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가끔 기쁘게 하는 수많은 사랑들이 있으나 이것은 그 사랑의 오해된 파편들입니다. 하나님은 의심할 수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자기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모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보여주셨고, 마지막 화목 제물로 죽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희망은 이 화목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II.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A. 서로 사랑하며 살라
오늘 우리가 읽은 짧지 않은 이 두 구절은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오늘 성경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하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을 누리게 하신 것은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우리 속에서 흘러가 모든 세상을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그리스어로 ‘오페이로멘(opeilomen)’ 이라는 단어이고, 이 단어는 원래 ‘빚지다’ 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재물을 빌림으로서 채무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가 생깁니다. 그것은 돈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았고, 그것은 마치 빚진 것과 같아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에서 어떤 위협으로 우리에게 가하는 요구가 아니라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은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 때 그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신자가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두 개의 사랑 같지만 대상이 나뉠 뿐 ‘그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할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모든 인류를 바로 이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바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의 시원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사랑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시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으니 사랑은 두 대상이지만 한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장점이나 유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서 시작되는 사랑은 기껏해야 영원한 그 사랑을 흉내 낸 인간의 반짝이는 이성의 빛, 감성의 빛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니 그 사랑의 주체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인데 거기에 어찌 영원한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며, 그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때 이미 그렇게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이유입니다. 머리로는 그 사랑으로 그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내게는 그런 삶을 살 자원이 없으니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강화시키도록 주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 있는 은혜에 대한 갈망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너희는 서로 사랑하며 살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 선택이 아님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고, 사랑하며 살지 않는 그 삶은 사실 우리의 삶의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성해 가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도 함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서로를 사랑하며 살기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B. 사랑을 온전케 하라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육신의 눈으로 그 분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은 육신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유별난 방법으로 하나님을 감각으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신 일상적인 방식이 아니고 대부분 신뢰할 수 없는 주관적인 느낌들입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격체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성품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홀로 가지고 계시는 성품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성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 자체로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의 다양한 성품을 인간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의 어떤 빛들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시간이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주십니다. 끊임없이 변덕스럽게 변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잠시적인 존재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이 불변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십니다. 비참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긍휼을 보여주시고, 또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불완전한 세계, 그리고 죄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오히려 무한함을 드러내시고 완전한 당신의 도덕적 성격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성품을 알고, 이 성품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유일한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계시를 받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많은 성품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창조물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을 이 세계 속에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도 빛났고,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허무한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성도 눈부셨지만 사랑은 더욱 빛났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국 인간의 죄와 그 죄의 비참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은 자연계보다 도덕 세계에서 더욱 뚜렷했습니다. 그러한 죄와 비참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탁월하도록 눈부시게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눈부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찬란하도록 전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찬란한 수많은 사랑의 불꽃의 최고봉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책들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이 신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남과 지상의 생애, 죽음과 부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먼저 구약을 봅시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동행함’이라는 단어로 묘사됩니다. 창세기 5장 22절은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 에녹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동행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탁월한 평화 속에서 그분을 향하여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아니함으로 그렇게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림처럼 기독교를 대변하는 상징이 있는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세례는 한 사람이 물속에 들어감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그 물에서 나옴으로 예수와 함께 사는 그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예수와 운명을 함께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면, 성만찬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것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의 몸과 하나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와 함께 영적인 한 몸이 되었음을 표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라고도 표현하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은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상) 고 말합니다. 그 영적인 연합의 본질은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이 영이신 그리스도와 영혼을 가진 우리를 서로 연합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분여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연합은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간 연합입니다.
