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치 말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곳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바울의 유언 고백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런 고백을 들어보고 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십자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심으로 무엇인지를 알고 그 십자가에 참 의미를 깨닫고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진실로 믿게 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기한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온전한 신앙생활을 못하고 몸은 교회에 나오고 마음은 세상에 가있고 예수를 믿고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삶이 그 모양인지 오늘 우리는 그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보고 아무리 삶을 바꾸라고 말해도 삶이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와 가치가 바뀌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바뀔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교도소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교도소에 모여 있습니다. 모여서 나가면 무엇을 다시 훔치거나 누구를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 하는 궁리를 하고 있는데 그 감옥소가 그들의 인생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도소가 오히려 경질의 범죄자를 들여보냈다가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는 곳이라고까지 심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심령이 변화되고 그리고 바뀌어서 삶의 가치와 목표가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의 모습은 바뀌지 않습니다.
여러분, 판자 집에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버스도 못 타고 다니던 가난한 사람이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 그것은 오산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것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팔자가 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인생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고는 사람이 사는 것이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래서 그 십자가의 진리가 그의 인생을 움직일 때 그는 비로소 세상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치 아니하고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에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향하여 그리하노라.” 오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나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믿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갔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 아름다운 고백을 하기 전에 자랑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할레를 받은 저희라도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할레를 받고 육체에 유대인의 표를 새겼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처럼 그렇게 떠벌리고 자랑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좋다. 너희가 할레를 받았는가. 몸에 일부를 찢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너희는 구별되었다고 말하는가. 그래서 너희들이 언제든지 그 육체를 보면서 프라이들를 갖고 우리가 이렇게 육체에 할레를 가졌으니까 이방인들과 구별된다고 그렇게 말하는가. 너희는 그것을 자랑하는가. 나는 그것 말고 자랑할 것이 또 따로 있다. 그러면서 “그러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나” 라는 말 앞에는 육체를 자랑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러나 라는 말 뒤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사람 바울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들, 지체나 신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스스로 자만하고 교만하고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자랑거리를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아니함으로,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편 17편에서 다윗은 이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호와여 금생에 저희의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여주시옵소서, 저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유산을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물려줄까. 궁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십자가를 모르고 복음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저희는 자신의 배를 하나님처럼 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배부르고 만족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며 저희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영광스럽다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뻐기고 자랑하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벌거벗은 것같이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의 육체를 신처럼 섬기며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온통 죄악과 사기와 범죄와 이 모든 음란한 것과 이 모든 죄악들이 마치 사람들에게는 훈장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진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바보 같은 사람들로 치부당하고 있습니다.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이 사람들은 온통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좀 더 즐거운 일이 없을까, 좀 더 신나는 일이 없을까, 이런 일들을 궁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둡고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반역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무관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잠시 후면 들풀처럼 사라지고 이슬처럼 사라질 자신만의 그 모든 운명에 대해서 조금도 미래를 대비할 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요, 이 세상에 바로 육체와 이생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바울이 “그러나” 라고 말할 때 그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자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게는”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신앙은 이처럼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결코 그는 신앙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바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기 전에 세상 사람들처럼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를 꿈꾸던 젊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스스로 육체를 신뢰했다고 말합니다. 그 뜻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육체에 선택된 백성의 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리라고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몸에 지닌 할레의 표와 몸에 흐르고 있는 유대인의 피와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인 열심히 자기를 구원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기 저에는 다른 사람처럼 세상에 있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난지 팔일 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할레를 받았고 이스라엘 베냐민 족속이었으며 정통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살았으며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뜨거운 열심히 있어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고 그는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가므리엘 문하에서 수하를 했고 웅변의 신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달변가였습니다. 아데네에서는 스토아 학파들과 에픽큐리어스 학파들을 압도할 정도로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이 모든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갔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그 앞에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가 하고 물어왔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그의 학식과 지식과 혈통과 할레 받은 것과 그리고 최고의 지성을 부러워 할 적마다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거기에다 자기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이런 것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련하고 무지하게 여겼습니다. 