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족을 그리스도께로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화의 열매, 형제사랑(벧전1:22) 2004.4.14 수요예배 1
2. 떠나지 않는 근심과 고통(롬9:1-2) 2004.4.21 수요예배 13
3.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사명(행26:14-16) 2004.5.5 수요예배 24
4. 주 예수를 믿으라(행16:31) 2004.5.12 수요예배 36
1.성화의 열매 형제사랑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1. 순결함과 순종
이번 수요일부터 5월까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주 동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영혼이 불결해 질 수도 있고 깨끗해 질 수도 있습니다. 신자의 영혼은 회심과 함께 하나님께서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그 영혼 안에 주님의 사랑을 넣어 주셔서 새 사람을 그 속에 심으시죠. 그리고 그 새사람을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옛사람은 벗어버리면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깨끗해지게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영혼의 순결이죠.
이렇게 신자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작용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신자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신자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시지만 성령님이 신자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신자의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불순종하면 밖으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하는 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불결해 지게 되는 것이지요. 영혼이 불결해지게 되니까 마음은 물론 불결해 지고 생각도 불결해지고 영혼의 총명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신자를 깨끗케 하시지만 그 깨끗케 하심은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깨끗케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면 그 순종을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신자의 영혼에 역사하심으로 날마다 깨끗하게 그 신자의 영혼을 정화시켜 가시는 것이에요.
결국 성화의 핵심은 순종하는 삶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육체와의 싸움 , 죄된 우리의 본성, 게으른 본성과의 싸움,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과의 싸움 이 모든 것들도 결국은 우리를 자꾸 유혹하고 또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불순종하게 하는 요인들과의 싸움이에요.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불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과 처절히 투쟁하고 그런 것은 없어요. 왜? 죄가 없으니까. 이처럼 결국 죄와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도 깊이 캐 들어가면 하나님께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아서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지려고 하는 그러한 상황과의 싸움이에요.
2. 순결한 영혼이 맺는 열매: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함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가 믿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순종함으로 너희의 영혼이 깨끗케 되었다, 순결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자가 되려고 하면 순종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순종하는 것은 노력을 안 해도 쉬운데 순종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불순종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필요 없지만 순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 세상의 유혹 이런 것들과 더불어 분투하며 싸웠던 사람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 삶에 있어서의 가치는 탁월함이 아니라 온전함이에요. 탁월하다고 하는 것은 뛰어나다는 것이거든요. 뛰어나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뛰어난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인정받으면 문제가 좀 있어도 그것을 덮어주는 경향이 있잖아요. 2002년 월드컵 할 때 감독 한 사람이 와서 한국을 4강에까지 진출하게 했잖아요. 근데 그 축구 경기장에 자기 부인하고 이혼하고 아직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자하고 축구장에 나타났어요. 모든 언론이나 잡지에서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만약 몇 번 져서 곤두박질했다면 감독이라는 게 그 짓이나 하고 다니니까 뻔하다, 그랬을 거고 더군다나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박살이 났을 것이에요. 그죠? 부인은 이혼해서 다른데 팽개치고 와서 더군다나 신문에서 얼마나 그 여자가 그 감독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얼마나 잘하는지 찬미하는 기사를 써서... 왜 그래요? 탁월하니까. 탁월하게 축구를 잘해서 어쨌든 4강 가게 해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탁월함 때문에 그의 많은 문제들이 묻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런 탁월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전함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탁월하다고 감탄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탁월하다고 여기시냐? 아니에요. 사람 앞에 굉장하게 큰 사람인줄 알았는데 사소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성경에 얼마든지 많아요. 사울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자기가 대단히 큰 자와 같이 교만하여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안중에도 두시지 않고 다윗이라고 하는 목동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못 이루신 뜻이 무엇이 있어요? 그를 사용해서도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촌스런 목동이 능한 사울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그랬을 때 아마 사람들은 모두 웃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리고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앙 있는 다윗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탁월함이 아니라 온전함이에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못 이루신 일이 없고 그를 사용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촌스런 목동이 사울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모두들 비웃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큰 자를 버리고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앙 있는 다윗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탁월함이 아니라 온전함이에요.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의 세계가 더 그래요. 교회가 작아도 온전한 교회의 목회자들을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 탁월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있는 성공 지향적인 마음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는 그 탁월함보다는 온전함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탁월함은 피 눈물 나는 노력 끝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온전함에 도달한 것보다는 희생이 적어요. 전혀 그런 재질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해도 가망이 없는 사람이 그리고 하기도 싫은 것을 이를 악물고 해서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어요. 다시 반복할게요. 재능도 없고 탁월한 재주도 없고 하기 싫은 것을 이를 악물고 해서 그 분야에서 탁월하게 된 사람은 없어요. 어느 한 방면에서 탁월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탁월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해서 열심히 해서 탁월하게 된 사람들이에요.
온전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안 하고 쳐서 복종시켜서 그리스도를 닮아서 온전하게 되는 거예요. 어느 것이 하나님 앞에 더 소중하겠는지 생각을 해 보세요. 전 지금도 기억이 나는 데 여러분 갖고 있을 거예요.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유명한 설교가가 되겠느냐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겠느냐 묻는다면 1분도 망설이지 않고 전자를 택하겠어요.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 대단하겠어요?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대단하겠어요? 두말할 필요도 없어요.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냥 사람을 움직일 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설교도 마찬가지예요. 한 사람의 설교자가 말씀을 잘 쪼개는 사람이면 그냥 말씀을 잘 쪼개는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 앞에 잘 쪼개진 사람이냐. 만약 잘 쪼개진 사람이면 그 쪼개진 사이에서 계속해서 신령한 말씀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이 탁월함보다도 뛰어나게 좋은 거예요. 이런 온전한 성화의 삶이 끊임없이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성화의 작용을 통해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게 되는 데 그것에 하나님은 순종을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순종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지극히 작은 일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마음 그리고 지극히 작은 일에 있어서 온전해 지려고 애쓰는 마음이, 그를 점점 더 온전해 지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이 그를 점점 더 깨끗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두 번째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형제라고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준 서신이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들을 거짓 없이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성화의 열매가 형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신앙의 열심히 있어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성화의 진전을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성화의 열매는 사랑이에요. 그가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가면 되어갈수록 그의 삶에 맺히는 것은 형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에요.
3. 사랑의 정체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오래 참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그래서 사랑의 첫째요소는 오래 참는 거예요. 오래 참는 것 자체가 사랑이에요. 참는다는 것은 즐거운 것은 참는다고 말하지 않죠.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참는다. 그런 거 없고, 재미있는 영화를 참고 두 시간이나 보았다. 그런 거 없어요. 참는 것은 대개 자기의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고통을 주는 것을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진정으로 참는 것은 싫증날 때까지만 참는 것이 아니라 견디기 힘들어도 계속 인내하는 것 그것이 참는 것이에요. 왜 그렇게 참을까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왜 그렇게 오래 참을까요? 이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되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오래 참으셨어요? 사랑하셨으니까 오래 참으셨죠. 그러면 참는 게 뭐냐 사랑이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오래 참으시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해요? 결국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부단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항상 내가 저 사람으로부터 받는 부당한 대우로부터 받는 손해보다는 내가 사랑하여야 하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소중하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참고 오래 인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인내하면서 당하는 고통보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의 정체라 이거예요. 아무리 그것이 정당하다 여길지라도 누군가가 자기를 심하게 화나게 만들고 손해를 입혔을 때 그럼 나도 너 안보고 살 수 있지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말미암아 빚어진 자신의 고통이 그 사람보다는 훨씬 크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오래 오래 참지 못하는 이면에는 항상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이 도사리고 있는 거예요.
동물에게 있어서 자기 사랑은 단순한 자기 보존이요 종족 보존의 본능이지만 더 이상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있어서의 자기 사랑은 그보다 더 높은 의도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에요. 그건 뭐냐하면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가치관이에요. 제가 이름 붙이기를 ‘제왕적 가치관’ 이에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상태에서 가져야 하는 가치관은 ‘자녀적 가치관’이에요. 혹은 노예적 가치관이에요. 그 노예는 억지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아주 기쁘게 내가 아버지의 집에 가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품꾼 중의 하나로 여겨 주시옵소서 하는 품꾼적 가치관이에요.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이에요.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향해서 서로 이러한 마음들을 가져야 해요.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고 자신의 혀 같이 그렇게 자신을 잘 이해하고 이해 받을 수 있는 사이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것을 능가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무슨 상급이 있겠느냐 반문하시는 거예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도록 하신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우리들이 가족을 선교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이러한 사랑이에요. 이런 사랑이 뭐냐. 오래 참아야 하는 거예요. 오래 참아야 되요.
