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음(10)
인간과 마음(2021.05.04._총신대 온라인 강의)
녹취자 : 박나리, 조경훈
[목사님] 4일 날은 부드러운 마음의 회복과 유지입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 먼저 강론 발표부터 지난번 못하신 분들 중심으로 해보고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이성훈 학생 발표해 보십시오.
[이성훈] 순종하기를 힘쓰고 노력도 하는데 자꾸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지속적인 경건 생활을 실패하며 순종하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 예외 없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을 따라 삶을 단순히 만들어서 잡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목사님] 김동주 학생 발표해주십시오.
[김동주] 저는 이번 강론을 통해서 마음이 통회함과 통회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쓰는데 필요한 작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회개할 때 그냥 알고 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 앉아있다가 찬양을 듣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하고 회복하고 가는 일반적 과정을 생각했었습니다. 이번 강론을 들으면서 그 과정들을 조목조목 나눠서 거기에 존재하는 작은 요소들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죄에서 멀어진 장소, 보편적으로 교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찬양이 불리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가 교수님 표현대로라면 머리를 차갑게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신중함을 기울였습니다. 그 말씀에 감동되어서 마음에 겸비함을 가지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성령 하나님께서 회복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 저질렀던 죄이지만 언제든지 저를 넘어뜨릴 수 있는 죄의 개연성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죄를 이겼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죄를 지었을 때의 잠시 기쁨보다 크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제가 아무 생각 없이 회개하고 마음을 유지했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을 조목조목 하는 가운데 이런 과정들이 뒤따랐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이 이끌리는대로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가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회심을 위해 그런 자리에 찾아가고 그런 과정을 위해 더 힘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홍은성 학우 발표해주십시오.
[홍은성] 저도 이번 주 강론을 들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내 마음에 있는 생명의 샘들을 지키고 유지하고 사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는데,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한 방법 네 가지와 유지하는 방법 세 가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서 내가 지금까지 왜 마음이 강팍하게 되었고 부드러운 마음을 쉽게 잃어버리고 다시 강팍한 마음으로 돌아갔는지를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 상태에 있더라도 유지하고 지키는 일들이 많은 노력과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갖추고 준비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함으로 인해 금방 강팍한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서 회복하는 데에도 체계적으로 마음을 들여다보고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오랫 동안 시간이 걸림으로 인해 그 과정 가운데서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번 강론을 들으면서 교수님께서 이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살면서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 요소마다 설명해주셔서 이번 주는 내 삶 가운데 그런 것들을 지금 어느 과정 가운데 있는지 생각하고 마음을 하며 머리를 차갑게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 마음, 내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하나님 앞에서 분석함으로써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새롭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음으로써 나아가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체계적인 지식과 과정을 통해 파수꾼이 성을 파수하듯이 지키는 데에 목숨을 걸고 싸움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임하은 학생 발표하십시오.
[임하은] 사실 마음 지킴에 관해 배우기 전까지는 사도 바울 같은 성경 속 인물들이나 존경하는 목회자 분들의 삶을 보면 그들의 삶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그들의 삶이 저와는 다르게 느껴져서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선한 성정이 있거나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웠지만 저는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번에 마음 지킴에 대해 배우고 특히 이번 강론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한 많은 몸부림에 대해 배우면서, 그들이 타고났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해 정말 많이 싸웠기 때문에,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정말 많이 싸웠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소망을 얻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그렇게 살아서 신자의 최고 소명인 성화에 이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목사님] 이승우 학생 발표해주십시오.
[이승우] 저도 강론을 다 듣고 나서 느낀 점은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가진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매일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참 쉽지 않고 때로는 그만두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교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게 힘들지라도 그것이 내 맘대로 죄 가운데 살아서 고통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이 길을 계속 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이 길이 쉬운 길은 아니고 평탄한 길은 아닐지라도, 넘어졌을 때를 생각하며 죄 가운데 살면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그것보다 이 길이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럽기에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김민아 학생 발표해주십시오.
