는 없습니다. 성찰하지 않고 생각이 없는 사람일수록 물질주의적이고 감각주의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5월 4일 화요일에 만나겠습니다. 지금 9주를 했고 다음이 10주인데 여러분에게 책을 한 권 보내드리면 읽을 용의가 있습니까? 읽을 용의가 있는 사람은 손 들어보십시오. 이 책을 여러분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2천만 원 독후감 현상공모가 진행 중이고 여러분은 자격이 될 것입니다. 신학과, 기독교 교육과 다 될 것입니다. 교회 음악과는 안 될 것 같은데 심사위원이 판단할 것입니다. 1등 400만원의 장학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보내드릴테니 받으시면 12주째인 5월 18일, 책을 받으시고 두 주 반 정도 시간이 남을 테니 그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독후감으로 한 페이지를 써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