그래서 가족을 구원하는 일은 평생 동안 무관심하다가 금식기도 며칠에 해결 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그런 것들이 계기는 될 수 있겠지만 십자가를 지고 참아야 되요. 예수님을 먼저 믿고 그래서 내 가족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오래 참아야 해요. 근데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잘 못해요. 집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물론이요 믿지 아니하는 형제들에게 더 못해요. 참는 것이 너무 힘든 거지요. 잠깐은 참지만 오래도록 못해요. 결국은 몇 달에 걸쳐 가족 구원의 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할 길을 닦아놓고 어느 날 하루 성질을 부려 다 엎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그 판을 만들려면 1년은 걸려야 되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렇게 생각할 때 많이 손해를 보고 희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근데 그 대신 그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손해를 본다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게 많잖아요. 주님은 은혜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명도 안 주셔요. 정말. 사명이 크면 받은 은혜가 큰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로 은혜 받지 않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신 법이 없어요. 그리고 준다고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요.
그러니까 가족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오래도록 참아야 해요. 목사님 그것도 정도가 있죠. 정말 부당합니다. 부당해도 참아야 해요. 왜? 우리가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당해도 가족들을 미워할 수 없는 위치에 있잖아요? 핍박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돈 좀 형한테 빌려가서 안 갚는다든지 부모를 안 모시려고 꾀를 부린다든지 하는 사소한 것들 때문에 그러잖아요. 그런 것들을 참지 않고는 절대로 가정이 복음화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 하냐면 우리 형 우리 동생 우리 엄마 아빠 우리 형수님 예수 믿게 도와주세요. 누군가를 통해서 그 일을 하세요. 왜 누군가야? 자기 부모인데 자기가 해야지. 뭔 뜻이냐 하면 코 안 묻히고 코풀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휴지 없이 코풀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거예요. 기도하면 형제들과 부딪히지 않아도 잘 알아서 전도되고 엉겁결에 예수 믿게 되고 그 형이 더 많이 변화되어서 야 옛날에 내가 많이 나쁜 짓 했다. 부모도 내가 모시고 돈도 너 돌려줄게 이런 날을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그 심보 가지고 되겠냐고요. 자기가 사명감당한 것은 동네 교회에서 사명 감당 한 거 아니에요?
가족 전도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냐 하면 내가 아니면 우리 가족은 전도할 사람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매달려서 복음을 전하고 그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내가 도저히 손이 미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거지요. 저는 정말 교회하면서 그런 애틋한 사람 몇을 만났어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면 우리교회에 찾아와서 생면부지의 목회자에게 저희 아버님 어머님이 이 동네 사시고 저희는 지방에 사는 데 기도만 할 뿐이지 어떻게 우리 엄마 아빠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뭐든지 도와 드리고 기도는 해 드릴 테니까 주소는 이렇게 되고 우리엄마 아빠 성함은 이렇게 되는데 제가 이 교회에서 전도 올 거라고 말해놓을 테니까 꼭 가서 복음을 전해 주십시오. 진짜 눈물이 나요. 얼마나 애절했으면 그러겠어요.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자기가 곁에 있었더라면 자기가 그 십자가를 지고 그 부모를 전도할 사람이니까 그렇게 까지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이 오래 참아야 해요. 정말 오래 참아야 해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 가족이 내가 죽고 나서야 예수 믿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을 때까지 참으리라. 내가 아무리 내 가족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경우에 없는 희생을 해서 받는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가족들을ㅇ 위해 복음을 전하고 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은 형제가 가치 있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무엇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가치,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 이르게 될 그 영원한 운명을 생각하면 눈물 나지 않아요? 정말 가족들 때문에 가슴 저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내 생명을 5년을 줄여서 우리엄마가 예수 믿을 수 있다면, 내 생명의 10년을 잘라서 우리 아빠가 예수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게 오래 살아서 뭐 좋은 게 있어요? 내 생명을 잘라서... 그렇게 은혜 많이 받았을 때는 진짜 그러고 싶어요. 심지어는 내가 죽어서 내 피 발라서 내 가족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어요. 근데 내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예수의 피가 발라져야지... 그러니까 오래도록 참아야 해요. 그걸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부당한 태도예요.
두 번째는 뭐냐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원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다다르게 된 비참한 상태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 그게 긍휼이에요. 저를 포함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포악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강포해요. 긍휼이 있어야 해요. 불쌍히 여겨야 해요.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을 깊이 녹인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 안 믿으면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지옥에서 칼 가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들이 예수 믿게 된 겁니까? 아니잖아요.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녹이셨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는 무섭기만 했지요. 그러나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긍휼히 여기셔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다는 그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소식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는 거예요. 일생을 살아도 우리를 위해서 뼈저린 희생을 한 사람이 없는 데 내가 괴롭히기만 하고 부정만하며 살아왔던 예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바로 그렇게 죽으신 것이 나 같은 사람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 마음이 녹아내린 거지요. 근데 한 번에 우리 마음이 녹아내렸습니까? 아니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어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요 . 그래서 그렇게 쉽게 녹지 않잖아요? 하나님모르는 우리 가족 형제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강퍅하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마음에 그 가족들의 돌 같은 심장을 안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심장이 녹아내려서 달걀을 깨뜨리고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그렇게 그 돌 같은 마음속에 예수의 사랑, 그 돌 같은 마음속에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는 데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병에, 주님이 정해 놓으신 병에 우리의 눈물이 차기까지 그냥 한 없이 긍휼히 여기면서 가슴팍에 안고 있는 심장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일을 해야 해요.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가족들을 위해서 가슴 저미는 긍휼 내 부모가 나에게 한없이 많은 상처를 주었을 때 이를 갈고 증오했지만 예수의 사랑을 알고 성화되고 은혜를 받고 보면 나도 주님 몰랐더라면 우리 엄마 아빠보다도 더 나쁜 삶을 살았을 사람인데 더러운 삶을 살았을 사람인데... 그러면 그런 삶을 살았던 잘못된 행실들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긴 날을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살아와서 이제 노년에 이르게 된 자신의 부모님 생각이 나고 그들이 비참하게 된 원인이 아니라 그들이 비참하게 된 상태 그 자체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형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게 다 자기 안의 그럴만한 게 있어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절대로 환경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지 않아요. 반드시 자기 안에 그런 게 있어요. 근데 형제들을 봐도 그래요.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못 보는 결점을 보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정말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면 그 형제들이 그렇게 불행하게 된 그 못된 원인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비참함 그 자체가 가슴에 밀려와요. 그래서 그렇게 뼈저리게 마음 아픈 거예요. 그걸 입증할 수 있는 훌륭한 예증 같은 그림이 있어요. 들어보세요.
탕자의 비유인데 아버지가 아들이 나간 이후로 눈이 짓무르도록 동구 밖에서 기다렸어요. 근데 저 멀리서 아들놈이 걸어오는 거예요. 갈 때는 아버지 재산을 뚝 떼어 갔으니 얼마나 위풍당당하게 갔을까요? 올 때는 돼지우리 간에서 쥐엄 열매를 먹으려 해도 그것조차 찾을 수 없으니 개꼴을 해서 돌아왔어요. 근데 아버지가 그 꼴을 딱 보는 순간 왜 그 똑똑하고 단정하던 아들이 왜 저 개 꼴을 하고 올까? 그 원인이 뭘까 하고 생각을 하고 그 가까운 원인은 돼지 치는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고 좀 더 먼 원인은 다 까먹었기 때문이고 좀 더 먼 원인은 허랑방탕했기 때문이고 그 위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를 떠나갔기 때문이고 더 위로 올라가면 애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눠 달라고 하는 것은 부모더러 죽어버리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고 내 재산을 제 유산이라고 뺏어가고 그런 것 때문에 저 꼬라지가 되었구나 불쌍하겠어요?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약과다. 백 분의 일도 안 된다.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사랑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처해있는 개꼴을 하고 돌아오는 그 자체만 생각이 박혀서 얼마나 배고프고 얼마나 춥고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면서 그걸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게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에요.
일본사람의 민담집에도 보면 고려장의 습관이 있었답니다. 고려장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 세계에 다 있습니다. 저 시베리아로 올라가면 -옛날에, 요즘은 없겠지만-부모가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더 이상 노동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부모 스스로 얘야 이제 가자 그런답니다. 그러면 아들이 그 늙은 엄마 혹은 아빠를 짐승이 가장 잘 나타나는 거기에 앉혀놓고 돌아오는 거예요. 왜? 그 부모가 어차피 죽을 텐데 짐승한테 뜯겨 먹히고 싶다 이거지요. 왜 ? 그래서 짐승들이 비옥해지면 짐승들이 우리 자손들이 잡아먹고 살 테니까. 눈물 나는 얘기 아니에요? 일본에서도 그런 풍습이 있어서 어머니를 업고 어디로 간단 얘기는 안하고 깊은 산골- 가까이 가면 돌아오니까- 에 가서 너무 꼬불꼬불 돌아가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거예요. 아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머니를 딱 내려놓으니까 기력이 없는 어머니가 아들보고 잘 가거라 그런데 길을 너무 꼬불꼬불 돌아와서 네가 아마 길을 못 찾을 텐데 내가 등 뒤에 업혀서 오면서 나뭇가지 하나씩을 꺾어서 죽 놓으면서 왔으니까 갈 때에 꺾어진 나뭇가지가 놓여있는 길만 따라가면 너의 집에 갈 수 있다. 어머니가 그러더래요. 그게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바로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잘 보여주셨고 그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 탕자가 바로 우리란 말이지요.
