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 5장 죄의 지배의 성질 : 거역과 악(2)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녹취자 : 허혜숙
오늘은 죄와 은혜의 지배 제 5장 죄의 지배의 성질 중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죄의 재배는 악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흔히 죄와 악 이것을 함께 엮어서 쓰는데 그 이유는 죄와 악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영어로 Sin 이라고 하고 악은 Evil 이라고 하는데 죄는 그 모든 악의 밑바닥입니다. 거기에서 시작이 되어서 그것들이 악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마치 죄가 뿌리라고 한다면 악이 올라와서 나무에 매달리는 열매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죄는 죽음으로 인해서 정죄가 되고 죄를 짓던 사람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를 보면 죄와 악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죄는 악을 지향하고 악은 죄를 강화합니다. 어려운 말이라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성향, 즉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성이 있으면 계속해서 악의 열매를 맺고 싶어 하고 악을 저지르고 나면 이것은 다시 인간의 내면을 더 완악하고 강퍅하게 해서 이 죄가 더 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죄의 결과가 죽음, 사망으로 이어지게끔 귀결되어 있는 것이 죄와 악의 구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죄와 악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이라고 할 때 결국은 그 반대의 개념이 덕에 대한 반대의 개념으로서의 악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이 창조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만물들이 가장 행복한 상태에 있고 그 안에 인간도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실현되도록 살아가는 사람이 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 선이 실현되도록 살아가는데 이것을 우리들이 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덕스러워’ 그 이야기는 기독교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덕스럽지 못해’이 이야기는 이런데 이바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밑에 사람을 보면 마음이 지금 시커멓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악이라고 부릅니다. 이 악은 신자 안에 있는 창조 목적을 거스르는 나쁜 것, 덕은 창조목적에 이바지 하는 좋은 것,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덕, 혹은 덕이라고도 하고 미덕이라고도 하는데 미덕은 아름다움과 탁월함인데 ‘선’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실현과 유지에 기여하는 인간의 존재와 행동입니다. 그리고 ‘사악’은 추함과 비참함인데 이것을 거스르거나 대항하는 인간존재와 행동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덕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의 악입니다. 이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유명하고 난해한 책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여 본성적으로 혹은 다른 방법에 의하여 개별적인 사람이나 사회구성체에 대해 연합이나 애정을 갖게 될 때 그러한 마음의 경향성과 결정은 총체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애정에 복속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마음의 결정, 경향성, 정서는 참된 덕의 본질이 아니다.” 어렵죠? 쉽게 설명하면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줍니다. 또 여기에 있는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해줍니다. 당연히 여기에 있는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선하게 대할 때에는 이 사람에게 나름대로 윤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는 결국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윤리와 이 사람이 자의적으로 가지고 있는 윤리가 충돌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선은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 하도록 그렇게 총체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유교에서도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차별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와 충돌할 때가 어느 순간에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야, 부모에게 효도해야지, 부모가 굳이 반대하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요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관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결국은 신앙의 문제와 양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바는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도덕을 가르치고 많은 도덕들이 우리에게 선행을 촉진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감으로서만 진정한 윤리가 나온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당연히 자기중심적인 삶은 하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나의 사랑을 그물처럼 확장해 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런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결국은 이 사랑이 자기의 깃발을 꺾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이 자기는 없어지는 것이고 이 사랑에 묻어서 이렇게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그렇게 될 때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적의’라고 하고 이것이 말하자면 정서적으로는 반감이고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과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리에 두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일 수밖에 없고 이는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 완고함으로 입증된다.’그래서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향한 그런 원수가 되는 적대감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토마스 찰머스라고 하는 후기 청교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의 본질적 정의는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대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능력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이러한 적의를 파멸시킬 수 없다.’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를 죽이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갈고 닦고 수양을 해도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죄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산산이 부서지고 우리는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죽임입니다.
