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정통교회들이 이단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의 근본, 구원의 조건을 지식에 있다고 믿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들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분은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 성자가 그 분의 몸속에 오셨고,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자는 떠나시고 그는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으로 믿던 정통 교회의 신앙에 매우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함께 살았던 사도 요한이 이러한 가르침들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예수가 참 사람임을, 참 하나님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이 우리 인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 진술은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II.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A. 하나님 사랑이 나타남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헤 아가페 투 쎄우(he agape tou theou)’인데 직역을 하면 ‘그 하나님의 그 사랑’입니다. 즉, 여러 신의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난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 ‘헤 아가페’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마치 가족처럼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영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나타난바 되었다고 했는데 희랍어로 ‘에파노로데(epanorothe)’입니다. 이 말은 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아주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디아우토(di autou)’, ‘그 사람을 인하여’, ‘그를 인하여’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전에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타락한 아담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은 역정을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들을,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큰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기적을 베푸셔서 민족들을 이끄시고,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채워주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더욱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묵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시 119:41). 그렇지만 구약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영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주 복잡한 외국 영화를 자막 없이 보는 것처럼 그 내용을 쉽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시고 이제 우리 위에 우리를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고, 또한 ‘임마누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구원자’,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과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신 것과 공생애에 들어서서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셨는데 바로 그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 분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그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고,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을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래서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됨을 여김을 받을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그 분이 바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약에서 희미하게 비춰졌으니 보통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사랑이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몸 입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희미하였으나 이제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여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 질병과 가난, 고독과 소외감에 사로 잡혀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이고, 인간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시고, 그들을 가족처럼 받아주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인격과 보이는 육체의 삶을 통해 드러내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그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지난주에 학교가 종강을 했고, 늘 하는 것처럼 저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을 채점해야 했습니다. 이번 학기에 제가 가르친 과목은 ‘기도’였습니다. 그 중에 스무 살 난 어느 한 여학생이 답안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교수님 저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깊이 앓았습니다. 손목을 면도칼로 수없이 그었고, 그리고 감옥 같은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에 뛰어들었으나 구조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저는 하나님을 지독하게 대적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학기에 들어와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1분도 기도할 수 없었던 제가 이제는 간절히 5분이나 계속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우울증과 공황 장애를 앓고, 수없이 손목을 그어 목숨을 끊으려고 하고, 보통 사람의 담력으로 한강에 뛰어드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원망과 미움 속에 살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지금은 이렇게 사랑하게 될 예수를 그렇게 대적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여러 방식으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제 2, 제 3의 원인들이지 제 1의 원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를 불행하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그 풍랑을 인하여 오히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 혹은 질병에 시달리지만 그 풍랑 인하여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갑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하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으로 내려 보내셨으니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시고, 가르치신 것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그분이 설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신 그 섬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찬란하게 드러났고, 그분이 멸망당할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는 불꽃처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인간의 믿지 아니하고자 하는 불신앙의 고집만 없다면 누구든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고 싶다고 주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랑은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기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돌아올 수 있도록 그분을 보내셨고, 그분의 생애를 성경에 기록하셨고, 그 기록으로 설교하게 하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B. 우리를 살리려 하심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정확하게 말하면 “살게 하시기 함이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시니라’고 하는 이 구절은 희랍어 ‘히나(hin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히나’는 영어의 ‘because’와 같은 강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하난미은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전까지 죽어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죽어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는 허물과 죄 때문에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육체로 태어난 인간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말입니다. 한번 죽은 육체는 살아나지 아니하고 썩어서 흙으로 사라집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29년, 할머니 떠나가신지 23년이 되던 해에 정겨웠던 두 분의 묘지가 도시 계획에 들어가 이장을 하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들과 함께 그 무덤을 파고 이장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연히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 돌아가실 때 자신은 평생 얽매이며 살았으니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베옷을 입히고 묵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유언을 따라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혀 드리고, 그리고 줄 없이 관에 조용히 눕히고, 빈 틈새만 메워서 시신이 흔들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관, 그 옷, 그리고 그 무엇인가 하다못해 할머니 쓰시던 뭐라도 넣어드렸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앙상한 유골만 남았습니다. 49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골이나 23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생각보다도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번 죽은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유골을 수습하여 분골하여 유리 항아리에 넣어 선산 납골당에 보관하였지만 그곳도 여러 세월이 흐르고 나면 흔적 없이 모두 원소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육체의 끝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말은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영혼이든 선한 영혼이든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결핍입니다. 영혼의 죽은 상태는 사랑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우리가 태어났을까요? 세상은 이유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 뜻도 없이 만난 것일까요? 