가족들을 볼 때 영혼으로 보이지 않고 인간으로 보이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얘기가 나와요.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안돼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생명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가족이 보여야 해요.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 그게 바로 사랑의 마음이에요.
세 번째는 뭐냐하면 자비한 마음이에요. 자비와 긍휼은 어떻게 다르냐하면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자비는 그런 긍휼을 바탕으로 베푸는 슬픔어린 베풂이에요. 슬픔어린 베풂. 긍휼은 내적인 것이고 자비는 베풂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풀기 위해서는 희생이 동반돼요. 희생이 없이는 사랑이 없는 거예요.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믿는 자 안에 있지 절대로 밖에 있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몇 번 기도하고 몇 번 전도하다가 우리 가족은 모두 특수 심장을 가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강퍅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내가 상당히 노력을 하는 데 안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건 너무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에요. 우선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해요. 그들의 처지를 슬프게 여기면서 가족들의 영혼 하나하나가 자기를 다 팔아서라도 하나님 앞에 그 영혼을 사 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서 그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섞인 마음으로 구체적인 희생으로 무엇을 베푸는 삶. 그것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비롭게 대해 주실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것이 있어요. 항상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성품이 자비로운 사람은 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자비한 사람이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을 대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가족의 구원을 이루는 지름길이에요. 근데 그것을 잘 못해요. 내가 아직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지지 않은 불결한 인간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오래 참지 못하도록 만들고 자기 안에 있는 포악한 성품이 하나님을 떠나서 고통가운데 있는 영혼을 향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으로 눈물 흘리지 않게 해 주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안에 있는 이기적인 사랑이 베풀지 못하게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에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서 가족들을 위해 펑펑 울어야 되지 않겠어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를 위해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지? 네. 지상에서 저만큼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진리의 빛도 많이 받았습니다. 근데 너희 가족은 어디 있냐? 물을 때 그 인간들은 너무 심장이 강퍅해서 지옥의 불에서 녹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정말 이것은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온 가족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춤을 추며 다녀야 돼요. 왜? 그것은 아무 가정에나 허락해 주시는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온 가족이 내가 핍박받지 않고 교회 다닐 수 있고 부모가 나를 경건하게 기르려고 하고 자식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나를 친절히 예배당에 데려다주고 하는 이것이 보통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 받는 축복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럼 다른 십자가를 더 잘 져야지요. 더.
근데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가족들을 사랑해 본 적이 있어요? 무한대로 우리의 가족이 구원을 얻을 때까지 내 가족이 구원받지 못해 박힌 못이 빼어질 때까지 내가 마치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지만 나를 위해서 주님이 모든 것을 버리신 것처럼 나도 버리겠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교회에서 하던 중요한 봉사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는 거예요. 목사님이 왜 시골로 가냐? 아버지는 먼저 떠나가시고 엄마 한 분 남았는데 그렇게 서울에서 기도를 해도 어머니가 교회를 안 나가셔요. 어머니가 예수를 안 믿고 늙어 가시는데 내 좋은 직장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다음에 예수님께 가면 그래도 1년이라도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고 어머니의 인도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는 드릴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5월이 가까워오면 잔인하도록 가슴을 후벼 파는 외면할래야 외면할 수없는 현실이지요. 난 제일 먼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어느 날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여러분의 가족들이 울며불며 회개하면서 돌아오는 역사에 종종 나오는 그런 극적인 회심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가족 전도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참고 인내하고 깊이 사랑해요. 그래야 그게 바로 가족들을 전도하는 길이에요.
4. 영혼의 순결과 형제 사랑
마지막으로 그게 영혼의 순결과 무슨 상관이 있냐? 그 영혼의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신자 자신을 가득 채워 가시는 상태예요. 신자는 영혼이 순결한 것만큼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의 순결한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순결한 상태예요. 그런 성화의 작용에 의해 순결해지면 순결해 진 것만큼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고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들을 위해서 오래 참고 그들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삶이에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희생을 해야 해요. 우리 자신이 무엇이라도 주어서 내 가족들 중에 단 몇 명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런 고백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 정말 기도합시다.
나는요. 열린 교회를 하면서도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부담을 느끼면서도 복음화 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근데 진짜 뼈저리게 기도하니까 들어주시더라고요. 언제 한 번 간증 좀 해 보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심방하다보면 정말 그럴 리가 없는 돌 같은 심장을 가진 남편인데 정말 그 중에는 내 남편을 변화시켜주시든지 저를 죽이시든지 그렇게 기도한 자매들도 여럿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돌같이 굳어졌던 마음을 녹이시고 변화시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소중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절실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자녀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가족들이 구원 받지 못해서 내 자녀들이 정말 슬프구나! 내 자녀가 마음 아파하는 구나 내 자녀가 고통스러워하는구나! 내자녀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정말 불쌍하구나! 그런 마음이 생기실 정도로까지 그렇게 절실해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시는 데 왜 여러분의 가족만 제외해 놓겠어요? 여러분의 가족들이모두 예수 믿고 어둠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서 살면 여러분이 더 좋으시겠어요? 예수님이 더 기뻐하시겠어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 애끓는 눈물 절실한 사랑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한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깊이사랑하고 그러면서 가족을 위해 기도할 때 가족들을 위해 솟아나는 샘솟는 기도가 여러분 삶에 넘쳐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2.떠나지 않는 근심과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1~2)
1.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
지난 시간에는 형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것이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들이 가족을 하나님께 전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어떤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할까?
로마서 8장은 위대한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지인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죽자마자 이 벽장 속에 있는 박스를 열어보고 그리고 그 다음 일을 결정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박스를 열어보니까 굉장한 금붙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봉투 한 장 나오는 데 ‘ 내 장례식 예배 순서’ 하고 장례식 순서가 나오는 데 성경 본문이 로마서 8장인데 설교는 누가 하고 기도는 누가 하고 축도는 누구 시키고...
그럴 정도로 이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자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죄에 시달리고 고통과 시련이 많은 세상에 살아도 그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셔서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그들을 지켜 구원을 완성하실 것에 대한 찬송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시련과 환란과 역경들은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무시무시한 것들입니다. 환란, 적신, 채찍에 맞으며 끌려가는 투옥, 그 다음에 칼에 찔려 죽는 것, 마귀의 도전... 말할 것도 없이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한 것이거든요.
근데 그런 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격려를 하다가 갑자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던 그 마음이 갑자기 방향을 돌리면서 무언가 가슴에 한처럼 깊이 맺혔던 그 아픈 것들을 털어놓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9장에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내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한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실 정도로 내가 참말을 한다. 내 안에 뭐가 있다. 근심과 한 번 더 나아가서 내 안에 고통이 있다. 무슨 고통이었겠어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아래 있기는 하지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중의 대다수는 이방인인데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근데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보아요. 자기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서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되었고 그리고 8장에서 핍박아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할 정도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많이 체험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며 일생을 살아왔겠어요? 그렇죠?
2. 영혼의 상태를 재는 시금석
그러한 속에서 긴 세월을 달려온 사도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근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근심은 아주 자주 그 마음에 깊이 찌르는 고통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자기의 골육지친- 넓게는 자신의 동족, 좁게는 한 피 받은 자신의 골육지친 가족을 위한 그 애끓는 마음이었습니다. 이후에 보면 유대인이 얼마나 이방인에 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권을 가졌는지 죽 이야기해요. 혈통으로도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나셨잖아요. 먼저 율법을 받은 사람도, 구원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도 히브리인들이고 구원의 계시를 먼저 받은 민족도 히브리인들이고 유대 백성들 아니에요?
그런 많은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먼저 그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풍부한 계시 속에서도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오래 전부터 약속된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오히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서 오늘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되었잖아요.
한편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가까이 올 수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게 얼마나 감사해요. 더군다나 사도 바울은 처음 부름을 받을 때부터 이방과 이방의 임금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으로 선택 되었고 예수의 종으로 선택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도저히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에 가까이 다가올 수 없었던 그 많은 이방의 백성들에게 예수 알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지 너무너무 크고 아름답고 감사한 거예요. 그렇게 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내가 주 앞에 섰을 때 너희들이 내 면류관이 아니냐 그렇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기뻐했잖아요? 그런 기쁨이 가득 차도 동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 동족 속에 자기의 골육지친들이 있었잖아요? 그들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억누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큰 근심이 되었어요. 마음에 무거운 납덩어리 같은 것들이 있어서 그것이 떠나지 않는 거예요. 복음 안에서 기쁜 일이 있고 행복한 일이 있어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골육지친들이 생각이 나지요.