[김민아] 저는 강론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거룩한 소명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유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교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하는 길을 설명하실 때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만이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력한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드러운 마음을 꾀하시는 분도 강팍한 마음을 깨뜨리시는 분도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기도할 때 내 마음이 부드럽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립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말씀하실 때 우리의 순종의 범위는 전 범위가 되어야 하고 정도에 있어서는 완전히 가깝게 하려고 힘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제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원인이 결국 꾸준한 경건 생활, 지속적인 경건 생활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매일 시간을 하나님께 예외 없이 드리는 것, 경건 서적을 읽고 기도하고 거룩한 모임을 갖는 것을 힘써야 한다는 것과 내 영적 생활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플하게 정리하는 삶을 살아야된다는 부분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성화의 소명을 온전히 이루고 싶은 마음을 많이 갖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최근에 내가 이율곡의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이율곡이 격몽요결이라는 책에서 당시 군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선비의 길입니다. 선비가 지향하는 것이 공부를 많이 해서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출세하는 것 자체가 한 인간으로서 잘사는 한 길이었습니다. 선비들의 공부하는 삶의 원리가 ‘수기치인’입니다. 자기를 갈고 닦으며 자기를 수양하며 타인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다스린다고 할 때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큰 권력으로 위에서 짓누르면서 지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치’,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기준이 있겠습니까? 그 기준은 ‘도’입니다. 객관적인 도입니다. 우리로 이야기하면 진리입니다. 이 도를 따라서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니까 도에 어긋나서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행합니다. 우리 식대로 표현하면 마음 지킴을 모르고 마구잡이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자유스러운 사람처럼 보이고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그런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가장 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자신 신앙의 경험을 보면 결국 신앙에서 미끌어질 때는 신앙 생활에서 속박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나중에 자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말할 수 없는 속박을 느끼고 방탕한 삶을 선택합니다. 마지막에는 엄청난 속박을 느끼며 자유를 찾아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치’한다는 말은 결국 ‘안’이라는 말로도 씁니다. 도 가운데 이 사람들을 돌아오게 해서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군자가 학문을 하고 뜻을 품고 벼슬에 나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확고하게 세계관, 인간관, 국가관에 대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왕이라도 만약에 이 도에서 벗어나면 사정 없이 진언을 해서 왕으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당시 선비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그 안에서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길로 들여보냅니다. 율곡은 사람들이 그런 학문을 하는 이유가 인간으로서 잘 살기 위함인데 그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게으른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 어느 한 군데 지긋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지 못해서 마음이 바람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도 학문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늘 소란하여서 끊임없이 출렁거리면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공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사는 데에 대부분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매일 부딪히고 고통받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원인이 무엇인가, 그리고 결국은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게 되는 것인데, 내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을 하고 내 마음이 어떤 식으로 내 안에서 기능을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진리에 묶고 하나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서 올바른 관점을 유지하면서 맑은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향락이라는 것을 특히 젊은 시절에 굉장히 죄악시 했습니다. 지금은 향락이 극단적인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항상 학문을 탐색하고 사색하면서 자신의 인간성의 깊이를 더해야 할 나이에 향락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미디어 문화를 보면 먹고 입고 놀러 가고 마시고 즐거움을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배척할 수 없지만 거기에 몰입하면 우리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있어서 굉장히 조심하면서 자신의 마음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기도 생활하며 살아야 합니다.
몇 분만 더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김태웅 학생 발표해 주십시오.