그렇게 뜻도 없이 만난 사람들이 왜 함께 얽혀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혹은 세상에서 얻기 쉽지 않은 기쁨을 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으며, 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를 빚어가는 이 신비한 만남의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영혼이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삶을 삽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6장 1절에서는 ‘죽은 행실’, 곧 ‘죽은 영혼의 육체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죽어 있어서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할 때 그것은 수많은 악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은 사람은 마음으로는 진정 고매한 삶을 꿈꾸지만 실제의 육체로는 저열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진심으로 자기가 낳아준 이들로서 공경해야 하지만 그 부모를 야멸차게 미워하고 원수처럼 대하고 의절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사랑하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버리고 추루한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모양을 닮아 자신의 몸으로 태어난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본능이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하찮은 짐승에게도 주신 본성인데 이것을 저버리며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의 행복을 짓밟아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죽은 영혼에서 비롯되는 악한 행실입니다. 그리고 잠시는 그렇게 해서 행복할 지도 모르나 일평생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던 죽은 영혼의 상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은 이러한 인간 욕망의 난해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명이 없을 때는, 다시 말해서 그가 영혼적으로 죽어 있을 때는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 대신 저열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부간에 신의와 사랑을 지키고, 자녀를 전심으로 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에 가깝기 때문에 비교적 덜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 듯 부어지기 전까지는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없고, 그는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듯이 영혼이 죽은 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있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밖으로부터 옵니다. 죽음의 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이 없고,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이라는 사실과 지금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현실,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정신과 영혼의 상태가 그대로 자기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이런 것들이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수없이 번져갑니다. ‘못 살아도 괜찮아.’, ‘남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하며 살아.’ 어느 사이트 불륜을 조장하는 세계적인 사이트에는 이렇게 글이 떴습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바람피우세요.’ 그 사이트가 해커의 공격을 받아서 모두 털려서 그 명단이 이제 공개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이 협박을 받고, 가정이 깨졌습니다. 사회적인 명예와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 이런 것들뿐입니까? 어느 한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미국에서는 상당한 돈을 내면 500만원, 천만 원 정도를 내면 그럴싸한 자동차를 창고에 넣고 해머로 두드려 부술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에든 복수심과 증오심을 해머로 그럴싸해 보이는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고 철판을 박살내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런 속에서 사람들은 성적인 쾌락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우리의 이 고통의 증상들을 완화할 수 있을까요?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고, 자신을 정당화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죽음의 증상이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영원히 그 죽음은 그의 마음과 정신, 삶, 행동 속에 넘치게 역사합니다. 완전히 죽은 자처럼 살기까지 죄와 죽음의 기운은 멈추지 않고 인간을 덮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해서 삶의 허무와 고통을 잠시 잊어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마치 인생의 커다란 사상이라도 되는 양 포장을 하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헉슬리라고 하는 미국의 위대한 작가, 유명한 작가뿐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스티브 잡스까지 그들은 젊은이에게 마약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실 세계에 탈피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맛보는 것이 인생의 삶을 비옥하게 한다고 가르쳤고,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책이 될까요?
요즘 독감이 무섭습니다. 유의하십시오. 어제도 병원에 갔는데 약 29여명의 환자가 독감 때문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지독한 독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독감이 걸리면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온 뼈마디가 쑤시고, 콧물이 쏟아지고, 눈물이 나고, 심하면 귀에서 소리까지 들리고, 엄청난 고열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연세 드신 많은 분들은 독감에 돌아가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궁극적인 이유는 눈이나 귀, 코, 뼈마디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독감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져서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해결의 길은 무엇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서 주사를 맞아서 항바이러스제를 주입하고 그래서 핏줄을 타고 들어가서 온 몸에 있는 바이러스와 맞붙어 싸워 그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콧물도 안 나오고, 뼈가 쑤시지도 않고, 온 몸의 열도 그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손해를 보는 측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죄라는 바이러스 증상은 여러분들의 비참한 상황들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바이러스를 근원적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흐르는 콧물을 막기 위해서 애를 쓰고, 뼈마디가 쑤시고 아픈데 뜨거운 찜질로 해결해 보려고 하고 신신파스를 붙입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몸속에 바이러스 균이 죽기까지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자기를 퍼트려 여러분 몸 전체를 독감 바이러스로 가득 채워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을 공급받으며 사는 것이 이 죽음의 기운을 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바로 우리의 영혼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하나님에게 아쉽기에 우리에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가르칩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마다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려서 그 모든 죽음의 증상에서 해방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꿈꾸던 고매한 삶 대신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소중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을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이유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우리가 잃어버린 그 생명을 우리에게 다시 주시게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의 구원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분 곁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서 불순종과 죄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한주동안 충분히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에게 충만히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불러주시기 위해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감격스럽게 느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에게 그 모든 죽음의 증상에 집착하는 대신 그 속에 있는 죽음을 가져오는 근원적인 병의 원인을 고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과 사랑을 주사하려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것을 뿌리치고, 지독하도록 온 몸에 돋아난 죽음의 기운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징조들과 싸우며 하나님 원망하고 죄 지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그 길로 계속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불행합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보지 못했던 곳을 구경하며 다녀도 그것은 잠시 잊는 것뿐입니다. 생명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나같이 미약한 설교자를 불러서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향하여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살리려 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내 아들 예수가 너희에게 온 것이라. 너희는 그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살게 하십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충만한 생명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덜 주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활동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병든 몸이 되어 세상처럼 세상 사람처럼 살지도 못하고, 신자답게 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도 불행하고, 저렇게 해도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삶을 계속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삶의 끝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당신이 필요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삶을 죽은 자처럼 이어가는 여러분들이 너무 가엾어서 여러분들을 살게 하시려고 당신께 부르십니다. 오늘 그분께 돌아가 이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무엇 때문에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생명이신 당신이 육체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기쁜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이 충만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