그리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고 예수의 품으로 돌아왔어요. 이전에는 개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변하여 단정하고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가 되고 향기가 되어서 그들이 예수의 향기를 풍기면서 산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올 때 그 때 사도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왜? 에베소에서 그가 장로들을 청해서 오매 그 장로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유언적으로 남긴 설교 속에서도 ‘유대인의 간교로 인하여 당한 시험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사도바울이 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고난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고난의 이유가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동족들에 의해서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간교한 그 시험으로 사도바울을 괴롭혔고 사도바울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예수님이 전했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사명에 충실하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할라치면 예수님이 받으셨던 것과 똑같은 대접이 사도 바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얼마나 더 많이 아팠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도 아니요 한 피 받은 백성들인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모욕을 받는다면 아마 사도의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족들은 미워했고 골육지친은 사도바울을 버렸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의 간교를 인하여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고 그렇게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다가 그 사랑을 모르는 자기의 동족과 골육지친을 생각하면서 목이 메는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우리들이 한 번 보아야 합니다.
3. 눈물의 병이 채워질 때까지
한 사람의 구원 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한 사람의 태도는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재는 시금석이 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한 내 동포, 그리고 예수 모르는 내 가족 때문에 이렇게 근심하고 이렇게 고통하며 가슴앓이를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은혜 받으면 기쁘고 감사한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 받으면 가슴앓이도 많아요. 여러분들이 은혜 받지 못했을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이 사랑이 이렇게 큰데 제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밖에 못살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고 그런 적 있어요?
죄 가운데 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언니 내 형 우리 어머니 아버지 내 동생 언제 하나님이 불러 가실지 모르는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생각하면서 눈물이 납디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져서 그것이 깊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에만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게 되지 내 마음에 이런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변하게 되는 거예요.
동물들의 자기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종족을 보전하는 것 이상을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은 아주 독특해요. 인간의 자기 사랑은 보다 더 높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요.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목적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걸 순서적으로 하나하나 성취해 가는 거예요. 그러한 아주 교묘하고 부패한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생각 밖에 안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고통하는데 은혜가 없을 때는 그 고통의 이유가 정말 원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정말 쓸데없고 가치 없는 것들 그리고 허망한 것들 그런 것들로 인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짐이에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면 생각이 달라져요. 은혜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깃들여져 있어요.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심정이 되요. 그걸 극단적으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애절한 심령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 그런 심령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은혜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을 능가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 다시 선택해서 그들을 통해 다시 복원하고 싶은 창조와 구원의 모든 계획들의 비밀들을 누구에게 맡겨 주셨나요? 유대인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일어난 역사는 작은 것이지만 큰 거예요.
언젠가 중고등부를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전도사님 왜 우리는 이스라엘 얘기만 해요. 교과서에는 두 줄 밖에 안 나오는데. 왜 그 코딱지만한 나라를 연구해야 해요?’ 그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작아요. 우리나라 동장만도 못한 왕들도 많았어요. 그런데도 중요한 이유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그 나라의 역사를 사용해서 어떻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실지 그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옛날에 강원도 쪽에 올라가면 사금을 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그 금이 금광에서 캐서 금 성분이 조금씩 들어있는 돌들을 캐서 수레에 가득 싣고 가서 가루를 내서 거기서 금가루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게 겉으로 보기엔 흙덩어리 같고 돌덩어리 같지만 금을 캐는 사람들은 그 속에 금이 들어있는 줄 알기에 그 돌멩이가 탐나서가 아니라 그 속의 금이 귀하기에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거예요. 똑같아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 속에 묻어있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계시가 그렇게 소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참고적으로 그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유대 민족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선택된 민족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정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데 돌아오지 않아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 민족을 향해 이런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렇게 죄 때문에 창조의 세계가 망가졌고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는지 모든 것들을 깨닫게 되니까 이 사도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쓰신 귀한 나라이고 하나님이 동행하신 역사를 가진 훌륭한 민족이고 성경을가지고 있고 율법을 먼저 받았고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진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해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들인데 그 그림자에 붙잡혀 진짜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바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많고 지위 높고 좋은 차타고 돈도 많고 권세도 있는 사람 우리가 불쌍히 여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건 모두 그림자고 껍데기일 뿐이에요.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신데 그의 소유나 그가 가진 인생의 자부심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것으로도 그들의 불행을 막을 수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을 향해 큰 근심이 되고 근심이 지나쳐서 칼로 후벼 파는듯한 통증이 느껴져서 자지러지도록 고통스러워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동족이 밥을 굶어서 그래요? 아니면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서 그래요? 예전에는 그랬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가 아니에요. 복음의 본질을 본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없다 이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이 예수를 몰라요. 그러니까 그것이 근심이 되고 가슴을 찌르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 되는 거예요. 더군다나 그 속에는 골육지친이라고 표현한 한 피와 뼈를 나눈 형제자매들 자신의 부모 형제 친척들 생각이 난 거예요.
저는 고향을 이북에 두고 온 사람이 아니라서 그 뼈저린 마음을 모릅니다. 언젠가 15,16년 되었겠지요. 교수들이 버스를 타고 철책선 까지 가 본적이 있어요. 우리는 야 신기하다 철조망 봐라 저기 사람이 있다 경치도 좋다 그랬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닦아요. 그 때 참 숙연해지더라고요. 내가 정말 철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금강산 관광을 갔잖아요. 저는 안 가보았지만. 철책을 쳐 놓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게 되었다고 그래요. 근데 관광객하나가 철책선에 매달리더니 어린애처럼 통곡하더니 저 집이 내가 살던 집이라고 하더래요. 그렇게 길이 날 줄 몰랐지. 거기 우리 엄마 아빠가 계신데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통곡을 하니까 이북 사람들도 인정이 있으니까 눈시울을 붉히면서 오늘은 가고 내일 사람을 보내서 알아봐 주겠다고...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더래요. 이북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제 이야기가 잘 이해가 갈 거예요.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거기 주저앉아서 바로 저 동네 내가 살던 집이라고... 생사나 알려 달라고 통곡을 하는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그게 혈육의 정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걸 느낀 거예요. 물론 예수님이 부르실 때 다 버렸죠.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일세]
버렸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뜻대로 구원받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가족들도 버려야 했고 유대인이면서도 스스로 유대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했고 그의 고백과 같이 할례자들에게는 무할례자들인 이방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처럼 여김을 받아야 했죠. 그리고 그것은 사도바울이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러나 오늘 그렇게 큰 근심과 찌르는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이제 그 모든 특권을 잃어버렸구나 내 아빠 내 아버지 어머니 떠나서 어떻게 사나 그런 것 때문에 느끼는 마음의 고통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아무 아쉬운 것이 없었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부족한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이 없어도 동족으로부터 일평생 따돌림을 당해도 예수의 사랑에 위로 받으면서 살 수 있어요.
그러나 동족은? 자기는 그렇게 살 수 있는 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기 동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골육지친 자기 가족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에서는 하늘 자원이 끊어진 채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면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다가 마지막에는 지옥에 던져지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할 때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 까 가슴에서 심한 짓누름을 경험했던 거예요. 정말 우리가 우리 가족을 전도 했고 못 했고는 나중 문제이고 우리에게 이런 짓눌리는 마음, 예수 모르는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될까 내일 모레 하나님이 부르실 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 가슴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어서 다가와야 해요. 만약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서 그런 마음을 느끼실 거예요. 내가 내 아들의 피로 구원해 놓은 백성인데 이 녀석이 얼마나 은혜에서 멀어졌으면 가족을 위해서 전도하라고 먼저 구원해 놓았더니 가족을 위해서 한 번도 마음아파 할 줄 모르는 구나 내 너를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 안 그러시겠어요?
그리고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게 관심을 갖죠. 그러면서 거기에 매달리며 살죠.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구원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왜 주님께서 많은 우리의 가족이 있는데 하필 우리를 먼저 부르셨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뭐 잘못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거기서 한없이 행복했을 때 왜 하나님은 거기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냐고 앙탈을 부리거나 원망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 없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먼저 부르셔서 예수 믿게 만드시고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게 만드셔서 복음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진정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깨뜨려져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주님이 내게 먼저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아프기도 했지만 은혜가 밀려들었죠. 우리 엄마 못 받은 사랑을 내가 받고 우리 아빠가 깨닫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내가 먼저 맛보고 우리언니가 경험하지 못한 신령한 세계를 내가 체험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족을 위한 중보의 사람으로 각각 불러주신 거예요.
우리 모두 저절로 자기가 잘나서 제 발로 걸어 나와서 예수 믿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고 여러분들을 위해 많이 울었고 그리고 오늘 이 사도바울처럼 아무 관계없는 여러분의 영혼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지금은 얼굴도 잊혀 진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지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고 놀라운 은혜를 주신 예수의 사랑에 붙잡혀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서 숙명처럼 그렇게 산 것이에요.
