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는 하나님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늘 생명으로 살리려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혹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필요한 것들을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나타날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Ⅱ.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사랑을 이루셨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읽은 이 본문은 한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이 사랑하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인간도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고 예쁜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라고 한 말씀은 그러한 사랑 비슷한 모든 것들을 밀쳐 버리며 그 참된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특히 인간을 창조하여 사랑의 대상을 가지시기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셨고 그 하나님은 서로를 인격으로서 완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 사랑할 대상이 없어도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실 수가 있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이러한 당신의 사랑을 통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기를, 마치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함이었고,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본 받아 인간들이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여기는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창조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사랑이 모든 피조물 중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창조와 구약의 선택, 하나님의 인도, 보호를 통해 나타난 사랑은 앞으로 나타날 위대한 사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당신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공표하셨습니다. 이 모든 동산에 있는 실과는 너희 마음대로 먹되 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이러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총으로 나타났습니다.
세 가지로 나탔는데, 첫째는 형벌, 즉시 반드시 죽어야 할 인간을 집행유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는 반드시 죽지만 즉시 죽게 하시지 않으시고 살아있는 동안 자손을 번성하여 이 땅에 인류를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을 무효로 돌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남아있는 인류 중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제사의 제도를 계시하시고 그 제사를 통해 한시적이나마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죄에서 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약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로부터 수많은 구약의 백성들이 언젠가는 이 모든 하나님과의 불화를 깨고 그 상태는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완전한 복락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원래의 그 사랑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사랑이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사람들이 사랑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온 인류를 그 한 사람 안에서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에서 선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니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비록 희미한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은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가기에는 충분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이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약에서 희미했던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눈부시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니 사도행전 3장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만약 하늘로 쏘아올린 불꽃놀이라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은 어두운 밤하늘 정점에서 눈부시게 작렬하는 그 불꽃의 폭발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고 하나님은 그래서 이제는 희미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어두운 하늘에 눈먼 자도 볼 수 있도록 작렬하게 눈부시도록 빛나는 불꽃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확증하였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추가적인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해 졌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도록 비춰준 그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는 것처럼 눈부신 정점의 폭발이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하나님의 사랑에 눈감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혹은 누명을 썼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맨 눈으로 보아도 모두 보아도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이성적인 추론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온 인류가 사대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의 올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이나 함께 먹고 자며 공들여 말씀을 가르친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순간에도 그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번영하여 그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당신의 영, 성령이 오시자 그들은 비로소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한강에서,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서 세계적인 불꽃놀이가 이루어집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미디어를 통해 보면 그 불꽃놀이는 굉장합니다. 아마도 수억, 또는 10억 이상의 아주 고가의 불꽃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우리는 그 불꽃을 보며 마음속에 새로운 정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신경이 죽은 사람은 폭발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으나, 그 찬란한 불꽃은 단 하나의 줄기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여러분들이 질문하였던 것에 대한 답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은 오늘도 그 사랑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어두운 영혼을 고쳐주셔서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도록 눈부신 그 사랑의 불꽃을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십자가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도 그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인류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 최고의 방법으로 당신이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주신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눈부신 당신의 사랑을 더 이상 증명하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여주셨다면 그 다음 여러분들의 의무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믿음으로써 예전에 그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스스로 어두운 길을 걸어 불행히 살았던 날들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그 사랑이 아닌 잘못된 사랑을 버리고 참 사랑인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구걸하시겠습니까. 그 분 자신이 무한하고 완전하시기에 누구에게 사랑을 받으실 필요도 없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으셔도 당신은 모자라신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채찍을 드시는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노래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위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1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길이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사랑 안에 태어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또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며 진정한 인간이 되어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엄마, 아빠가 서로를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가 보며 성장해야 합니다. 자란 후에는 좋은 형제간들을 만나 서로 사랑하고 친구들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한없는 사랑을 받고 거기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나이든 후에는 자녀들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소설에서도 그러한 사람은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는 그러한 사랑의 환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모든 사랑이 하나의 그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온 것인데, 사랑하는 자나 사랑을 받아야 할 자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니 어디에서 그렇게 사랑할 사람이 솟아난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그냥 내버려 두셨더라면 인간은 거의 짐승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전히 인간의 양심 안에 그런 희미한 사랑의 본성을 두었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버리지만 어떤 부모들은 생명처럼 자신의 자녀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자란 사랑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완전한 그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구겨지고 모자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신 채우셔서 그래서 비록 망가졌으나 고치시고 상처를 받았으나 영광스럽게 하시고, 수치스러웠으나 다시 소망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면서 살아온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좋게 해 주신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좋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의 그 사랑 함께 하시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자 같지 않아서 죽을 것처럼 된 자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피 묻는 십자가를 붙들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내 사랑하는 것을 좇아, 내 좋은 대로 산 결과였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땅으로 걸어간 이유였습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을 버리고 스스로 오류와 무지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빛을 받았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참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성령이 그 사랑을 증거 하였기 때문에 이제 바깥에서 빛나는 찬란한 사랑의 불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작렬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랑에서 멀리 떠나 이미 걸어갔던 생명이 없는 그 어두움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 자신이 행복의 근원이기에 당신 자신에게로 모든 인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부름받은 인류 중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B. 화목제물로 보내심
마지막 두 번째는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겠습니까. 요한일서 4장10절은 하반절에서 이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화목제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의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는 제사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은총으로 바뀌게 된다고 로마서 3장25절에서 말합니다. 원래 화목제물은 화목제에 바쳐진 희생제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레위기 7장에는 바로 이 화목제사에 대한 상세한 규례가 나옵니다.