죄는 영혼을 파괴합니다. 어떻게 파괴하느냐 하면 이렇게 ‘나’라는 사람이 내 마음의 보좌 위에 앉아서 다스립니다. 당연히 주님보다 내가 보좌에 있어서 주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셔야만 주님으로 모셔 들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여기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법은 헌법, 형법, 민법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성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성향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속에 있는 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바꿔 놓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바꿔 놓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마음이고 이것이 신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성령이란 것이 무엇이냐? 죄와 사망은 무엇을 행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결정하든지 간에 어떻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나려고 하는 것을 운명처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과 성령의 법은 이것이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라도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다가 자기가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놀랍게 이 생명이 내 안에 솟아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것이 습관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습관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은혜를 받으면 수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내면의 삶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런 것들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존 오왠 목사님도 인간이 죄를 지을 때 순간적으로 생명과 성령의 법이 멈추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의 법 안에 있는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성령을 거슬러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생명력과 활기를 빼앗깁니다. 그래서 힘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에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에 힘이 없고 자기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힘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 안에 들어온 죄가 질서를 파괴합니다. 지성은 인식을 흐리게 되고 정서는 죄의 유혹에 친화적이 됩니다. 친하고 아주 화평한 친화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술집의 퀴퀴한 냄새, 어두운 조명, 여기저기 사람들이 술을 먹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그리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죄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그러한 공간, 그 자체에서 나오는 냄새와 분위기 그런 것 자체가 싫습니다. 지금 제가 말만 하는데도 그런 자체가 혐오스럽습니다. 그것이 비 친화적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런 공간, 그런 분위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죄의 유혹에 대해서 친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지는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즐거움, 심지어는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을 능히 거스를 수 있는,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영혼이 파괴된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이 컵이 깨지듯이 왕창 깨져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들이 파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생명과 질서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은 지혜가 많아서 총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어떻게 변합니까? 지성은 하나님을 잘 이해하게 되고 당연히 여기에서는 잘 못합니다.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어가지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안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죄가 들어옴으로서 내면의 세계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 2) 죄의 지배는 악입니다. 악이 죄의 결과라고 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답 : 죄와 악은 분리되지 않는다.
지향- 의지를 가지고 어느 쪽으로 향하게 된다.
강화- 보다 더 튼튼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단어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땅이 있고 뿌리가 있고 이렇게 나무가 있고 열매가 매달립니다. 그러면 죄의 뿌리가 있으면 이렇게 뿌리는 결국 열매를 맺게 하고 그런 점에서 지향하는 것이고 일단 악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은 거꾸로 이 죄의 성향을 강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악은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의 뿌리는 죄다. 그리고 죄에서 악이 나오고 악을 행할수록 죄는 더 튼튼해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 3) 죄의 지배는 악입니다. 여기에서 악이 덕에 대한 반대 개념이라고 할 때 그 의미를 설명해 봅시다.
답 :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결국 이것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이 없고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결국은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악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선에 거스르거나 대항하는 인간의 모든 존재와 행동을 악이라고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 인간 마음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악인이 되고 악인은 자연스럽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4) 죄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구체적인 활동은 어떤 것입니까?
답 : 죄의 본질은 경향성입니다. 영혼의 경향성이고 이것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향한 성향이고 무엇을 향한 경향성일까요? 이것은 결국 악을 향한 경향성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선과 대치 점에 서 있습니다. 영혼을 파괴합니다.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정상적 기능을 해치는 것입니다. 정상적 기능이란 무엇일까요? 여기 육체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위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기능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지, 정, 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육체가 있으면 이 육체를 이 마음이 결국 이 육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려고 할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욕망이란 것이 있고 영혼이 이렇게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이 영혼은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육체가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하고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면 그것이 악을 행하게 되고 영혼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게 되고 생명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죄의 원리입니다. 