지식이 그를 교만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전에 있는 모든 자랑거리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러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바울은 이전과는 다른 삶의 원리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과 다름없이 육체와 육체에 속한 삶을 자랑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세상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만약에 내가 자랑한다고 말하면 너희들이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 내게는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뭘 자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알 필요도 없다. 내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지 않고 남이 인정해줄 수 없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자기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신앙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문을 자랑하고 재물을 자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학식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은 육체에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내게는” 라는 고백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에 특징은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치기준을 따라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를 깊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자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바람을 맞았다고 그것을 비관하고 자살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친구가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둘이 갈이 사귀었습니다. 남자 친구는 매일 여자 친구 만나서 그 여자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고 여자는 매일 자기 친구 만나서 그 남자는 왜 그렇게 멋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이 남자가 깊이 사귄 적도 없지만 헤어지기로 얘기를 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아무래도 저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해서 자기가 먼저 얘기하려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가서 저 아무개 씨 하고 말을 하려고 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잠깐만 제가 먼저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 이제 그만 만납시다. 분명히 합시다. 내가 먼저 얘기했습니다. 그러더니 나가더랍니다. 그랬는데 그 형제가 돌아와서 베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대 없는 세상이여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하면서 기분이 어땠는가 그랬더니 바지에 붙은 껌을 뗀 기분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게 자살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살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자살은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세상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렇게 자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과연 거듭난 사람이겠는가?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을 깊이 사랑하니까 그 다음에 깊은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열렬하고 뜨거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만하다고 느끼건 혹은 못 살 곳이라고 느끼건 그런 개인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세상을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와 자랑거리를 잠시라도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보다 더 화려한 집, 더욱 멋진 별장, 더 비싼 자동차, 더 호사스러운 여행, 더 월급 많이 받는 직장, 그리고 더 좋은 자리, 더 짜릿한 쾌락, 더 많은 학벌,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학력,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즐거움,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낭비, 그는 들어도 족하지 않고 눈은 보아도 차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특징은 욕망입니다. 불같이 타오르고 아무리 삼키면서 타올라도 꺼질 줄 모르는 치열한 불길과 같은 정욕이야말로 이 세상의 특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속에는 절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더욱 죄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만일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은 그것과 정욕을 한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세상에 대해서 타오르는 욕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의 불길은 너무나 맹렬해서 양심이라는 물로도 끌 수 없고 도덕이라는 물로도 그 불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법으로도 그 타오르는 욕망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이 범죄인줄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욕망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뜨겁게 타올라서 양심을 사릅니다. 그 욕망이 가슴속에 타오르니까 아버지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칼로 찔러서 죽이는 것입니다. 양심을 사르고 도덕을 태우고 지성의 통제를 마비시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율법까지도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땅의 도성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 그 시발은 한순간의 시선이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구나. 그 눈 하나였습니다. 그 눈은 보았고 보자 그것은 자기의 마음속에 호소했고 호소하자 그들은 느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하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사이에 놀라운 일치가 있습니다.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깊은 욕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을 취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범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올 때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그 믿음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이 속에 있는 모든 욕망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불살라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갈망이 온 인격과 지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드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붙드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되자 그 손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게끔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부패한 도시에 타락들을 보십시오. 끔찍한 이들이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자행되고 있고 세세상은 그런 짓들을 자랑거리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추켜세웁니다. 저는 영화나 TV중에서 특별히 외국영화를 봅니다. 왜 저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야지만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한 30년 전만 해도 그렇게 사람을 죽는 것이 신파조로 죽었습니다. 총 한방을 쏴도 빨리 죽지 않고 한참을 헤매다가 죽는 그런 것이었는데 요즘은 이유 없는 살인,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 그냥 사람들을 한없이 죽이는 것들이 미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비참하게 폭행하고 너무 너무 끔찍합니다. 톱으로 사람을 잘라 죽이는 장면, 하여튼 별의 별 장면들이 다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열광을 합니다. 비참하게 폭행하고 무참하게 때려죽이는 장면들과 말도 안 되는 그런 타락한 장면들이 오락에 유익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세상에서는 흥밋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아플 정도의 타락을 이 세상 사람들은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렇게 친구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 욕망은 서로 충돌해서 끔찍한 범죄를 낳았습니다. 