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왜 혼자인가?
-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녹취자: 허혜숙
오늘 제 4장 왜 나는 혼자인가? -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그대에게 공과를 시작하기 전에 영상을 같이 한 번 보시겠습니다.
성도 1 : 사람들이 사랑할 때 주체의 환상이나 희생의 환상에 빠지면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자녀를 사랑할 때 이런 환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타인인 자녀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 생기고 항상 걱정되고 긍휼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의 시간과 삶을 많이 포기하고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자녀에게 맞춰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녀들은 저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제가 원하는 모습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가 자녀를 사랑 한만큼 상처를 받고 외로움도 커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아니면 비극적인 사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사랑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도 왜 외로울까? 이런 문제를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나는 왜 혼자인가?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타인과 구별되어 독특한 자기를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사라지지도 않고 없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누구도 자기를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외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것은 근본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죄 때문인데 여기에 보면 사람이 이렇게 어두운 죄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깨졌습니다. 여기로부터 들어오는 생명과 은혜 그 다음에 사랑, 이런 것들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집니다. 그 다음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서 떠나면 이것이 찢어져서 N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자기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나니까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지배하고 정복해야 될 세상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가 되었으니 결국은 이런 속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깊은 소외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서 외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속주의와 현대인의 외로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타락하고 죄 짓고 그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Secularism 이라고 하는데 사회의 제도를 세우거나 운영함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일체 배제하는 것 이것이 세속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모든 가치 기준을 일체에 배제해 버리고 나면 세속주의는 다분히 물질주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니체 같은 경우를 보면 여기에서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고 여기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 눈에 보이는 것만 요것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은 이 튜브 속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쪽도 알 것 없고 저 쪽도 알 것 없으니까 사실은 인간은 이것만 사실이고 진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쪽 바깥도 설명이 안 되고 이 후도 설명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인생을 보게 되면 그러면 결국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물음의 대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가도 대상이 안 되고 그러면 이것만 가지고 인생이 설명이 될 수 있느냐?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 모든 인간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다 배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보이는 세상, 물질 이런 것들만 남는 것입니다.
물론 이성을 초월하는 가치의 기준을 버렸지만 인류애라든지 이런 것들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세속주의 하에서 그런 것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림d[ 보면 사람들이 세상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의 즐거움에 빠지고 돈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결국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 깊은 심연과 같은 인생의 근원을 살피고자 할 때 거기에서 인간은 어떤 깊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몰두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파스칼도 팡세에서 이야기 합니다. 시장에 가면 돈 몇 푼 주면 살 수 있는 고기인데 왜 귀족들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짐승몰이를 시키고 사냥을 하고 하는 이유가 고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이 어떤 심각성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외롭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저는 이것을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으로 대비를 했습니다. 주체의 환상이란 내가 너무 외롭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되면 나 혼자 살아갈 때 이 주체의 무거움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을 나는 주체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환상을 가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뜨겁게 사랑을 하면 마치 열기구를 탄 것 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인생의 무게가 사라져서 모든 중력에서 벗어나서 하늘로 떠오르는 것 같은 그런 환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체의 무게가 사랑을 통해서 가벼워지는 것 같은 그런 환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의 환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은 이성간의 사랑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를 거의 망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섹스피어는 이 사랑을 광기라고 했습니다.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체의 환상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잠시 인생의 무게를 열렬한 사랑 속에서 잠시 회피할 수는 있어도 그 무게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 주체의 환상을 많이 가지고 저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내 인생의 무게가 깃털 같을 거야 라고 돌진할 때에 상처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끝나고 나면 별 볼일 없는 허무한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아서 계속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니코스 카잔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처럼, 조르바는 주체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여자, 저 여자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누구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서 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는. 우리의 정신세계로는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는 희생의 환상입니다. 희생의 환상은 내가 이렇게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혹은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지성을 다하면 감천 될 것이다. 내가 지성을 다하면 하늘도 내 정성을 알아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는 내 자식들이 내 마음을 알아 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 알아주면 어떡할 것입니까? 그러다가 안 알아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처음부터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니가 알아달라고 내가 사랑하는 것 아니다. 그러면 인간이 너무 외로워집니다. 가끔 목사님들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습니다. 이런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을 교회를 향해 목사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서 안 그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저도 주체의 환상에 많이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고 내가 교회가 될 수 없고 교회가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교인이 알아줬으면 내가 이렇게 섬기면 언젠가는 알아줄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안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외롭지 않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소홀한 것이 아니라 동기 그 자체가 자식인 네가 엄마 사랑 몰라주면 나는 한이 될 거야, 죽어서도 구천을 맴돌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럼 뭐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자녀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삶을 사는데 그 삶이 아름다워서 자녀들이 보게 되고 나중에 남편이 보게 되고 감동을 받고 이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런 감동을 주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몰라주면 나는 옴팍 뒤집어 쓴 손해 본 사람이고 알아주면 그 때서야 본전을 찾는다? 그러면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있는데 그런 미숙한 삶을 살아서 되겠습니까?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닌 것을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주체성을 가지고 남편도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해야 됩니다. 주체성이 없이 그러지 말고. 교회에서 상처받았다는 사람들 많습니다. 보면 교회가 그 사람에게 잘못해 준 것이 있어서 상처를 받기도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주체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맨발로 걸어 다니면 흙이 묻듯이 세상이라는 땅바닥을 걸어 다니고 살면 상처를 받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나다. 내가 나로 있을 때 남편도 사랑하고 자녀도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까 공부 시작할 때 인터뷰한 자매님이 그런 경우입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합니다. 자기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내가 주님 앞에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체의 환상을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기가 불분명해지고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신이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체의 환상에 빠져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희생의 환상에 빠지지 마라, 그리고 결국 나중에 이것이 한이 되게 하지 말라. 그것이 문학에서는 이것이 아름다울지 모르나 본인에게는 결코 행복하고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외롭고 고립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낫느니라”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 삶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또 다른 영상을 한 번 보겠습니다.