죄의 구체적인 활동은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깨트리고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깨트리고 영혼은 망가져서 선을 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악인이 되게 하는 것이 죄의 구체적인 활동이 겨냥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문제 5) 죄의 지배의 또 다른 목적은 신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 : 우리가 흔히 ‘파괴 한다’라고 할 때는 이미 있는 어떤 물건 예를 들어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파괴 한다’라고 할 때는 제일 먼저 우리는 망치를 생각할 것입니다. 쇠 위에 이 컵을 얹어놓고 쇠망치로 이것을 부숴버리면 이것은 형체를 잃어버리고 조각조각 깨져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깨져버리면 더 이상 이 컵으로 사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은 그런 식으로 파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혼은 엄밀한 의미에서 물건이 파괴되고 망가지는 것 같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파괴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이 망가진 것입니다. 좋은 예가 생각났습니다. 현대전에서는 전자기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통합작전 시스템이라고 해서 예전에는 비행기가 뜨면 1차대전만 하더라도 비행기가 혼자서 자기가 적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앞뒤전후 위 아래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자기가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하거나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투기들이 경쟁하듯이 상대방의 꼬리로 가려고 했습니다. 왜? 뒤에서 쏘는 것이 가장 명중률이 높고 자기가 피격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비행기에는 뒤에도 모두 사격장치가 달려있고 심지어 미사일까지 달려있어서 이제는 전 후방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현대사는 통합전자 시스템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전자시스템으로 엮여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행기가 예를 들어서 미사일을 쏘면 그 미사일을 공중조기 경보 통제기가 위치를 발견해서 좌표를 주면 미사일을 쏩니다. 미사일을 쏘면 그 미사일을 다른 비행기가 받아서 새로운 통합시스템을 받아서 새로운 목표를 그 미사일에 부여해서 최종적으로 타격할 지점까지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서로서로 전자시스템에 의해서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시스템을 무력화 시키려는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전에 걸프전이 나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뜨는 비행기가 그라울러기라는 전자비행기가 가장 먼저 뜹니다. 아주 강력한 주파를 발휘해서 방공시스템들을 무력화시키고 미사일시스템들을 무력화시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레이다기지가 있는데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할 때는 반드시 폭탄을 떨어뜨려서 콩가루가 됐다는 것을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강력한 ENP 폭탄 같은 폭탄을 떨어뜨려서 형체는 그냥 그대로인데 기능이 마비되어서 더 이상 레이더기지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레이더기지가 파괴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예입니다.
우리 영혼이 그런 것입니다.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건물을 폭파시켜 콩가루로 만들 듯이 그런 식으로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는 성령의 법 안에 있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삶에 윤리가 되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혼의 생명과 활기를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회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래도 은혜 안에 있을 때는 비록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금방금방 회개가 되고 낙심할 때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다시 새 힘이 솟았는데 그런 마음의 작용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영혼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나면 예전에 하던 봉사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예전에 알던 지식이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자가 죄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질문) 미움, 분노, 탐욕, 이런 것들에 비해서 잘 인식이 안 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까요?
- 결국 인간이 교만해 지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에 인간이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얼마나 더럽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독립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은혜의 핵심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자기를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교만의 죄라고 해서 다른 죄에 비해서 매우 특별하고 더 유별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하게 은혜를 받을 때는 교만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좋은 점, 장점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분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필요할까요?
-마음은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는다든지 죽음을 깊이 느끼고 정말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든지 할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은혜에 의해서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좋은 책을 읽는다든지 논쟁적인 책 말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책을 읽는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찬양을 듣는다든지, 설교를 듣는다든지 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때가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발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들이 높은 곳에 올라갈 때 발판 한 두 개만 있어서 훨씬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딛고 열렬히 기도하고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질문)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을 들어도 일시적인 변화만 있을 뿐 때마다 일어설 수 없는 무기력감만 느끼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운동을 매일 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운동을 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고 기력조차 없는 사람이 해야지 하고 막상 일어나면 팔굽혀펴기 몇 번만 하면 퍽 주저앉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이라도 개인 규정을 정하고 거기에 맞추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기도를 못 하겠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언제쯤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은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시간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내가 마음에 감동이 되든 아니든 내가 경건서적을 20페이지씩 읽어야 되겠다, 설교 한 편을 들어야 되겠다, 내가 10분씩 기도해야 되겠다,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되겠다, 이런 것들을 시도하면서 해야 됩니다. 시리즈에 들어가 보면 ‘영적 회복을 위하여’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라,’ 등등의 시리즈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매일 한 편씩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그대로 고하면서 영적회복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교구 교역자들에게 상세하게 물어보시고 질문도 올리시고 하면 답을 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