천상에서의 사랑은 흠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천상에서의 사랑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법이 없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바람 부는 날에 두 손을 가리고 있는 촛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자신만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은 모두 주님 때문이며 어떠한 때도 내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견고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놓으셔도 된다는 고백을 가질 정도로 대담한 신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보다는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없으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은 갖게 하셔서 충만한 사랑 속에서 충만한 겸손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하). 왜 그럴까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누구에게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나는 오늘 이 소중한 설교 시간에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본주의 후기 시대, 그리고 이성주의가 무너진 탈근대시대를 아무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사람들은 의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데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도덕이라는 미명하에 부모 공경에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이 고통 받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과연 이것이 엄마 아빠의 의무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국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은 논의들이 오고 갑니다. 그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의 망들이 구축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은 이런 무너진 도덕의 가치들이 무너진 이 현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을 요구합니다. 그거 하나에 대한 답이 해체주의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정당화시키는 사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 결국 모든 도덕적인 의무와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결국 사랑이 부족한 것, 그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사상이나 이런 가치가 무너진 현실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사랑이 모자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사랑이 필요 없는 때는 없었고, 너무 많은 사랑이 있었던 적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누구에게 사랑받으며 살고 있을까요? 노바디. 아무에게도 사랑받으며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요? 더욱이 왜 한때는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살지를 않는 것일까요?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체험은 은혜의 정동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은혜의 정동을 통해서 우리들은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스치고 지나갔더라면 아무 인연도 없었을 남녀가 만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한순간의 시선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들을 함께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참 예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은 고요한 수면 위에 던지는 돌멩이 같습니다. 그 돌멩이 때문에 출렁거리는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출렁거립니다. 살면서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합니다.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며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 한 번 파문이 일어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삶의 접촉점들을 통해 사랑의 감정의 파동이 치고, 이것들이 반복될 때에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결점, 예전 같으면 한 번에 헤어지게 만드는 결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 사랑을 흔들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스치고 지나갔더라면 남이었을 그 사람을 나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처럼 느껴지도록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랑의 감동이라는 파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감동의 파장이 없이 긴 세월을 보냈다면 오늘 헤어지고도 밤에 편안히 잘 수 있고, 내일 아침에는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해야 할 때 눈뜨는 아침은 얼마나 생경스러운 아침일까요? 그가 없는데 아침이 밝았고, 그녀가 사라졌는데 태양이 떴습니다. 얼마나 낯선 세상일까요? 물론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예로 든 것입니다만, 사랑 그 자체의 방향은 달라도 육적사랑이나 은혜의 신령한 사랑이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한 사람이 현재적으로 주님을 곧게 사랑해서 웬만한 시련에 흔들리지 않고 웬만한 사람들의 결점 때문에 마음의 요동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은 오늘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야가 ‘아침마다’ 고백하는 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현실과는 상관없이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성실하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인자, 곧 ‘헷세드’ 속에서 그런 성실하심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사랑에 대한 매일매일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의 정동을 경험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크게 파도칠 때 다른 아무것도 또 다른 파도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할 때 수많은 것들은 수많은 방향에 파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자가 생산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 신자가 될 때는 이 사랑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심겨집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은혜의 경험과 지식의 새로운 발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은혜의 정동을 통해서 점점 더 온전한 사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지만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그 사랑도 있고, 그 사랑이 아닌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할 사람은 미워하고, 미워해야할 것은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이 즐거워야 할 대상은 힘겹습니다. 많은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리고 자기를 얼마나 부인했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 안에는 희생도 없고, 자기 포기도 없습니다. 이것을 야고보 2장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은 하나의 사랑으로써 자기를 사랑하신 사랑이며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참된 사랑은 자기와 남을 구분할 수는 있으나 나누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몸과 같이’ 라는 미묘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잊히지 않도록 예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저녁쯤 매우 허기졌습니다. 집으로 빨리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꺼냈습니다. 배는 고프지만 맛나게 먹고 싶어서 부지런히 요리를 했습니다. 얼마 후 아주 정성껏 차려진 밥상이 우리 앞에 있고 그리고 우리는 예쁜 등불 하나를 켜놓고 혼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밥 한 그릇에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을 때 감미로운 식감과 그리고 느낌들이 온몸에 짜릿하도록 전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내 입을 위해 나의 팔과 발이 많은 희생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에는 희생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예전에는 이 찬송을 부르면 참 예쁜 소리가 났는데 이제는 잘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은 당신을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써 자신이 손해를 본다든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애매하게 희생이 되시든지 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생명이신데 죽고, 우리는 죽음에 처해야 할 인간인데 살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그분에게는 당신 자신이 사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일 중 아무것도 희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하여 행하는 것으로써 너의 유익이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네가 내 사랑의 원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사랑의 원인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아직 그런 온전한 사랑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그 사랑 앞에서 우리의 사랑이 잘못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거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사랑을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 때문에 그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담지하고 있는 내가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완전한 사랑이 나의 인격이 담기는 순간부터 그 사랑은 결핍의 요소와 오염의 요소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순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오늘날 그 힘든 삶을 살아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쉬운 삶을 선택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 특히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많은 글을 쓰는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다방면에 가지고 계실 것이다 믿었던 분이 이어령 교수입니다. 