성도 2: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들에 나름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저의 마음에는 공허함과 버거움만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는 나의 애씀을 누군가에게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저의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주지 못했습니다. 가끔 보상을 받으면 기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보상받지 못하는 날이면 실망감과 함께 인생의 회의를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한 인정욕구에 메말라 있으면서도 정작 내 인생을 지탱해 내야 할 힘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그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애씀과 세상의 인정도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되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재 제 삶의 도전입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명랑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참 은혜로운 간증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고 보상을 받고 싶어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독립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자식새끼들 다 소용 없어, 절대 잘 해 주지 마, 니 행복이 최고야’ 그러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설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 구라고 거짓말입니다. 결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 소용이 없다, 다 쓸데없다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자기의 어떤 보상과 이익의 관점에서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시작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면 소용 있기 위해서 자식을 사랑한 것입니까? 쓸모 있기 위해서 자식을 사랑한 것입니까? 무슨 쓸모?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의지를 가지고 주체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희생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내가 주체적으로 자녀를 사랑한 것처럼 자녀들도 이 다음에 커서 주체의 환상이나 희생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주체성을 가지고 부모인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됐지 뭘 더 바랍니까? 그리고 그렇게 바랄 정도로 자식한테 잘 해 줬습니까? 뭘 잘해줬습니까? 있다구요? 상처는 더 많이 받았답니다. 그것도 웃기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결국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발견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저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체성을 드러내는 구절이 이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주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고 더 이상 소유하려고 탐내는 것도 없는 그런 평정심을 가진 자아로서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그 발 앞에 더럽게 치사하게 굴복하지 않으며 누구의 사랑을 받아도 그 위에 야비하게 군림하지 않은 자유롭고 또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 같은 자유인으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거기에서 상호존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험하게 욕하고 그것이 왜 그러는지 아세요? 전부 다 그것이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고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고 관심 받고 싶어 하고 그런 어떤 자아의 질서가 무너진 것들이 그런 일그러진 욕구로 밖으로 분출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삶에 자신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사람을 많이 지배해도 자유가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문제1) 사랑하면서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 소외받고 있다는 감정
문제2) 인간이 외로움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와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이유: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에
문제3) 현대인의 외로움은 세속주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세속주의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을 어떻게 오염시켰습니까?
세속주의는 언제나 있었던 일이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가 되고 엄청나게 많은 생산물들이 쏟아지면서 인간의 관심을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데 많이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영상과 예술, 현대의 감각적인 문화에 환호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실리콘 벨리의 CEO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 아이폰 핸드폰 스마트폰 이런 것들을 못 쓰게 한답니다. 저 아랫것들이나 쓰게 하지 고귀한 집안의 자식들은 그런 감각적인 기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놓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상상력과 창의력 주체적인 사색능력 이런 것들을 박탈해 간다고 하는 것을 실리콘 벨리를 이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멀리 하면서 수만은 사람들은 신제품에 열광하면서 몸과 마음을 바치고 소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어떻게 오염시켰냐 하면 모든 관심은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고 보는데 있게 함으로서 결국은 영혼이 독자적인 사색을 할 수 없슴.
문제4) 외롭지 않은 사랑을 하기 위해 깨뜨려야 할 환상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주체의 환상과 희생의 환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자신과 타인의 완벽하게 교통할 수 없는 면들을 인정하며 서로 경의를 표하는 그런 사랑을 가져야 된다. 나만 자유로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자유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자유 ‘Freedom’ 이것은 오직 속박을 받고 있을 때에는 오직 하나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From what’ 도대체 자유인데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인가? 속박을 받고 있으면 뭔가 붙들고 있는 것이 있는데 벗어나야 됩니다. 속박 받고 있을 때에는 오직 이것만 목표입니다. 그런데 자유를 얻고 나면 그 다음에 이것으로서는 인간이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가난에 푹 절면 자유가 없습니다. 가난에 푹 절어서 빵 한 덩어리도 사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난이 속박이 됩니다. 그러면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돈을 법니다. 그러면 속박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도표로 돌아가 보면 필요한 것은 ‘To’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무엇으로부터와 무엇을 향한 자유가 같이 주어질 때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이 군대를 갑니다. 군대 가기 전에 머리를 벽에 박습니다. 옛날에는 36개월이었습니다. 벽에 머리를 박고 쌩 쇼를 하다가 군대에 갑니다. 바짝 졸아서 처음 6개월 동안 업니다. 그 때 일병도 달고 상병도 달고 해볼 만 하다. 하면서 애들이 살이 찝니다. 뒤룩뒤룩 살이 찝니다. 신기하게도 제대할 때가 다가오면 살이 쫙 빠집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군대로부터의 해방의 시간은 다가옵니다. 그런데 무엇을 향하여서 이 자유를 누릴 것인가? 대책이 안 서는 것입니다. 대학도 못 들어갔지, 집에 돈도 없지, 사업을 하자니 밑천이 없지 뭔가 펜대를 돌리고 먹고 살자니 학식이 모자라지, 어떻게 인생을 헤치고 살아가야 될 것인가 이 생각을 하게 되니까 바짝 바짝 마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 속박을 당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가? 그것을 못 찾았을 때 인간에게 이런 문제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5) 주체적으로 멋진 사랑을 하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자원도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외롭지 않은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찾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