[김태웅] 저는 교수님의 강론을 듣는 일이 이번 학기에 제일 재미있는 일입니다. 정말 너무 좋습니다. 지성적으로 체계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을 제가 지금 이 어린 나이에 받아먹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것을 저에게 적용하는 일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 안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받은 작은 소명을 감당하겠다는 집념으로 하겠다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는 관심도 없고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똑같은 신학을 하는 사람들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저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종인가 이런 생각을 해도 교수님 말씀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봤을 때 너는 잘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너 깨끗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길 중에서 위선이라는 말이 딱 꽂혔습니다. 나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많이 실패하고 갑갑함으로 넘어지는데 저에게 사람들이 종종 물어봅니다. 어떻게 해야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서 저는 그 사람들에게 잘 말을 해줍니다. 교수님에게 배운 지식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이런데 어떻게 해야 하고 말을 해주는데, 그 말을 해주고 다시 저를 돌아보면 지식은 그래도 성장은 하지만 제가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도 저를 힘들게 합니다. 지식만큼 제 자신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장 기쁘면서도 다음 주는 안 그래야지 그래도, 다음 주에 이것을 쓰려고 하면 또 그렇습니다. 또 괴롭습니다. 계속 그렇습니다. 그래서 맨날 요즘 제가 쓰는 말을 보면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느끼는 감정이 항상 똑같습니다. 잘해봐야지 하면서도 맨날 실패하는 것이 정말 괴롭습니다.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나아가서 벗어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소명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나는 정말 부르심을 받은 종이 맞는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가 명령을 합니다.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의 명령을 따라서 먹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입에는 달지만 뱃속에서는 쓰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언가를 몰랐던 인생에 대한 사실을 깨달을 때 당연히 기쁨이 있고, 그리고 궁금해하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즐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학문의 즐거움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 마음에 결이 그 지식을 필요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결이 있어서 들을 때 깨닫고 너무 즐겁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눈에서만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되고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질서와 실제 내 안에 있는 질서가 너무 다릅니다. 내 마음은 옳지 않고 진리는 옳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면 결국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고통이 일어납니다. 그 고통이 없으면 사실 진정으로 진리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괴로운 것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이 변화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이 볼 때에는 이런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깨달을 때 즐겁고 그것을 마음에 적용할 때에 많은 고뇌가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에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그 진리의 말씀 자체를 가지고 보면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는 이 사람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지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빛이 얼마나 좋은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열 때 햇빛이 비추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눈에 병이 난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이야기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이 음식이 너무 좋고 맛있습니다. 음식이 맛있기 위해서는 쓰고 시고 짜고 달고 기름 맛이 나는 오미가 들어가야합니다. 그런데 입이 헐어서 병이 난 사람들에게는 그 맛있는 음식이 고통이 됩니다. 그러면서 진리가 자기를 인정해주고 칭찬할 때에는 좋아하고 진리가 꾸짖을 때에는 그 진리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끝까지 견디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자면 너무 가물었습니다. 몇 달씩 비가 안 왔습니다. 그래서 비가 너무 안 오면 땅이 딱딱하게 변합니다. 지금은 다 아스팔트이지만 옛날에 아스팔트가 없던 시절에는 딱딱하게 돌덩이처럼 굳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집니다. 소나기가 정신없이 쏟아지고 그칩니다. 그러면 온 거리에 물이 흥건합니다. 그런데 곡괭이로 땅을 파보면 땅속에는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불과 5cm 정도만 흙이 젖었고 속에는 완전히 굳은 땅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도 만약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속에는 하나도 변화되지 않은 마음이고 겉에만 무언가를 느낀 마음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끊임없이 끌어들여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이 작업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앙으로 돌아가서 보면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을 때 그렇게 죽고 고통스러운 것만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고통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거기에서 죄와 싸우고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일들에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이 설교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중요한 것입니다.
몇 분 더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분만 더 하고 우리들이 실라버스로 넘어가겠습니다. 김재원A 학생 발표해 주십시오.