가공할 타락은 더 심해지면 이 사람들의 욕망이 나라의 욕망으로 번지고 나라와 나라와의 욕망이 번지면 전쟁을 낳게 되고 그 전쟁은 수백만의 사람을 무참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들은 죽음 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육신이 호흡을 계속하고 있는 한 이 세상만이 그들의 관심이고 거기서 얻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명예와 권력과 미모와 지식과 재물을 자랑합니다. 영원을 갈망하는 영혼의 몸부림은 다 잊어버리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과는 달리 이렇게 생명 다하도록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인정해줄 수 없는 이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통하여 세상이 내게 못 박혀 있어왔다 하는 것입니다. “못 박히다”가 현재 완료입니다. 바울이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히고 세상에 대해 바울이 못 박힌 것은 갈라디아서를 쓰고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못 박혀죽으시고 자기가 다메섹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자기도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한번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오늘 계속 못 박혀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충분합니까?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놀라운 사건을 체험한 것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충분합니까? 우리가 어느 날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십자가의 보혈 앞에 한없이 펑펑 울고 회개한 것, 그것이 오늘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한번만 얘기해주면 충분합니까? 매순간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부를 때 그래, 내 기뻐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고 우리를 증거 하신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경험해야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25년 전에 못 박혀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젊은 시절에 자신을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 박혀죽은 자신은 그때만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했는지를 느끼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과 심령이 변화되어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우리에게도 매순간 순간 재현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여러 사람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 온지 얼마 안 되는 나이 드신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읽고 나서 너무 좋아서 자기 부인에게 여보, 당신도 한번 읽어봐. 아, 참 좋아. 그랬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그런 것은 당신같이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보는 것이지 우리는 그 십자가를 뗀지가 언제인데, 지금 와서 그것을 또 읽고 있는가. 여러분, 뗄 수 있습니까? 끝낼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집사가 아니라, 장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터를 닦았던 사도였습니다. 신령한 것으로 말하면 삼층천을 보았고 능력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지식으로 말하면 그는 철학자들을 무색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지식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는 신약을 쓴 사람이었고 구약을 달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디모데 전서에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건 하나에 매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혀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은혜 충만하게 받고 세상에 나가보십시오. 나가보면 충만한 은혜를 받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세상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승진도 하고 사업도 잘되어 돈도 벌고 좋은데 시집도 가는데 나는 늘 후줄근하게 매일 이게 뭔가.’ 그런 생각이 사람들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이렇게 세상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다가오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아주 놀라운 은혜가 충만한 자리에서도 세상은 가만히 들어와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 어느 집사님이 기도하면서 자꾸 방 석을 밀고 자리를 이동하는데 그 이유는 떨어져 있는 오천 원짜리를 보 고 그것을 몰래 갖고자 하는 마음에 자리를 옮기다가 찬송의 곡조에 자 신의 양심이 찔려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 사람이 받은 유혹이 바로 세 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 안에도 있다는 내용)
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예수를 믿나. 저 사람은 정신병자야. 너희들 다 목사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왜 그렇게 고달픈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가. 우리 마음속에서도 세상은 역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막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만 살아있고 우리는 죽어있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런데 세상도 살고 나도 살면 이제 짝짜꿍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만져봤습니까? 저는 취미 중에 하나가 죽은 사람을 가슴에 안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을 안아봤습니다. 그러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더럽다고 그러는데 더러울 것이 없습니다. 친구입니다. 조금 있다가 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가서 얼굴을 만져봅니다. 그리고 품에 한번 안아보고, 한번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교회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할머니가 혼자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너무 불쌍합니다. 노령으로 혼자서 돌아가셨는데 윗목에서 새우처럼 꼬부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도 없고 너무 불쌍했습니다. 사람이 꼬부리고 죽으니까 관에 넣어야하는데 대책이 안 섭니다. 세게 하면 부러지니까 그것 펴느라고 혼났습니다. 다 죽으면 엄청 가볍습니다. 여러분도 죽으면 나중에 다 알지만 대게 가볍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은 사람을 들었는데 검불 같습니다. 품에 안고 그리고 삶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아, 인생이 바로 이것이구나. 그러면서 그 할머니에게 가서 할머니, 고기를 사왔습니다. 할머니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하면 반응이 있습니까? 생시 같으면 아이고, 왜 그런 것을 사가지고 왔는가 하면서 인상을 쓰시면서 박수를 치실 분이 말이 없습니다. 왜 죽었기 때문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 앞에 갖다가 돈을 갖다놓고 밥을 갖다놓고 무엇을 갖다놓아도 말이 없습니다. 심지어 잠시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할머니께서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대답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아있습니다. 격렬하게 움직입니다. 그리고 몸부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하고 그래서 우리를 위협해서 노예로 만듭니다. 달콤한 속삭임으로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 악수하므로 죄악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랑거리에 대해서 설득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만큼은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물과 피를 다 흘리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죽어버렸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리고 죽어버렸습니다. 바울의 자아가 죽어버렸습니다. 세상이 와서 악수를 하자고 해도 바울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왜 죽었습니다. 세상이 입 맞추자고 입을 내미는데 입 맞출 수가 없습니다. 죽었습니다. 이리로 오면 좋은 곳이 있다고 하는데 갈 수가 없습니다. 다리에 커다란 못이 박아서 나무에 박아버려 죽었습니다. 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는 세상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살아있습니다. 어떤 때 살아있습니까? 내가 죽어있을 때는 세상이 나를 유혹할 때 죄에 대해서 내가 죽어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죽어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새사람으로 하여금 주를 위해서 살게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어야 합니다. 죽어있기만 해서는 안 되고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할 때는 그 다음에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굳게 박혀있습니다.