우리들이 조금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가 분발해서 예수를 전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강권하시고 사로잡으시면 내가 주님을 위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들고 당신 자신을 전하십니다. 그렇죠?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 먼저 구원을 받았고 할 수 있으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모든 가족들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과 관련된 가족들도 예수를 믿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국은 우리 가족들 중에서 결국은 지옥 갈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근데 전 그런 생각을 해요.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죠.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도 있겠죠. 전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그들이 한 번도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줘 본 적도 없고 피저린 사랑으로 다가가서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인생의 진실은 이것이고 예수님은 바로 너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하나님은 너를 너무 사랑하시고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 복음을 한 번도 전해줘 본 적이 없고 누구도 눈물 흘려 줘 본 적이 없이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옛날 어릴 적 다니던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부흥회 때 북치고 찬양하고... 집회 거의 끝날 즘에 옆집 쌀가게 주인이 오더래요. 그래서 떠들어서 따지러 오나보다 했는데 그렇게 북 치고 장구 치니까 좋냐? 좋지요. 그러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너희들은 그렇게 좋은 걸 왜 한 번도 나에게 해보라 소리를 안했냐? ^^ 자기도 예수 믿고 싶다고...
생각해보세요. 가족 전도는 길거리 전도하고 달라요. 나는요. 가족 중에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어요. 진짜 그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이면 더 불쌍해요. 얼마나 마음에 근심이 될까요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진전은 없어요. 3년 공들이고 큰일에 만나서 대판 싸우고 이러면서 인격의 모자라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역사를 해요. 이러면서 가정 복음화가 지리멸렬하게 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근데 이걸 기억하세요. 가족들이 강퍅해서 예수 안 믿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절대 안돼요. 백 번 얘기해서 강퍅하다고 칩시다. 어떻게 하겠어요? 결국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자기가 강퍅해서 그렇다고 기도해야 되요. 정말 내 가족들이 강퍅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서라도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십시오. 그게 참된 구원을 위한 중보의 기도 아니에요?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당할 때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롯을 생각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건져내신 거예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 우리 안에 가슴을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근심이나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은 없어도 부담은 늘 가지고 있어요. 부담이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깊은 고통.
목회하면서 참 많이 만나요. 전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남편을 위해 생명을 걸고 매달리면 남편의 마음은 강퍅해도 부르짖는 아내의 기도 때문에 들으셔요. 어느 목사님이 쓰신 책에서 보니 새벽기도 때 어느 집사님이 남자 구두를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더래요. 매일 . 신발먼저 왔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이 주인 좀 와서 앉도록 도와주세요. 그 이야기를 읽는데 그렇게 가슴이 저릴 수가 없어요. 나는 예수님의 사랑도 알았고 예수 안에 있는 구원도 알았는데 내 남편은 몰라. 정말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그 구두를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짠 하셨을까! 구두는 들고 올 수 있지만 구두 주인은 주님이 데려와 주세요.
어떤 성도는 앉을 때마다 옆의 자리를 맡아 놓는대요. 그건 본받으면 안돼요. 언젠가 남편 앉을자리라고 해요. 하나님 오늘도 홀로 왔습니다. 내 남편이 이 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 저절로 복음 받은 사람 없고요. 정말 많이 울었어요. 오죽했으면 가족구원을 위해선 하나님이 예정하신 눈물의 병이 있어요. 그게 차야 돼요. 깜짝 해서 어떻게 안 되나요 안 돼요. 하나님이 가족들을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게 하시고 그러면서 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시는 마음을 충분히 배우게 하신 후에 구원하시는데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에요.
군대 간 아들이나 해외에 간 남편을 그리워해 본다든지 한 적 있잖아요? 아니면 서로 사랑해서 만나지 못했을 때는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요. 장작이 쪼개지는 것처럼. 물론 매일 만나지요. 부모를 이 교회에서 구원 받은 성도로 만날 수 있다면... 그 이름을 부르며 깊이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는데 그 자체가 십자가요 고난이에요.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아프고 목메어 하는구나, 결국 내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구나 내가 아니면 누가 눈물을 흘려주겠어요?
<끝나지 않은 가슴앓이 가족구원>이라는 책을 탈고합니다. 그 카피에 그렇게 썼어요. 그 때 우리의 눈에 눈물이 샘솟듯 할 것이다. 주님이 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느냐 하실 때 여기 다 있어요 하면 우리 눈에 기쁨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4.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나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가족 구원을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물으시는 거지요. 얘야 내가 네 가족을 구원하고 싶은데 네가 이렇게 근심해 본 적이 있느냐 너의 골육지친을 위해서 내 종 사도 바울이 나 만나고 그랬던 것처럼 가슴에 통증이 있느냐 주님은 그걸 물으시는 거지요. 우리는 구원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이야기해도 잘 안들을 지도 몰라요. 우리의 행실도 아직까지 성화되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실망을 끼쳐요. 그것도 당장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어요. 가족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엄마 형제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릴 수는 있잖아요?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도와달라고 탄원할 수 있잖아요?
마지막에 주님 앞에 갔을 때 ‘부족하지만 가정의 달이 오면 늘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전하려고 애를 쓰고 혹은 비유로 혹은 사실로 주님의 복음을 수시로 전했으나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는 해야 되지 않겠어요?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에 대한 부담만 있으면 안돼요. 그 가족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야 되지 안하요? 우리가 그런 기도는 올해가 마지막이 되도록 그렇게 기도합시다.
3.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사명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행26:14~16)
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
사도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사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성결하고 철저하게 헌신된 삶을 살던 예수 중심의 삶의 핵심이었으며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이 바울을 사용해서 이루신 세계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토와 같이 닫혔던 땅에 빗장을 여시고 복음을 전파되게 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무얼 통해 일어나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질러 그 마음이 복음에 뜨겁게 함으로써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멀리 떠나간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에서 멀어져 죽어있는 영혼들을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동일한 마음을 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예수 만난 사람들의 역사이고, 그 사람과 함께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이 홀로 그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홀로 그 일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같은 마음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의 피 흘린 고난의 발자취를 밟고 하나님이 지나가심으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그들의 눈물어린 자국들을 밟고 지나가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 만난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세 번이나 사도행전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생애에서 잊혀질래야 잊혀 질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예전의 사울로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강력하게 그 예수 체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둠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구약의 강물 속에 찬란한 십자가의 빛이 비치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아주 또렷이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전하기 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
오늘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 때 그 일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감동으로 예수 만난 체험을 간증하면서 세 번 나오는 이 회심의 기사 - 물론 세 번 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아니지만- 누가의 보도와 바울의 고백 합쳐서 세 번이나 나오는 이 회심의 기사를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이 사울은 뼈에 사무치는 예수의 심장을 갖게 되었으니 이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그 뼈에 사무치는 주님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복음에 대한 화급함과 신적인 강제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네가 만약 복음을 안전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이. 예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나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둔다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적인 강제력이 자기에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슴에 타오르고 있는 이 신적인 강제력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처절한 불꽃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것은 골수까지 사무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사도바울이라고 일컬어지는 예레미야에게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보게 되지요. 시위대에 갇혔을 때 그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증거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치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자신은 이미 깨닫고 있는 하나님의 뜻-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방황하는 수많은 동족들을 보면서 그들이 아무리 듣지 않으려고 한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의 강력한 불이 그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도바울을 사울이었던 이 사람을 부르시면서 강력한 부활의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거기서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너무나 길고 오랜 세월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신학적인 편견과 유대인이 최고라고 하는 심리적인 편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목숨을 걸었던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며 자기가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행했던 일들은 허탄한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사랑에 붙잡히고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문벌도 잃어버렸고 동족도 잃어버렸으며 가족도 상실했습니다. 그래도 그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의 좋은 평판과 자기만족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비로소 깨닫게 해 주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의 렌즈를 통해서 세계를 볼 수 있었고 왜 하나님이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예수의 피로 구원해 내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정말 거기서 예수님을 못 만났다고 한다면 그는 영원히 어둠 속에서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은 사울에게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도 내 동족들이 지금도 옛날의 자신과 똑같이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겨서 예수를 보지 못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자부심 때문에 자기가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실상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진 자임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그어둠 속에 자기의 동족들이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만약에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만나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깊이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 저 사람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며칠 전 어느 기사를 보면서 아직까지도 의문이 안 풀렸어요. 한국의 가전제품을 동구라파 쪽에서 마케팅을 하는 사람인데 얼마나 피 눈물 나게 노력을 했는지 IMF때 일본도 철수하고 다 그랬는데 거기에 그냥 버티고 앉아서 그 시장을 거의 석권하다시피 했어요.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게 러시아에다 에어컨을 그렇게 많이 팔았대요.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그 추운 나라에. 그러니 얼마나 그 사람들을 설득했겠어요. 아프리카에다 히터 팔아먹은 것과 똑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안 믿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누가 그 사람이 정말 안 믿으려고 하는 지 충분히 전해 본 사람이 있느냐 이거에요. 충분히... 충분히 전해 본 사람이 .... 없잖아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저 사람들은 강퍅한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안 믿으려고 결정한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은 이런 거였죠. 믿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여부에 달린 것이고 자신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것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에 간절히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사울을 만나서 거꾸러뜨리시고서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밝히셨어요. 그리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 바울이 거꾸러지면서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리고 내가무엇을 하리이까 고백을 하게 되는데 사실은 자기가 와르르 무너진 상태를 의미하는 거예요. 이전에 가진 인생관이 예수님 만나서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이제 다시 세워진 것이거든요.