[김재원A] 저는 들으면서 뒷부분에 교수님께서 믿음의 지구력을 말씀해주셨는데 귀에 확 들어왔습니다. 들은 이후에도 계속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마음이 강팍해지고 딱딱해졌을 때에는 세상을 향한 지구력이 강해지고 그와 반대로 믿음의 지구력은 약해지는 상황에서 매일 매일 이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것들, 매일 매일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완고함들을 깨뜨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제 믿음의 지구력이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심삼일에 삼일이라도 가면 좋을 텐데 하루만 갔다가 다시 돌아갈 때도 많고 그렇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모난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찰나에 뒷부분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셨던 순간들, 그 하나님이 깨진 마음 사이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셨을 때에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들, 내가 도저히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따뜻함을 내가 너무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명히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이 한 두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길목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고해지고 딱딱해졌을 때는 이렇게 분명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내가 비참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참혹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기억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함이 부어졌을 때 그 아름다운 경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성장시켜 가시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믿음의 담력을 얻었습니다. 강론을 듣던 중에 인간관계로 인해 마음이 어려웠던 순간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룰수록 안전하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너무 큰 위로를 받는 경험도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평가하는 것, 어떻게 바라보는 것, 규정하는 선입견을 넘어서 충분히 그 사람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과정들을 거치면서 최대한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을 함부로 내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기에 연약하고 넘어지기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면, 마음에 대해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주체적인 인생을 살고 싶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고 입고 마시고 놀러 가고 하는 그런 일들에 빠져서 산다고 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능력이 안됩니다. 그것을 최고로 즐길 능력이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도 안 되고, 시간적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수준에 맞게 하위의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요새 인터넷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제가 여러분 나이 정도 되었을 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놀러 갔다 오고, 무엇을 사 입고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었습니다. 금기시라기보다도 아주 천한 행동이었습니다. 지금은 알바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돈을 모아서 좋은 호텔에 가서 밥먹고 자고 화장실도 찍어서 올립니다. 이렇게 좋은 호텔에 묵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마다 보는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그런 것들에 만약 몰두하면서 산다면 자기를 성찰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못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사는 것이 주체성 있는 삶입니다. 수업 시간에 들어오면 매학기마다 하는 이야기인데 형제자매들 대부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늘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는 뼈 있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자매들에게 와서 좋아한다고 하는 이야기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너 아니면 나 죽을 거라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체성을 갖지 못한 사람과 살면 그것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주체성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물속에서 두 손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물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친구가 좋아하는데 목숨 걸고 덤벼드는 사람에게는 장가 가지 마십시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간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체는 자기 스스로 인생에 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내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니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일이 주체적이어야 합니다. 통일된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나오는 일관성 있는 선택이어야 합니다. 그런 내공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뇌하고 거기에서 자기가 체험적으로 답을 찾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도 여러분의 삶을 뿌리재 흔들 수 있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오체투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체성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은 아주 뚜렷한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뜻과 통합니다.
그래서 산에 보면 아주 작은 묘목부터 시작해서 아름드리 나무까지 있습니다. 평생을 묘목처럼 살다가 분재처럼 늙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목처럼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세상 향락이나 좇고 순간의 기쁨을 찾으면서 살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길이고,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고 결코 얻을 수 없는 길입니다.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인간, 인생과 연결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하면 신앙에서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방황합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갔습니다. 강의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31페이지 다섯째 줄부터 할 차례입니다. 발표 못 하신 분들은 조금 있다가 하시고 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마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 어떤 방식으로 교통하는 지를 두 번째로 이야기합니다. 시간 속에 묶이지 않은 채 시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서 나타납니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며 현재를 거쳐 과거로 돌아가고 기억되는 모든 세계에 대한 상념은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간 순서를 갖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과거로 회귀하여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모든 사물들은 순서와 상관없이 하나의 평면에 인과관계로만 자리할 뿐입니다. 10년에 일어났던 일을 1년 전 일과의 인과관계로 해석하고 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초시간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시간적 성격이 과거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이런 인식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마음 안에서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 만날 때 그분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영원 안에 거하심으로서 그 초시간적인 존재가 인간의 마음에 현재적으로 지각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은 이처럼 위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귀에 소리치지 아니하시고 지성에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비록 육체의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를지라도 육체의 감각으로는 하나님께 말하지 아니하니 육체의 소리는 공간을 돌아올지라도 외치지 아니할 수 없었던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말하게 됩니다. 