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자를 인도하심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2:1-10)
녹취자: 조경훈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아기 예수의 탄생기사를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은 목표를 요구합니다. 목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어는 ‘wander’라는 한 단어밖에 없지만 우리나라 말에는 이 말을 ‘방랑’이라고도 번역을 하고 ‘방황’이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방랑은 처음부터 목표가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입니다. 방황은 목표가 정해져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목표로 가지 못하고 계속 목표를 찾아 떠도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삶의 목표가 분명해도 그렇게 살 힘이 없을 때는 방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목표가 분명했으나 잠시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별빛을 따라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Ⅱ. 별빛을 따라 온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으로 사람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혈통으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국은 육신의 왕국이었고 지상나라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국이 껍질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왕국이었고 신령한 나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다고 예언되었으나 사실 그는 세상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A. 동방에서 온 박사들
오늘 성경에 보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박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마고스’라고 되어있습니다. 현자, 철학자, 별의 운동으로 인생사를 판단하는 학자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별빛을 관측하다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고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이 별빛과 함께 만나게 될 그 분이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사실까지 알았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 세 사람은 멜키오르(Melchior), 발다사르(Balthassar), 카스파르(Caspar)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별빛을 보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유대 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인도했던 그 찬란한 별빛은 무엇이었을까요? 크게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진짜 빛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이 본 환상이었다고 해석을 합니다. 두 번째는 천문학적으로 연대를 계산해서 그 당시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혜성의 주기와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그 별빛을 혜성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와 전혀 다른 하나님이 직접 기적적으로 보내신 제 3의 빛이었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탄생의 소식은 유대인이 아니라 먼저 이방인에게 전해졌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비록 메시아가 오실 예언의 약속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으나 그들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에게 먼저 알리셨던 것입니다.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 의해서는 거절을 당하고 오히려 이방인들 가운데는 찬란하게 열매를 맺을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왕국은 다윗 왕이 다스리던 유대왕국과는 다른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배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십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비록 신실한 유대인들은 아니었고 이방인들이었으나 모종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랬을 때 이들의 마음은 그분을 경배하고 받들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경배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말씀에 의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말씀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길을 잃은 경배자들
두 번째는 길을 잃은 경배자들이 되었습니다. 별빛의 인도를 받으며 예루살렘까지 왔는데 거기서 그 별빛이 사라졌습니다. 집을 떠날 때 그들은 정확히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알게 된 이들이 황급히 행장을 꾸리고 그에게 드릴 보물을 챙겨서 낙타에 오를 때 아내들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시나요?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그들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을 떠날 때에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정확히 몰랐고 오직 불현듯 나타난 찬란한 별빛을 보며 따라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당연히 별빛이 없었을 것이고 그들은 어두워지기를 기다린 후 다시 그 별빛이 나타나면 그 별빛을 의지하며 먼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그 찬란한 별빛이 사라졌습니다. 태어나신 유대인의 왕께 그들이 아직 이르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여기 있을 텐데 그가 어디에 계십니까? 이 질문을 듣자 온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왕인데 무슨 왕이 또 태어났다는 말인가? 혹시 그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 자신에게 대항하는 무리들의 구심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온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슨 왕이 태어났다는 것인가? 하고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궁금한 나머지 종교 지도자들을 불러서 만약 메시야가 태어난다면 어디서 나겠느냐고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미가서 성경 구석에 있는 한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 5:2)
지식적으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분이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의 동방박사들이 그 찬란한 별빛을 보며 그 분이 메시야임을 믿고 왔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오신 그 탄생의 소식에 대해 예루살렘에게는 눈을 멀게 했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감추어 버리심으로써 예수를 숨기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방인에게 먼저 경배를 받으시게 만드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는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옛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을 세우셔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무슨 사심이 있었을까요? 무슨 개인적인 야망이 있었을까요? 무슨 탐심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온 인류의 행복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큰 영광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값비싼 보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가지고 와서 아기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으나 길을 잃었습니다. 별빛조차 사라진 캄캄한 밤중에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신지를 물어야 했고 별빛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경구절 속에서 메시아의 예언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에게 그것을 들려주어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찾아갔으나 그들은 예수 오신 소식과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그분을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 하면 우리의 인생은 꽃길만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별빛조차 사라진 밤바다 같은 인생을 지날 때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분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어떠한 경우에도 버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별빛조차 사라진 밤바다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자신을 인도하는 그 빛이 얼마나 고마운 지를 절실하게 느끼며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십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때로는 별빛조차 사라진 밤바다와 같은 인생을 우리가 지날 때가 있지만 거기서도 당신을 경배하며 살고자 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빛의 고마움을 깨닫게 하시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는 삶이 얼마나 값지고 고상한 삶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평화롭게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성도의 달콤한 교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은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사라지는 영혼의 어두움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프고 주릴 때에, 성도의 교제로부터 소외되어 외롭고 슬플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갈 길을 잃을 때에 말씀의 인도가 얼마나 놀라운 가치가 있는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잠시 길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어둠 속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지식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종종 인생에서 길을 잃는 적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다시 나타난 별 빛
마지막으로 다시 별빛이 나타났습니다. 9절은 말합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마 2:9) 사라졌던 별빛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 박사들을 인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보지 못하게 감추시는 것처럼 박사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오자 별빛을 사라지게 하셨고 어둠 속에서 헤매게 만드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기자 문득 예전에 사라졌던 찬란한 그 별빛이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순간 동방박사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잊어버렸던 그 별빛이 다시 찬란히 빛나는 것을 보며 그들의 마음도 빛나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따라 살도록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잠시 길을 잃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다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그분을 경배하고 마음 중심으로 주님을 높이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번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혹시 버려지는 경우가 있어도,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당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면서 소신껏 당신을 경배하며 살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도 잠시 별빛을 잃어버린 것 같은 위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찌하든지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한 번 그 별빛을 비춰 여러분들을 살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Ⅳ. 적용과 결론
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왜 하나님이신 그 분이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오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셨을까요?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그 분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모든 위엄을 버리고 낮아진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죽으실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인 평화로운 아기를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 아기가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로 바쳐질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만 성경은 오직 하나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 밖에 없는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마다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쓰레기 같은 자기의 사랑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붙들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그분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고 수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은 자기 아들보다도 우리들을 더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라도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기 오신 이 날에 길 잃은 무리로 살아가던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잠시 별빛조차 사라진 인생의 어두운 때를 지나든지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