딸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고 신앙 고백을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매우 큰 병에 걸리셔서 힘겨운 투병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 분이 병석에서 들려준 한 토막의 이야기는 제 가슴을 크게 울렸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우리에게 큰 비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늙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두 번째는 늙은 사람이 잠시 후 곧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그까짓 인간의 사랑이 그리우시다면 그분이 어찌 신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쉬운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이나 이성, 감정의 구조를 가지고 자기의 몸처럼 타인을 생각하는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개가 선녀가 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일을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수행하십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들을 변화시켜서 그 위대한 철학자들도 일평생 도를 닦은 수도사들도 이르지 못했던 그 사랑에 단박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빛으로 교환할 수 있는 성질의 신령한 정보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십니다.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최초의 최고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펄펄 살아있는 자기 사랑으로써 의무라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족쇄입니다. 제가 미래에 대해서 한 가지를 예고한다면 결혼하는 비율이 점점 낮아져서 이제 결혼하는 사람들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랑의 힘을 어떻게 터득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런 사랑을 받고 그런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늙음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안 나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분들은 아무리 가까운 인척이라도 장례식에 가지 않는 것이 결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늙은 나이에 죽음을 직면하는 것은 남다른 고통이기 때문에 예절에서 면제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에 엄마가 아빠가, 남편의 죽음에 아내가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도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까붑니다. 자기가 곧 늙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젊음 속에서만 자신의 젊음을 보니까 까부는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까불면서 삽니다. 그런데 곧 늙습니다.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텐데 그렇게 까불며 살다가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가는 늙었을 때 자기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것을 경험하는데 그때 정신적인 혼란은 사춘기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인생입니까? 인생은 순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늙음의 빛에서 젊음을 보아야 젊음의 의미가 규명되는 것이고, 생명은 생명 자체로 보아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죽음의 빛으로 보아야지만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전 7:4)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이 아닌 조각나고 오해된 사랑의 파편을 붙들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영원한 행복일 것처럼 살 때 어느 한 순간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모든 육체의 부분들이 자기를 배반하는 현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의 지체가 자기를 배반합니다.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곱게 늙는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까불며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한방에 얻어맞고 ‘암 4기입니다. 2주 정도 사실 것 같습니다.’ 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하고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고, 방에서 벽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며 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입니까? 그리고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서 산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기억하여야 할 바입니다.
예쁘고, 키 크고, 아름답고 능력 있고, 매력 있고 모든 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젊고, 늙고, 노쇠한 것,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그 양상이 무엇이든지 인간을 인간으로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그분께로 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사랑에 이끌려 이런 저런 삶을 살며 변함없이 그분을 섬기다가 그분의 품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삶의 한 양태를 보고, 또 다른 생명의 양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동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젊은 시절 아직은 내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절에 그 사랑을 붙들고 살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대가는 너무나 크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밀려오는 그 무한한 영원으로부터의 소외의 감정은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어찌 하늘로부터 온 그 사랑을 이 땅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활기찬 젊음도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는 죽음의 기운이 생명의 기운을 이기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무대와 같은 인생의 시기를 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하게 행복하게 인생을 산 사람들의 예의입니다. 예기치 못한 질병, 불행, 사고, 죽음, 정신질환,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항로에 암초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의 파산으로 인생 전체가 파산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붙들며 살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너무 행복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이 그 예수의 손 안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 무한한 위로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사랑하나 누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고대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사랑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데 무슨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변질되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너무나 긴 세월동안 운명과 같은 영혼의 침체와 어두움 속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그만큼 비례해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살아날 때 다시 사흘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거라’ 주님 한 마디 말씀에 나사로는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은 마른 뼈도 일으켜 세우시고 죽은 지 사흘 된 사람도 반드시 3일 만에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아니라 즉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도달할 수 없으리만치 높은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허위가 아닙니다. 어쩌면 설교자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이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니 어떻게 내가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며 매일매일 이 사랑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랑이 여러분 안에 완성되어 가면서 여러분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그릇된 사랑 때문에 비참하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거의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돌아가야 할 그 사랑보다는 헛된 사랑으로 돌아가며 그 사랑의 대가로 고통을 돌려받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 그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져가면서 완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우리는 이미 그 사랑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에 끝을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심으로 나에게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이 세상의 수많은 헛된 것들을 보며 놀라고, 발견하고, 기억하고, 감동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그의 진리에 빛나는 빛깔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물결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 묘목과 같던 우리의 사랑은 거목과 같이 굳세어지는 것이니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굳세게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폭우로 가도록 부는 물결과 바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이것입니다. 완전한 평화, 그 무엇에도 흔들리거나 소멸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화목,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을 지나면서 그의 육신은 점점 쇠하여 죽음의 기운이 뒤덮지만 그의 눈은 그 사랑의 완전한 성취에 빛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기며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신자의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