결국은 기도가 그런 경우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큰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길어올려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만 하나님이 기도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실 때 알아보는 고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 마음,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대면하는 유일한 곳인 그 마음을 그 거록한 만남이 이루어지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자의 중요한 의무이며, 이것 없이는 어떠한 신자의 거룩한 삶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진리와 성령으로서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자유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하나님이 오시는 곳이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성령의 작용과 움직임을 지각하며 인간 본성의 작용도 지각합니다. 자아도 인간 본성 안에서 자기를 부연하고 성령도 본성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이 자기의 책 제 7권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Holy ghost works in us and with us, not out of us and without us.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지, 우리 바깥에서 우리 없이 역사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신비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악을 택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을 선택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본성으로는 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을 선택할 때는 하나님이 작용을 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작용이 있고 특별한 작용이 있습니다. 모든 불신자들까지 포함해서 보면 그 사람들이 선을 선택하는 이유도 사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인데도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양심에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런 것을 가지고 후회하게 되는데 그런 죄에 대한 후회도 성령님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일어나지 인간 없이 인간 바깥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작용과 인간의 본성은 아주 놀라운 밀접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속에서 이루어지면 심지어 내가 스스로 하는 건지 성령님이 하시는 지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화합이 이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고 선을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본문읽기] 이러한 본성의 작용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인간의 본성의 작용하는 곳인 마음의 작용하시고 통치하신다면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의 독특성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갈등 없이 작용하는 것이니 본래 인간의 영혼은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성령은 그런 점에서 인간 영혼의 본성이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가 거기서 이질감을 안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 안에 오실 때 마치 당신 홀로 계신 것처럼 자유롭게 작용하시며 또 인간의 영혼은 성령께서 오실 때 그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 홀로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작용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 자체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당신과 가장 닮은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칼빈이 이것을 재미있게 묘사를 합니다. 칼빈도 어거스틴의 설명을 빌려 온 것인데 기독교강요에서 인용을 하면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의지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을 말로 비유하자면 포악하고 서툰 기수가 말을 때리고 강요하는 것처럼 다루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의지와 만날 때 평생을 말과 함께 살아온 기수가 말 위에 올라가면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달리는 것처럼 성령의 작용과 인간의 의지가 화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승마를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으시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고급 스포츠이니까 저도 몇 번 못 타 봤습니다. 한 번 중국에 갔을 때 경주를 하는 사람들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곳에 말을 풀어 놓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무술시범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리고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청룡도를 휘둘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 놀란 것이 기수가 큰 칼을 들고 말을 타서 저기서 출발하는 게 보입니다. 조금 지나니까 사람이 없어지고 말만 달려오는 것입니다. 밧줄도 없으면서 사람이 칼을 들고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의 배에 딱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만 달려오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말의 등, 옆구리, 배로 자유롭게 칼을 흔들면서 움직이고 마지막에는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말 위세 서 있는 것까지 봤습니다. 그 사람들이 곡예사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옛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군인이라면 그렇게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자유자재로 무기를 쓰고 활도 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날 야생마 한 마리 잡아다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훈련을 하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말과 기수의 관계처럼 성령님이 인간의 본성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런 경지에 까지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서 동행하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읽기]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 그리고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자유롭다.
[목사님] 여러분들은 지극한 선부터 시작해서 아주 끔찍한 악에 이르기까지 모두 행할 수 있고 위로는 천사와 비슷하게 아래로는 짐승과 거의 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빈센조 라는 드라마를 혹시 보셨습니까? 마지막 회에서 송중기가 끔찍하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피아의 세계에서 그런 것은 그렇게 끔찍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짜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더 잔인한 것도 폭력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런 것을 인간이 결국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유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가 되지만 인간의 욕심에 의해 인도된다면 파멸에 이르는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 때문에 속박을 받게 되고 행복해지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공장이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읽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누리는 이 마음의 자유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의 모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이 누리는 그것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시지 않는 자유 속에서 생각하시고 의지하시나 인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존재와 관련된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시지 않으시는 독립하시고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자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속해 있으며, 당신 자신도 스스로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으시며 또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에 의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자유를 제한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
[목사님] 우리의 육체도 물질입니다. 마지막에 화학적으로 분해되고 나면 원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소에 열을 가하면 그 원소도 또 다른 원소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는 지구처럼 엄청나게 다양한 원소들을 가지고 있는 장소는 아주 드뭅니다.