마치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이 소명하실 때 하신 것처럼 너는 뽑고 파멸하며 다시 세우고 건설하고 심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었노라 .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부서뜨리는 일을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먼저 경험하게 되고 다시 세워지는 일을 경험하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는 것은 재개발하는 것과 똑같아요. 허름한 집을 다 부숴버리고 새로 아파트를 짓는 것과 같아요.
4. 증인된 사명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가 먼저 깊이 무너져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이지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세워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깊이 무너졌어요. 그리고 세워질 때의 첫 번째 말씀이 뭐냐하면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의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하노라. 이게 세워지는 첫 번째 말씀이었어요.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다메섹에서 사울을 만나주신 것은 ,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무슨 뜻이죠? 내가 가서 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너를 어떻게 만나 주었으며. 이게 전도의 원리예요. 가장 쉬운 것은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한 거예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며 외친 말이 뭐예요? 내가 바로 그분을 만났다.
그러니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 남이 만난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 없이 살아가던 비참한 인생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구원해주시고 어떻게 나를 새롭게 해 주셔서 이전의 죄악 된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는지 그걸 전도하는 거예요.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그게 뭘까요? 가깝게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고 일생을 이 땅을 순교하고 사는 날 동안 주님이 끊임없이 그를 만나 주실 텐데 그 일들에 관해서 증인이 되고 멀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장차 이 세상을 다시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하는 재림에 대한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 전도자인 사도 바울의 중요한 전도의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에 대해서 외쳤고 의와 절제에 대해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 분이 다시 구름을 타고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열렬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바로 그 일들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환과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사환은 말하자면 종은 아니지만 종 비슷하게 주인을 섬기는 아주 낮은 자예요. 종처럼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 청지기예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일생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자세를 암시하신 것이고,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돌짐지고 흙 푸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법정에 서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의 복음 전파의 사역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환처럼 사는 섬김의 삶, 그리고 동시에 법정에 선 증인처럼 예수에 관해서 증언하는 이 삶, 이 두 가지가 나누어 질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에 관해서 유창하게 증거 하기 전에 먼저 그는 예수를 섬기는 사환으로 살아야 했고 예수님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하기에 앞서서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그분을 섬기는 종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정확하게 사람들에게 증거하여야 했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그 분이 누구이시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증언하기 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5. 복음에 대한 선명한 증언
증인이 증언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증언할 내용이 자신 안에서 분명하게 역사하고 있어야 하고 정직하게 자기가 보고 들은 일에 관해서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법정에서 행해지는 증언으로서 그 증언에 의해 사람들의 생명이 오고 갈 수 있는 판사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증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거짓 증거 하지 말라 하는 것을 십계명에 집어넣을 정도로 중한 범죄였습니다. 두 세 사람의 증언이 한 사람의 생명도 앗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학교에 선생으로 있을 때 우연히 성경책을 넘기다 보니 표지에 썼어요. 나는 세상이라는 법정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내가 어찌하든지 증언을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겨 드리리라.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에 관해서 올바로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마다 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정확하게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지 정확하게 증언을 해 줄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들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믿을 수없는 진리를 믿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래요. 우리도 우리 가족들을 볼 때 너무나 쉽게 강퍅하다 마음이 굳어졌다 안 믿으려고 하는 그것이 너무 뚜렷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미리 겁을 집어먹고 우리 가족들은 절대 듣지 않을 것이고 또 내가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결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전하는 이 복음에 권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몇 주간에 설교를 들은 것과 같이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가족을 위해 많이 희생하고 가족을 위해 많이 양보하면 그게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섬기는 일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잘 못 섬기는 거지요. 그래서 많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해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더 많이 가졌잖아요. 뭘 더 많이 가져요? 유산도 없고 가난한데.... 왜 가난해요? 예수의 넓은 사랑이 있잖아요. 남이 못 본 예수님 보았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생각을 깊이 감사하면서 내가 더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희생해야 해요. 첫째도 희생, 둘째도 희생, 세 번째도 희생해야 해요. 그리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확한 증언이에요. 정확한 증언.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왜 고난 받고 죽으셨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가족들에게 정확하게 증거 해야 해요. 편지로 쓸 수도 있고 말로 할 수도 있고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분명하게 가족들에게 말해야 해요. 바로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신 수많은 만남의 경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그 새로운 갱생의 은혜-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족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마음이 아주 부드럽고 하나님을 향해 온유해져 있을 때에는 우리는 신뢰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신뢰해요. 그러나 굳어진 마음은 정 반대예요. 나는 신뢰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요,
그래서 굳어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살코기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에 물같이 마음이 녹아질 때에 예수님만을 굳게 붙들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은 당신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거지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에요. 정말 우리들이 가정에서 먼저 예수를 믿고 가족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 내가 아니면 누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가정이라는 법정에 서 있는 증인들이에요. 거기서 예수님에 관해서 정확하게 증언해 주고, 한 번의 증언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 열 번이나 희생하고 스무 번이나 양보하고 한 마디를 증언하기 위해서 일백 마디의 말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에요.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지체들이 신앙에서 조금 미끄러져서 주님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건조한 신앙생활을 봐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누군가가 정확하게 증언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 바로 깨닫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가족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 회심하지 않은 자녀를 가진 부모들 있지요? 지금이 그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회심하기 쉬운 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더 좋은 때 그것이 온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도 어린 아이일 때 그 아이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우리의 마음이 미어져야 합니다. 정말 미어져야 합니다.
이번에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여러분 리포트 내 드릴 것인데 제임스 제인 웨이라고 하는 18세기 청교도가 쓴 글이에요. 그 글이 TALKING FOR CHILDREN 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이들의 신앙의 표지 그런 뜻이죠. 그 책이 17세기에는 천로역정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읽히던 책이었어요. 내가 그 책을 읽었는데 정말 놀라워요. 그 중에 놀라운 얘기는 두 살 된 아이가 -우리나라로는 세 살 쯤 되겠죠 - 영접하고 성도답게 살다가 네 살인가에 죽었어요. 웃는 것 보세요. 믿지 못하는 거지요. 불과 세 살 네 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그렇게 거룩하고 순전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부모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보면서 마음아파하고 또래의 많은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걸 보면서 그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 그것을 영국에서 일어난 일을 적고 그 다음에 카튼 매더라고 하는 청교도가 그다음 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어린아이의 회심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왔어요. 정말 놀라워요. 우리들이 교회 다니지만 회심하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해요. 지금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나중에 그 두 눈에서 피가 흐를 거예요. 정말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많이 울어주어야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그 예수님이 너무 불쌍하니까 여인들이 따라오면서 슬피 울었어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을 때 오죽했으면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가를 졌겠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 여인들을 보시며 하신 말씀이 뭐였어요?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어라
부모로 태어나서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많이 눈물을 흘려주는 거예요. 만일 부모인 우리들이 지금보다 배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그 아이의 회심하지 못한 영혼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의 슬픔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면 벌써 우리의 자녀들이 회심했을 거예요.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 된 그런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아이들이 회심하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능성은 매우 적어집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늦게 예수님 만난 이유 아닙니까? 그게 바로 아직까지도 하나님 모르는 여러분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고 여러분들의 형제자매가 웬만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 아닙니까? 그래서 많이 울어야합니다. 그건 부모의 사명입니다.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교육 그래서 훌륭한 대학 이 사회에서 번듯하게 성공 시켰다고 할지라도 내 아이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자식 농사 헛 지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위해 심한통곡과 눈물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울어야 합니다. 마치 자기의 죄 인 것처럼 자기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처럼 자녀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면 그 자녀들이 돌아오지만 언젠가 여러분의 눈에서 피가 쏟아져도 자식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죠. 지금이 가장 추수하기에 적합한 때이죠. 경솔하게 아직 영글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누가 충분히 낫을 대어 본 적이 있습니까? 충분히 낫을 ... 정말 내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눈물 흘립니다.
어느 전도사 한 사람이 회심도 안 하고 교회에 나와서 사악하게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혈기를 못 이기고 한 대 날렸대요. 딱 얻어맞더니 나가 떨어지더래요. 벌떡 일어나더래요.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와 전도사가 사람 팼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사가 깊이 회개하고 찾아갔는데 만나줍니까? 그래서 편지를 썼대요. 아홉 번을 편지를 쓰니까 마음이 열려서 만나 주더래요.
여러분 절대로 -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한 번 전할 때 거절하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아름다운 모본을 보이시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셨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믿고 회개할 준비를 했던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 쉼 없이 기도하고 쉼 없이 전하고 희생하고 사랑하고 그 모든 것보다도 그들의 영혼이 내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을 하는 것 밖에는 다른 것이 없어요. 우리 부모들도 마찬가지예요.