이 화목제사는 크게 세 가지 동기에서 드려졌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동기에서 드려진 감사제사가 있었고,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헌신을 뜻하는 헌신제사가 있었고, 마지막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것을 약속할 때 그 신실성에 자신을 묶기 위해 드리는 서원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제사를 포함하는 화목제는 결국 화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화목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불화를 전제로 합니다. 불화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목하면 거리감이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늘 그립고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화하면 살갗을 마주 닿아 있어도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 떨어있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이 불화가 주는 것은 거리감입니다. 불화하면 서로 반감을 갖게 되고 거리감을 갖게 됩니다. 당연히 그 거리감 속에는 친밀감의 상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은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다시 불화한 두 당사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화목입니다. 이 화목이 원래 구약의 제사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화목이 구약에서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원래 온전한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식은 빵입니다. 우리처럼 속에 단맛 나는 팥이나 꿀이 들어간 빵이 아니라 아무것도 넣지 않는 그냥 커다란 빵입니다. 그 빵을 꽤 큼직하게 만들어서 팝니다. 집에 구워서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빵집에서 빵을 사다가 먹습니다. 그때 배가 고프거나 식구가 여럿이어서 큰 빵 하나를 원할 때는 히브리말로 ‘텐리 샬롬’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빵집 주인은 빵틀에서 나온 온전한 빵을 포장하여 줍니다. 혼자이거나 양이 적을 경우에는 반만 달라고 말하는데 ‘텐리 핫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칼로 빵을 반을 갈라서 줍니다. ‘샬롬’은 그처럼 온전한 것, 흠집이 없고 훼손되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의해서 훼손됩니다. 그것들을 인간 자신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화목제사를 통해서 희생제물을 보고 헌제자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온전한 관계로 만들어 주십니다. 물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었던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인데, 이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사람사이의 화목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자신 안에, 이웃과의 관계 속에 구현함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샬롬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 어울리는 번역어가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 말에 ‘안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 중 가장 샬롬에 가깝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말의 어법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후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안녕하십나까”라는 말은 “안 죽고 사셨네요.” 혹은 “큰 일은 안 당하셨네요.”라는 의미로 바뀌어졌지만, 원래 안녕이라는 말은 이렇게 몸과 마음의 모든 상태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참 인간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사람들은 그 화목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안녕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관계에서 안녕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화목의 효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목을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속하는 제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화목제사가 필요했는데 이 화목은 반드시 죄 지은 자를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리고 이웃과의 화목을 깨뜨린 자의 죄를 대신해서 죽임당하는 희생제물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화목제물이 희생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다주는 화목의 효과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런데그 화목제만으로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주시고 싶으셨던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히 단번에 드려져 무궁하고 완전한 화목을 가져올 화목제사가 필요했고, 거기에 바쳐질 제물은 매우 매우 특별한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바로 이 제물로 바쳐지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가 따로 있고 바쳐지는 제물이 따로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헌제자가 되어 자기의 몸을 스스로 헌제물로 삼는 독특한 제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그 속죄가 화목을 위한 대속이 영원하고 완전한 성질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무한히 큽니다. 행위로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지만, 의미로는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반역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고, 중국을 여행하면서 저 스스로 발견해 낸 예화를 즐겨 사용합니다. 어떤 파출부가 남의 집에 와서 집안을 소제하다가 그 집에 가장만 앉는 응접실 중앙의 화려한 소파에 한번 청소복을 입은 채로 앉아서 몸을 끄덕끄덕 움직여 보았습니다. 마침 집에 들어오는 주인 아주머니께 들켰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당연히 “거기에 앉지 마세요. 우리 남편 나리입니다.” 그러면서 그날 기분이 상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다음날 용역회사에 전화해서 그 아주머니 싫으니 그분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앉은 의자가 황제의 의자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청소를 하려고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꼭대기 올라가서 먼지를 터는 것까지는 허용이 되는데 거기에 청소복을 입은채로 한번 앉아서 양쪽 팔걸이에 손을 얹고 온 몸을 뒤로 재끼며 ‘에헴’하는 그 순간 황제가 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형입니다. 왜 입니까? 똑같은 의자인데 거기에 앉은 의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따 먹은 선악과가 남의 집 과수원에 있는 과일이었다면 욕이나 먹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달랐습니다. 결국 그 죄의 결과로 온 인류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죽음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고 죄가 온 땅을 뒤 덮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본래 아름다운 영광의 상당한 부분을 상실하고 인간이 죽도록 고생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겨우 먹고 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총명하게 알던 사람이 그 총명의 빛 되신 어두움의 그늘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무한하였기 때문에 속죄의 가치가 무한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화목제물은 죽어야지만 제물로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흠없는 제사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셔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밖에 없었고 그 아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지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완벽한 화목속에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셨고, 생명이신 그 분이 죽음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자기같은 죄인을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언제나 그를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입은 사랑이라는 의식이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현재적으로 느끼는 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실제적으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완전하신 아들을 보내어 무한한 속죄를 이루시고 영원히 단번에 우리에게 화목을 주셨다면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불화한 상황은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자기 아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부모를 떠나 돈을 훔치고 가출하고 죄를 짓고 결국 부모의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찾아옵니다. 