여러분들이 들었던 6,800년 전에 우주에서 직경 10km 정도 되는 운석이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서 온 세계에 핵겨울이 오고 공룡이 멸종되는 kt멸종사건 같은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할 때 지구의 성분을 가지고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6,800년대의 지층을 보면 도저히 지구 안에서는 없는 외계 물질의 흔적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추적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도 결국은 마지막에 원소로 돌아갑니다. 먼지들을 매일 보지만 사물이 분해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먼지가 분해되어서 맨 마지막에 까지 가는 것이 원소입니다. 원소들이 다시 뭉쳐지면서 무엇인가 물건이 이루어지고 사물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사뭇 다른 것입니다.32페이지 중간 부분을 계속 하겠습니다.
[본문읽기] 창조될 때에도 하나님을 원인으로 삼아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됨에 있어서 또한 다른 질료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함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의존한다. 육체는 땅에 있는 물질적 질료를 통해 형성되었고 이것들의 창조주도 하나님이시다. 더 나아가, 인간의 영혼 또한 영원적 질료로써 창조되었으며 그것의 창조주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물질의 세계에 자신의 덕을 입히심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도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주님을 덕 입음으로써 존재를 계속 한다. 이러한 덕 입히심은 공중에 나는 작은 참새 한 마리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또한 인간 영혼은 더더욱 영혼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을 덕 입음으로써 영혼으로 존재하며 작용한다. 이렇게 인간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 역시 이러한 의존의 관계 안에서의 자유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당신 아닌 피조물로 창조하신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 밖에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창조하셨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 밖에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만물을 당신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세계의 그 모든 아름다움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하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존재의 원리로 삼는 모든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를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으니 육체에 대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영혼의 성령을 통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이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게 하셨다. 바람이나 물, 풀, 돌과 새들, 그리고 육축들은 스스로 더 많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도 없고, 덜 의존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덕 입히시는 한도 내에서 그 덕을 받아들이며 수동적으로 의존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모든 피조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가진 동시에 또한 다른 특성을 가진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로 인간 안에 있는 수동적 의존의 특성이다. 인간은 이 점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같은 계열에 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수도 없고, 덜 의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을 따라서 태어나고 흘러가고 죽고 소멸될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에 대해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당신의 덕의 한계를 늘리지도 못하고 축소하지도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덕 입음에 대해서 완전히 수동적이다.
[목사님] 좀 어려운 얘기인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물질세계를 먼저 보면 우리의 철학적인 사유에 있어서 과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과학에 대한 이치를 이해하면 철학과 만나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될까요? 1미터 70센티 정도의 키에 약 75kg정도 몸무게의 인간의 몸은 자연의 세계에 놓고 보면 결코 큰 몸집이 아닙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크기가 1미터 10센티 밖에 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때 등치가 작으면 짐승들이 만만하게 보니까 인간은 짐승들의 밥이었다고 합니다. 음식섭취를 잘 하면서 후천적으로 인간의 몸이 커져서 지금의 몸의 크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르만족이나 게르만족들은 크고 아시아인들이나 앵글로색슨도 작습니다. 이런 인간의 육체를 놓고 보면 사실은 아주 외소하고 작은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확대해서 우주로 가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더 넓습니다.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길이가 약 150~160억 광년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상상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거리인데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160억 광년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에게 측정 가능한 거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망원경이 나오면 135억 광년에 있는 거리에 있는 별을 본다고 하니까 기대가 됩니다. 과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거리가 135억 광년이니까 그 바깥에는 무엇일까? 공간이란 무엇일까? 하는 철학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진짜 그럴지 아닐지 모르지만 유력하게 우주 창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빅뱅이론에 의하면 공간이라는 것도 빅뱅과 함께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간으로 존재하기 전에 그 바깥의 세계는 무엇인가? 공간에 끝이 있다면 공간 바깥은 또 무엇인가? 공간 바깥이 공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세계인가? 우주가 1초에 2,000km씩 팽창하고 있다고 하는데 팽창되는 지점에서 여기가 공간이라면 공간이 아닌 지점에 구분이 있을 텐데 공간이 아닌 부분은 공간과 어떻게 다른가?