연로하시면 정신적인 활동도 둔해지고 왜 그런지 연로하고 이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우면 영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더 많이 생겨날듯한데 오히려 그런 것들은 회심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더 강력하게 나타나요.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희망이 없는 존재인지 사실은 거기서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한 번 1년에 한 차례씩 그냥 사정하다시피해서 가족들을 모두 모아봅니다. 모두 회심합니까? 그렇지 않죠. 그러나 그렇게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불러 모으고 한 번이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 자리에 나와 있는 그 사람들이 거기서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정말 변화되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 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가족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내가 예수의 형상을 가진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사환으로 부름을 받았고 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 생각을 하고, 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나의 가족이고 내 가까이 있는 내 형제들이고 내 골육지친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정확히 듣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가족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해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그들의 애끓는 기도를 들으시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서 새 생명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정말 우리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우리의 가족들이 모두 빛 가운데로 돌아와서 우리는 가족이 서로를 고치려고 할 때 갈등과 상처밖에는 반복되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주님께로 돌아와서 나를 이렇게 어루만지시면서 고쳐 주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 엄마도 고쳐 주시고 우리 아버지도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의 형제들도 우리의 친척들도 그렇게 고쳐 주셔서 남이 못 본 은혜의 세계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했던 예수의 사랑을 받으면서 새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좋은 집이나 훌륭한 직장 많은 유산 그것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열거한 것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세상과 함께 지나가는 것들이지만 그 사람들의 영혼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우리 온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아파하는 지체들의 그 흐느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새벽기도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단장의 흐느낌으로 기도하는 그 지체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회심하지 않는 자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아파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그 부모들의 그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줍시다.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 속에 찾아오셔서 행해 주시도록 그래서 가족들의 구원받지 못한 형편을 생각하면서 흘리는 아픈 눈물이 금년으로 모두 씻기워지고 이제는 기도제목이 변해서 우리 엄마 아빠가 진실한 성도가 되고 내 자녀들이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동거하는 가족이 되게 해 달라고 주의 성도가 되어 서로가 진실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자극하는 가정이 되도록 그런 날들이 시작되는 한 해가 되도록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가족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4.주 예수를 믿으라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16:31)
1. 본문의 배경
이 성경구절은 저희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교회에 가면 가장 눈에 띄던 성경구절이었고, 전도지에도 가장 많이 붙이고, 심지어는 교패에도 붙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두아디라 성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죠.
귀신들린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귀신으로 점을 쳐서 그 주인을 이롭게 하던 아이였습니다. 귀신이 들린 상태에서 귀신의 도움을 받아서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니까 귀신이 쫓겨나가서 그런 영험한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돈 벌이가 안 되니까 사도들을 고소했고 결국 얻어맞은 후에 착고로 채워져서 감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기서도 바울과 실라를 비롯한 일행들은 거기서 기도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어떤 영역에 끊임없이 쏟아 부으며 사는 그런 헌신된 삶이 있어야지만 은혜가 유지되는 것이에요. 그래야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 속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찬미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도하다 이 골방 속에 내동댕이쳐졌고 감옥에서 처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느껴집니다. 어떤 기쁨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기쁨, 성령님의 놀라운 위로로 말미암는 기쁨이었겠죠.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들이 감히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감격이 이들이 옥중에서도 찬송하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옥토가 흔들리면서 그 많은 죄수들이 차고 있던 착고가 끌러지는 정말 기적적인 역사가 이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죄수를 돌보는 간수가 죄수를 놓치면 죄수들이 지은 모든 죄의 합계를 형벌로 간수가 받아야 하는 그런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절대로 죄수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어느 시대에나 당연한 거지만- 특별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이죠.
어둠 속에서 옥토가 뒤흔들리고 문이 열리고 착고가 다 벗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 죄수들이 남아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도망가지요. 근데 그 사실을 보면서 이 간수는 칼을 꺼내서 자결을 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소리를 지르며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다 그 때에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 간수가 바울의 일행 앞에 와서 엎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참 재미있지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느냐’ 이 사람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멸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단 말이죠. 이미 그 이전에 저들이 무슨 죄목으로 왔을까 복음을 전파하고 그 모든 소동을 보면서 복음에 대한 선지식이 있었다고 봐야 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고 이러한 사실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간수는 두 가지 사실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나도 그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능력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리라. 라고 하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2. 죄수가 받은 이중의 충격
무엇에 충격을 받게 되었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권능이에요. 옥토가 흔들리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 데 어떻게 단단히 잠가 둔 옥문이 열리며 그것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간수가 아니면 열 수 없는 착고가 한결같이 모두 풀어져서 땅에 떨어지며 그들이 자유한 상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식 밖의 일을 기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커다란 두려움이 확 밀려오게 되면서 그 두려움의 근원이 자기는 정확하게 알 지 못하지만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시라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정직성이에요. 하나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충격이었다면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에서 오는 충격이었어요. 그건 하늘이 주신 놀라운 기회인데...
이렇게 해서 옥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 누구죠? 베드로 아니에요. 베드로. 전혀 새로 듣는 사람 이름처럼 그렇게 생뚱맞게 쳐다보세요? 야고보는 죽었는데 베드로는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일어나라 그래서 나왔단 말이에요.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정직성면에 있어서는 역시 베드로가 떨어지는구나! 천사가 와서 가자고 해도 이 나라 법이 가게 안 되어 있다 법부터 바꾸고 와라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왜 베푸셨을까요? 그들을 옥 중에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기적적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이런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거예요. 근데 놀랍게도 이 기적을 믿음으로 사용한 거예요. 그랬더니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어떻게? 자기들만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 그 간수와 그 집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얼마나 멋있어요? 제가 신학교의 교수로 있을 때 유아 교육과 다니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그 학생이 졸업할 때 쯤 되면 - 유아 교육과 학생들이 공부는 잘하는 데 진로는 별로예요- 유아 교육의 푸른 꿈을 안고 왔지만 별 거 아니고 3D거든요. 우아한 선생님이 아니라 육체노동을 너무 많이 해야 해요. 아이들하고. 어쨌든 좋은 데 가야 할 것 아니에요. 굉장히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이 학생이 하나님 앞에서 40일 동안을 기도하겠노라고 작정을 하고 아침은 금식하고 밤에는 교회에 가서 철야를 했어요. 32일인가 33일째 되는 날 꿈도 꿀 수 없는 좋은 데서 오라도 제의가 온 거예요. 하나님의 응답이에요? 아니에요?
응답이라고 해야지요. 사실이에요. 가지 그랬니? 그랬더니 아니래요. 나는 하나님 앞에 33일을 기도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40일을 기도하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 안 간대요. 나머지 7일 후에 내면 되냐 그랬더니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아니다 했대요. 7일을 더 채웠더니 하나님이 더 좋은 곳으로 주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는데 그 기적을 도망가는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남아서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거기 있는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다 도망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우리 여기 있다 그랬더니 이 하나님의 백성의 정직성! 어떻든 간에 베드로가 도망한 것이 부정직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거기 서 있고 도망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지만 좌우지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데도 도망하지 않고 오히려 죽으려고 하는 자기를 보호해 주는 것을 보면서 도덕적인 깊은 감화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들이 한꺼번에 밀려닥치면서 자기를 가눌 수가 없어서 엎드려 부복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랬더니 그 유명한 선언이 나오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로 편지를 보냈어요.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요. 목사님 성경에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분명히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데 왜 우리 집은 이렇게 예수를 안 믿는 겁니까? 이건 약속이 아니에요. 약속이 아니라 높은 개연성을 제시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국한 사람을 구원 하실 때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는 사람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약속이라고 한다면 다 실현이 되어야 하잖아요? 근데 이건 예외 없이 주어지는 당연한 약속이라기보다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에서 이것은 불변의 약속이 아니에요.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을 두고 죽은 사람은 구원도 의심해야 되나요? 그럴 없다 이거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 있는 개연, 구원 받은 사람을 통해서 그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소원 - 이런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예외 없는 약속이아니라 개연성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건 전해 봐야 아는 거예요. 간수가 구원을 얻었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이것이 꼭 약속인 것처럼 가족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온 가족이 믿게 되니까 큰 기쁨이 그들 가운데 넘쳐나게 되었죠? 그런데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듣게 해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듣게 해 주는 일이.
그랬더니 그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위대함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자신들이 각각 구원 받아야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절박하게 깨달으면서 간수의 영혼 속에 일어난 똑같은 회심의 역사가 가족들에게도 일어난 거예요. 이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에요. 얼핏 보면 기가 막히게 주어진 약속 같지요?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니다 이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4. 가족을 향한 복음의 전령
우리도 그거죠. 우리들에게도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게 명백한 것이지요.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하나님께서 가장 1차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이 뭐냐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령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지요. 왜? 우선 거리적으로 그래요.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가족이에요.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시각적으로도 그래요. 내가 예수 믿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도 내 친척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시각을 갖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가족들에게는 내 삶 전체가 명료하게 일어나요. 그래서 내 가족들이 내가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정말 변했구나 그리고 내 가족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게 된 저 가족이 근원은 알 수 없지만 그 평강을 나도 갖고 싶다 그리고 그 평강의 놀라운 평강의 근원이 된 그 분과 나도 관계를 갖고 싶다 이것을 바로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위치에 우리 가족들이 있는 거예요.