다시 부모는 자식을 전심으로 사랑하지만 자식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또 다시 가출을 시도합니다. 그것입니다. 주님과의 불화는 주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여러분들을 온전히 화목하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주님의 품을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불화를 경험하는 것이고, 그 불화속에서 영혼은 그 샬롬을 잃어버리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미워하고 원수맺고 악한 말을 토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여겨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말의 칼로 찌르고 상처의 창으로 찌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데서 오는 불행입니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책임 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과의 화목으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화목제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수많은 화목제물이 드려졌으나 이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 화목을 위하여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게 하신 후 죽기까지 복종하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심으로 열어놓으신 화목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바로 자기같이 무가치한 인간을 위해 무한히 가치가 있으신 독생하신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화) 저는 결혼 하고서 6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으로 한 번도 조바심 내 본 적이 없고, 또한 반성해 보면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절실하게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별로 아이를 좋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좋은 것이지, 그렇게 너무 애써서 아기를 가지려고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절반은 위로의 말씀이셨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6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정말 기적적으로 7년만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12월에 태어난 아이를 이듬해 4월 부활절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잠시 교역자 생활을 쉬고 있는 몇 달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이에게 세례를 주시고 이어서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뼈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기까지는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는 하였고 눈물도 흘렸지만, 그렇게 뼈를 후벼 파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품에 있는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무한히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생각하니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는 예배당의 기둥을 붙들고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였습니다.
(예화) 아프리카의 선교에 헌신하였던 한 선교사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였지만 열매가 별로 없었고 열정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풍토병으로 순차적으로 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선교사는 깊은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일학교부터 외었던 이 평범한 성경구절이 이 선교사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 온 영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그러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증언하는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신자는 모두 한때 이 엄청난 사랑 때문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발에 짓밟혀 뭉개져도 가치가 없을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그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의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생애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 분이 이 세상의 비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 분이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책임인 것처럼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취급을 받으며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눈물로 사랑하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불화하게 살아가는 불행한 여러분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자기를 주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강요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자기를 주심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랑에서 돌이켜 완전한 행복에 이루게 하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합니까?”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어 제물로 죽게하기까지 너희에게 화목을 주었다. 너희는 그 화목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화목을 등지고 생명 아닌 것들을 찾으며 그 사랑 아닌 것들에 현혹되어 인생길을 걷는 여러분들의 허무함은 지금 슬픔과 고통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떠난 여러분들은 티끌만큼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마취 기운이 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마약의 기운이 떨어지고 나면 보다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불행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화목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빛을 떠나 어둠으로 가고 행복을 떠나 불행으로 멀어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통해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대의 크리스마스는 미국 자본주의에 의해서 모두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우리에게 진정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불화해진 것은 우리가 그리하였으나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갈 아무 길이 우리에게는 없었는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의 길을 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아기 예수의 오심을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보면 그 죄없고 흠 없는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제물이 되기까지 걸어가셔야 할 그 인생의 길은 얼마나 아프고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겠습니까. 자기 땅에 오셨지만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던 이유도 결국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이 주시는 메시지는 두 개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목 때문에 모든 불행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 속에 안녕이 이루어지도록 화목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화목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가 돌아가야 할 그 하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의 눈부신 절정이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고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그 찬란한 빛은 영원한 별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큰 희생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내 아들을 깨뜨려 너희에게 화목제물 삼았으니 너희는 그 피로 나와 더불어 화목을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곤고한 자들은 하나님이 다시 평안을 주실 것이고, 죄 지은 자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용서하실 것입니다. 표범은 자기의 빛깔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구스인도 어떤 비누칠로도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목의 제사의 이 피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불행할 운명에서 행복할 운명으로 바꾸십니다. 이 성탄절에 주님께 올릴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렇게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이미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을 뜨겁게 살아가며 그 화목안에서 안녕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