물리의 법칙들은 블랙홀에서는 적용이 안 됩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이라는 단어를 치면 빛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블랙홀 자체는 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주위에 빛이 삼켜지는 것의 테두리를 보면서 거기에 블랙홀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을 추측하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경우는 모든 것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블랙홀이 그것들을 다시 뿜어내면 다시 반대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을 추적하는 사람인데, 그러면 모든 사물들이 빨려 들어간다고 할 때 그 사물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심지어 별까지도 삼켜져 버리는데 빨려 들어가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지구는 너무 작기 때문에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없지만 지구가 블랙홀이 되려면 손톱 하나의 크기에 지구와 똑같은 질량을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지구만 한 무게의 질량이 손톱 하나만 해 질 때 블랙홀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양이라고 하는 것이 삼켜져도 블랙홀로 따지자면 백만분의 일이니까 이 공 만 한 정도의 블랙홀이 된다고 봅니다. 그 블랙홀이 시간도 잴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대한 블랙홀들은 엄청나게 많은 별들을 삼켰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블랙홀이 물질을 삼켰을 때 없어져 버렸는데 없어졌다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로 간 것인가? 거기에 빛이 없고 시간도 없다면 거기는 또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 우주의 공간에 인간을 놓고 보면 사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고 말 할 수도 없을 정도의 아주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간은 불과 100년을 못 살고 죽습니다. 우리나라 평균 기대수명이 82세 정도인데 절반은 82세 이전에 죽고 절반은 82세 이후에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있다가 죽는데 죽음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그런 인간의 운명을 생각하면 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쳐버리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쳐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지 제정신이라면 거의 미쳐버릴 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잠깐 살다가 태어나는 건데 무한한 우주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데 나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죽으면 7년이면 완전히 분해가 되어서 뼈밖에 남지 않는데 그런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 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요지는 모든 사물들이 태어나는 것은 없는데서 태어났지만 더 멀리 보면 없는데서 저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있으신 분이 그것을 없는 것으로부터 있게 하셨기 때문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태어나게 하신 분이 그것을 있게 하시는 동안에는 있고 있는걸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는 사라져서 영원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지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없을 때도 하나님은 계셨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창조되기로 계획되었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동안에도 그 분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고 죽은 후에는 그 분의 뜻을 따라서 그 분께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똑바로 눈을 떠서 알아야 될 사실은 보이는 모든 만물들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있게 하였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있게 된 사물들은 있게 한 자를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아름다움 자체가 모든 사물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면서 물질로서의 몸인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인 몸이 자연 속의 일부이고 그 자연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더더욱 자연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질료가 없습니다. 연필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흑연과 나무와 도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질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재료가 없습니다. 무슨 재료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물질인 육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똑같이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까워지고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부패하게 되고 악에 가깝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이야기는 자기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최근에 한 선교사의 간증을 들었는데 한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르노에 중독이 되다시피 했다는 것입니다. 걱정을 했는데 어느 날 그것을 딱 끊었습니다. 어떻게 끊었는지 물었더니 이제는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가 됐는지 물었더니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나니까 그런 것이 모두 싫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순전한 삶, 거룩한 생활, 경건한 인격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이 그 분 안에 숨을 쉬고 있을 때 마치 감자를 땅에 묻으면 저절로 감자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뻗어서 감자가 번식하는 것처럼 거룩한 인격과 아름다운 생활, 선한 행실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마음의 갈 곳이 하나님의 품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불교처럼 일체 자기를 비움으로써가 아니라 자기를 채움으로써 자기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채움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채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성껏 예배드리고, 아침에 성경을 읽고, 새벽에도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당연히 어떻게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어떻게 할 때 그런 일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마음에 대한 공부인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자연을 의지하고 자연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똑같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있을 것이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본인의 의견을 이야기 해 보십시오.
