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정신을 갖는 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녹취자: 장주은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생활과 육체적인 모든 삶이 지배를 받습니다.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조직체는 육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건물이 있고 모이는 사람이 있고 시스템이 있고 이런 것들은 사람으로 치면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잘 짓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면 예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인이 많이 모이면 덩치가 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그가 무슨 정신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참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그 교회 속에 예수의 정신이 깃들어야 합니다. 그 교회 속에 예수의 정신이 깃든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지체된 신자들의 마음속에 형성되는 예수의 정신의 총 합계입니다. 만약에 각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이 예수의 정신이 아니라 세상의 정신이면 그 교회는 멀쩡하지만 예수의 정신이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외국에 가 보면 얼마나 마약이 일반화 되어있는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니까 화장실에 “주사기를 쓴 후에는 휴지통에 버리지 마시고 여기에 버리십시오.”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가 마약을 합법화 한 것은 아닙니다. 걸리면 거기서도 굉장히 중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밤거리에 종이에 이만한 걸 싸가지고 와서 귓속말로 해서 마약을 팝니다. 그 사람들이 주사기를 쓰고 합니다. 보면 검거되고 마약을 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얼굴이 예쁜 자매들이 왜곡할 수 없을 정도로 마약에 중독이 됩니다. 허우대가 멀쩡하고 사람이 잘생겼는데 정신이 세속의 정신이 지배하면 말하자면 그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에 우리가 예수를 믿었으니까 우리들이 예수의 정신으로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일수불퇴입니다. 그것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딱 두 가지 뿐입니다. 배교하든가, 아니면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패와 잘못은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 행복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 이야기하듯이 음울하고 아주 우울한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늘 친구처럼 잘 지내는 릴백 총장 같은 사람들을 보면 경건합니다. 그렇게 농담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농담도 아주 품격 있는 농담입니다. 그런 것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그것을 즐길 줄 압니다. 여러분이 보면 재밌는 이야기를 해줘도 웃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가도 다른 사람을 한 번도 웃게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선적인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정적인 행복을 누리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폼나게 백수의 왕인데 죽었습니다. 그것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는 것입니다. 그 개는 지금 오늘 하루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항상 인생의 기쁨을 다른 사람을 나 때문에 기쁘게 하는 것, 나 때문에 즐겁게 하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도 아침에 김동기 전도사가 올라와서 “왜 이렇게 일찍 올라가냐? 뭐있느냐?” 했더니 “아니요. 미리 세팅하러 갑니다.” 한 사람이 와서 깨끗이 정리하고 청소하면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의 정신이 있지 않으면 교회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이 없는 그 사람 자신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한 길 밖에 없다는 마음을 갖되 순간순간 하나님이 허락하신 즐거움들을 누리고 좋아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러면서 한 방향으로 인생을 쭉 살아가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매일매일 구현하면서 살아가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누군들 편안하고 좋은 것이 좋지, 짜증나고 힘든 여건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쭉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렇게 살아감으로 예수의 정신을 구현하며 살아가고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예수의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정신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정신입니다. 오신 정신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본체이신데 그것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왜? 한번 바깥세상 구경하기 위해서 무슨 극락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사시고” 누굴 위해 사셨습니까? 예수님도 쉬실 때도 있었고 주무실 때도 있었고 잡수실 때도 있었고 교제하실 때도 있었고 예수님이 복수하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한순간 한순간 만나는 사람들 소중하게 대하시고 돌보면서 사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남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남을 위한다고 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위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배하는 전체적인 정신이 자신의 행복을 자기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이웃 안에서 거기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살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나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쓰레기처럼 살다가 갈 인생을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는구나, 그것을 정말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다루는 그 일이 항상 자신이 그 진리에 넘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깔때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름을 혹은 액체를 끊임없이 거기에 다른 그릇에 옮겨 붓지만 자신은 그것을 머금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항상 그 진리는 내가 어떤 사역을 하고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 진리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것은 신앙입니다.
제가 요즘에 와서 깊이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육의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 깊이 주님을 만난 흔적이 점점 흐려지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물론이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난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길고 긴 세월을 스터디를 인도했고 내 손을 거쳐간 학생들만도 수백 명입니다. 내가 여기서 월요일마다 가르치는 스터디의 학생들이 시험보고 들어왔습니다. 웬만하면 떨어집니다. 총신에서 한 3% 안에 드는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했습니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내 제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지만. 그런데 스터디를 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럼 그것이 소용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이냐 하면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싯돌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이파리 말린 것 같은 것을 다 가루로 만들어서 놓고 옛날에 부싯돌을 둡니다. 부싯돌도 불이 잘 나는 부싯돌이 있습니다. 그것을 놓고 합니다. 나중에 라이터 돌이 나와서 라이터 돌로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공부를 하고 하는 것들을 커다랗게 빻아놓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고 이론을 배우고 깨닫고 하는 것은 불꽃이 잘 튀는 부싯돌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때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때리지를 않으니까 불꽃이 튀지 않고, 튀지 않으니까 마른 이파리가 떨어지지 않으니까 불붙지 않는 것입니다. 부싯돌을 때리는 그것은 선생님이나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준비가 잘 안됐다면 수없이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어도 젖은 장작에 떨어지는데 그것이 불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 때 지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베드로가 만난 그리스도가 더 위대 하냐 사도바울이 만난 그리스도가 더 위대하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아무리 깊이 만나도 베드로 전후서 정도의 책을 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났을 때 온 세계의 역사와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그것이 연륜이 깊어지면서 순교할 때 쯤 돼서는 우주를 관통하는 아주 위대한 장면들이 스펙터클이 복음을 통해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은 예수의 정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정신을 다른 목사가 주거나 심지어는 자기가 읽는 책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에드워즈를 많이 공부해도 에드워즈와 상관없는 사람들 많이 있고 자기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면서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그것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만난 깊이만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그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저렇게 목회할까? 왜 저런 상황에서 리더십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사람이 저렇게 통이 좁을까? 이렇게 옹렬할까? 좀 넓게 생각을 갖지 왜 저럴까?’ 아무리 주위에서 이야기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본인 스스로 극복을 못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특히 교역자들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어울려서 기도모임이니까 의무로 참석하고 무슨 모임이니까 하고 그냥 틀에 맞춰서 돌아가는 것은 고용인을 데려다 놔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몸부림치면서 주님을 만나는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될 수 없고, 예수의 정신을 가지고 모든 교인들에게 살라고 해야 하는데 자신은 완전한 인간일 수 없지만 훨씬 더 높은 예수의 정신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여기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를 직장으로 생각하면 뭐 그리 썩 유쾌하겠습니까. 그때마다 다니엘을 생각합니다. 다니엘은 자기의 고국을 멸망시킨 남의 나라에 가서 바벨론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냈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였습니다. 다리오 왕이 자기 부하였지만 자기를 섬긴다는 느낌이 안 들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해도 세상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있고, 신앙으로 하면 조용히 걸레질을 하면서 교회 한 구석에 살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창기에 열린 교회 교역자와 직원들이 그런 눈물 나는 정신으로 섬겼습니다. 일주일을 일 년에 휴가를 주는데 다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지금도 만나면 그 때 교회에서 일할 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여러분들이 이 날들을 회상할 때 그런 회상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충만해지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