세 번째는 애정적으로 그러하다 이거예요. 가족들만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가족들만큼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복음이 한 사람을 변화 시켜서 바뀐 인생관을 갖게 만들고 하나님 안에 있는 친교의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이 사랑을 모르는 가족들이 생각나지 않겠어요? 애정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개연성이 많다 말씀하신 거예요.
지금이야 북에서 하도 많이 넘어와서 혹 이 달에 아무도 안 넘어 왔습니다 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데 옛날에는 하나만 넘어오면 발칵 뒤집혔어요. 천신만고 끝에 넘어 온 사람들에게 불고기 집에 데리고 가서 잘 차려서 놓고 비싼 집에서 고기를 굽는데 넘어 온 모든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다 말고 울음을 터뜨리더래요. 왜 그랬을까요? 북에 남겨둔 가족들 생각에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사실 그런 생각 안 하죠. 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되면 사실 그들에게 제일 주고 싶은 게 무어예요? 예수님의 생명 아니에요? 물질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은 금방 떨어져요. 유한한 지상의 자원이니까. 그래서 제가 전도사일때 모시던 목사님은 몇 주일에 한 번 씩 똑같은 설교를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은혜를 끼친 젊은 부인이 있었는데 30대 중반에 과부가 된 부인인데 서울역에서 길에 앉은 노숙자를 안고 펑펑 울면서 하는 말이 ‘예수 없이 어떻게 사십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는 그런 생각 안 들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깊이 들어갔을 때 핍절한 가족들의 영혼이 보일 때 그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위로가 되겠어요? 먹고 마신다고 위로가 되나요? 그럴 수 없죠. 그런 애정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 가족을 부탁하시는 거지요.
먼저 예수를 믿은 것은 참 놀라운 은혜예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잖아요. 너무나 감사하잖아요. 그런 감사와 기쁨과 감사를 체험하고 나면 그런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 가족을 가장 불쌍하게 여길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신 말씀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이거예요.
우린 여기서 먼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이지만 또 내가 어떻게 사는냐에 따라서 가족들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사명이 있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사람이 없고 등경위에 두나니.... 모두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고 그 빛에 의해서 모든 것이 보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잘 살든지 못 살든지 빛이에요. 등경위에 올려놓은 불이 잘 탈 수도 있고 심지가 구부러져서 건드린 사람이 없는데도 불이 꺼질 수 있어요. 심지가 신통치 않아서 지지직거리며 곧 꺼질 것 같아서 주위를 조금도 밝게 하지 못할 것 같을 수도 있어요.
그 등불은 등경위에 있어요. 우리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건 개인의 책임이에요. 우리의 행동, 모습, 믿음 등은 모두 등경위에 있어서 가족들이 볼 수 있는 적나라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믿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하지만 동시에 먼저 깨닫고 알게 된 많은 은혜와 함께 남들이 지지 않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거지요. 그걸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러한 십자가를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지워 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이고 은혜에요.
바로 바울과 실라가 그런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 아니에요? 내가 예수를 위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너희 같이 짐승 같은 인간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 받으라고 전했는데 이 옥 속에 내던져 야 정말 더럽다 인생 거지같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야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이 예수님을 위해 모욕을 받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솔직히 고난 중에 감사하고 시련 중에 감사하라지만 우리가 아픈 것 때문에 감사한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우리에게 지어진 십자가의 아픈 것 때문에 감사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이게 살아있는 신앙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그래서 찬미가 나왔던 것이에요. 그래서 어둠과 고난 속에서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이게 기독교 찬송가의 역사를 보면 전쟁이 많고 질병이 돌고 치열한 고난이 있을 때 주옥같은 찬송가들이 쏟아져 나온 거예요. 이게 역사예요. 찬송을 비유하자면 더러운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가시밭에 피어난 백합화가 아주 깊은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요? 연꽃은 물이 더러운 성분 속에서 비료로 삼아서 찬란하게 꽃을 피워요. 연꽃은 참 신기하지요. 구정물을 부어도 방울방울 다 떨어뜨리고 자기는 절대로 그 물을 뒤집어 쓰지 않아요. 물 위에 있으되 물과 하나가 아니에요.
가시밭에 백합화 그건 식물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일종의 자기 방어제가 향기예요. 허브는 가까이 가서 냄새 맡아도 안 나지만 막 만지면서 괴롭게 해야 온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게 퍼지는 거예요.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게 바로 그런 뜻이에요. 자꾸 찔려요. 그러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자꾸 뿜어내는 거지요.
우리도 이렇게 가만 내버려 두면 다 부패해요.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요. 그럴 때 고난 그 자체가 우리에게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받고 아프면서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이런 작용을 하게 되면서 이 영혼 속에서 진액들이 흘러나오는 거지요. 그러면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거예요.
저는 많지 않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와는 비교될 수도 없는 향기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을 몇 사람 만났습니다. 그 분들의 공통점이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요. 두 번째는 기도의 사람들이에요. 세 번째는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에요.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
여러분 바다에 가면 진주 같은 거 양식하잖아요? 양식 하는 방법이 뭐냐하면 조개에 뭘 하나씩 넣으려고 살을 찢어요. 원래 자연산 조개는 활동을 하잖아요? 날카로운 모래나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 깊이 파고들어서 안 나가는 거예요. 상처가 되지요. 덧나는 것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 체액을 뿜어내는 것이에요. 그게 진주예요. 그래서 진주가 담긴 조개는 살이 없어요. 사람들은 진주를 큰 것을 품고 있으면 살이 없어도 용서해 주지요. 진주를 꺼내니까. 사실은 진주를 품은 조개는 정확하게 말하면 병든 조개에요. 그 속에서 찬란한 진주가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생각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가족이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가족이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성화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의 은인이에요. 지금은 다 돌아가셨는데 기도도 잘 하시고 300명 교인에서 1000여명 교인으로 만들고 잘 목회를 하시던 분이셨는데 지금이야 이렇게 차들이 많으니까 차타고 오고 이사 가서 교회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는데 그 때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동네에 교인들이 몰려 있단 말이에요.
기도도 많이 하시고 말씀을 전하면 표적도 따라다니시고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시고 건강하시고 칼 같죠... 심지어는 새파란 목사가 장로들 매일 성경 안 읽는다고 예배 시간에 일으켜서 30대 새파란 목사가 망신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담력? 이 있으신 록사님이셨는데 말씀 전하면 자신감이 있어요. 그런데 한 달에 한 두 번은 겸손해지셔요. 동생이 예수를 안 믿어서 술에 취해 가지고 와서 돈 내놓으라고. 목사가 무슨 돈이 있어요? 줘도 성이 안차니까 소리소리 지르며 병을 던져서 장로 집 유리창을 깨뜨리고 집사 집 현관을 깨뜨린단 말이에요. 이러시지 말라고 하면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줄 알아? 가시야. 우리 형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야’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것 감사하지요. 그런데 아픔도 많아요.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그런 적 없어요? 나는 믿느라고 믿지만 예수 잘 믿는 형제 둔 가정을 보면서 부러워해 본 적 없어요? 우리 형이 나보다 신앙이 좋아서 내가 힘들 때 위로해 주고 힘들 때 형제가 모여서 손잡고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적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많은 고통들이 항상 있어요. 가족의 구원을 그런 십자가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야 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십자가다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잘 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당연한 거다 그래서 우리들이 백화점 같은 데 보면 끼워 팔잖아요? 끼워 팔기로 따라온 것이에요. 예수님을 내가 먼저알고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으니까 이제 내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고 내가 많이 희생하면서 참고 사랑을 전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울 수 없되 난 울어주고 몰라줘도 그 일을 행하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나를 또한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5. 피할 수 없는 사명
오늘 이 간수의 가족도 보세요. 속히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무엇이었을까요? 가족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그 복음을 정확히 전해주는 사도의 일행들이 옆에 있었어요. 그리고 자기가 구원 얻은 후에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얼른 구원 받게 하고 싶은 열심히 있었어요. 그리고 나와서 복음을 듣는 가족들의 순종이 있었어요. 이게 어우러지니까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때가 좀 늦을 수 있고 우리가 좀 불비하고 모자라서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심을 토로하고 주님께서 우리의 가족들 구원 받지 못한 우리의 식구들 복음에 무지한 내 형제들 그리고 우리 동생들 우리 형 우리 언니 우리가 깊이 가까이 사랑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는 거예요. 이건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진실하게 이 사명을 감당해서 기필코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가족을 그리스도께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