[이성훈 학생]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목사님] 좀 더 집중해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발표를 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문주빈 학생]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고 배우기는 했었는데 교수님처럼 설명해 준 것은 사실 처음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이나 저의 상태를 봐도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장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때가 많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것, 결국은 문제가 생기는 것, 그리고 인간의 본질, 원래 상태 상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것을 고쳐나가야겠다고 제 스스로에게도 생각을 하고 제 주변이나 요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목사님] 문주빈 형제가 아까 얘기하기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는데 제가 하나 질문을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지 않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해야 되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왜 현실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문주빈 학생] 앞에 물어보신 것은 좀 더 생각하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뒤에 것은 평상시에 생각을 해 봤을 때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함을 많이 느낀다고 생각을 했고, 나는 괜찮아! 좋은 것을 많이 느끼고 있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허함이 있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존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사람의 본질상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물어보신 것에 대해 답을 도출을 해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사람이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잘 살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임승현 학생] 하나님께 속해서 사는 삶 보다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삶이 그 순간에는 편하기도 하고 그게 눈앞에 답이 잘 보이는 것 같아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일상을 잘 살아갈 수는 있지만 마음 안에 있는 공허함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느낍니다.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세상 쾌락이나 세상이 주는 어떤 것들을 통해서 뭔가 나를 채울 수도 있겠지만 마음 안에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허함은 절대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마음 안에 있는 공허함은 계속 채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른 것들로 채우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terrify라는 단어를 씁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불확정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마지막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당연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한 번 쯤은 사람들이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저것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됐을까? 나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는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계속해서 고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내가 어디로 왔을까? 답을 못 냅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뜻으로 내가 여기 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일까? 나는 왜 죽는 것일까? 죽은 다음에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사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그 답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물건을 주웠다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야 써먹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라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못 내립니다. 그런데 답을 못 내리면 굉장히 불안해야 할 텐데 불안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을 해 보십시오.
[김재원B 학생]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이 가는 데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는 내 진심이 더 강하고 나의 생각이 더 크니까 불안해하지 않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나에 대한 생각이 더 크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나에 대한 생각이 어떤 식으로 커서 너무 너무 긴급한 문제에 대한 대답이 없이도 살아갈 수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할까요?
[김재원B 학생] 구체적으로는 얘기를 못 하겠습니다.
[목사님] 제가 하나만 이야기를 하고 수업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수업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많이 합니다. 저 혼자 강의하라고 하면 잘 할 수 있고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수업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생각을 하면서 이 수업을 따라와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들이 이 수업을 들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현란하게 이야기를 해 줘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해 줘도 그것은 내 인생에 답이지 여러분들의 인생에 답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수학공식을 배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유가 계속 이 질문을 따라와야 됩니다. 끊임없이 질문이 생겨나고 그것을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수업에 참여하거나 숙제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쉽지 않은 기회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학교에서 과목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게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이니까 대충 이 시간을 대충 지내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에게 내는 숙제는 이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할 테니 잘 생각하고 오십시오. 내가 다음 주에 꼭 물을 것입니다. 오늘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인간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우리는 기독교인이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을 놓고 볼 때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내가 왜 여기에 살아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확률적으로 여러분들 같은 나이에는 덜 죽는다는 것일 뿐이지 죽습니다.
놀라운 것은 작년에 20대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조사해보니까 그 중에 절반이 자살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자살을 한 것일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죽은 다음에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과거에 대한 것들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데 그것도 나에 일어난 과거만 알고 있습니다. 남에게 일어난 과거는 잘 모릅니다. 알려진 것만 부분적으로 압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일 분 후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관성에 의해서 오늘 일 분 후에는 수업이 거의 끝날 것이며 다음 주에는 다시 수업에서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제 죽은 많은 사람도 그저께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데 그러면 그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은 무시무시한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이 없다면 도대체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여기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불안해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어두운 밤인데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던 공간에 어느 나라인지도 알 수 없고 우리나라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어디인지도 알 수 없고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도 알 수 없는 동네에 여러분들이 버려져서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무섭지 않겠습니까? 전혀 좌표를 알 수 없는 광야 같은 곳에 버려졌다면? 바로 그런 심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도 아주 해피하게 즐겁게 살아갑니다.
제가 질문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거의 미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대체 그것에 대한 답이 없이는 인생을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찾지 못했는데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한 주간 동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답변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장난스럽게 하지 말고 깊이 있는 답변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이 무시무시하고 엄청나게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안 찾고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