세상은 바울을 말로 유혹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손짓으로 육체를 자랑하라고 유혹하던 세상의 두 손을 바울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커다란 대못으로 누구도 뽑을 수 없도록 나무에 깊게 박아 버렸습니다. 율법을 따라 살도록 그를 이끌고 다니던 세상에 두 발은 뼈가 깨어지도록 못 박혀서 더 이상 그를 유혹하고 끌고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육체를 자랑하게 만들던 세상은 이렇게 죽어버린 것입니다. 명예를 자랑하고 권력을 뽐내고 미모를 자랑하며 얼마 되지 않던 지식과 흙덩이와 같은 제물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랑을 합니다만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런 세상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버렸던 것입니다.
육체의 자랑거리를 생각하며 살아가던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가시면류관이 박혔습니다. 세상이 유혹할 때 내가 여기 있다고 손을 들고 따라가던 그 손과 발에는 굵은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정욕을 좇아서 세상을 사랑하던 그의 심장은 옆구리를 뚫고 들어온 예리한 창끝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아버렸습니다. 바울의 자아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죽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천년이 지났어도 이 십자가의 능력은 마르지 아니하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지금도 그렇게 자기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육체가운데 있으나 육체에 매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위대한 힘을 이 십자가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들이 부자로 살다가 죽던 가난하게 살다가 죽던,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다가 죽던 그냥 살다가 죽던 십자가는 그런 것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하건 아니면 도덕적으로 높은 덕성을 지녔건 십자가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는 우뚝 서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너희가 이 십자가를 알라. 그리하면 너희가 세상 대신에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도 만족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그리고 이 세상의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중심이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임을 우리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십자가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왜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를 그렇게 미워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미워할만한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는 이 세상에 오셨고 구원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영생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이 된 것을 인하여 우셨습니다. 그분은 죄수가 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그는 자기로 말미암아 죄 있는 한사람을 석방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은 누구를 위함이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았기에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우리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사귀자로 손을 내미는 이 세상의 손이 바로 피 묻은 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그 손으로 좋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도 못 박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입 맞추자고 내미는 그 세상의 입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침 뱉은 바로 그 입입니다. 그 입으로 그리스도는 욕을 당하셨고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이 팔을 벌리고 그 품으로 와서 안기라고 여러분들에게 말할 때 여러분, 그 세상의 가슴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는 풀릴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치열한 증오심이 이 세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아직도 그 피가 마르지 아니한 이 세상의 손과 화해의 악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얼굴에 침 뱉은 그 얼굴에, 그 입술에 다시 침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 입술에 입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미워한 이 세상에 가슴에 어떻게 우리가 안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후 4세기에 부패와 향락의 물결에 잠긴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실과 정직과 금욕적인 설교로 감화력을 끼친 설교자가 한사람 있었습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스토톰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워낙 설교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코스탄티노플에 있는 귀족들이 생각했습니다. 아니, 콘스탄티노플이 여기가 기독교의 중심인데 그런 훌륭한 사람을 시골구석의 촌놈들이 설교를 듣고 있다니 우리가 모셔와야지. 그런데 사람들이 크리소스가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서 부대자루에다 크리소토톰을 집어넣어서 보쌈을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모셔놓고 크리소토톰 선생, 이제 우리에게 큰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하자 이 크리소토톰은 와서 부대에서 나와 세상을 보니까 이게 꼬라지가 가관이 아닙니다. 나오자마자 교회당부터 다 때려 부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다 걸어났던 모든 금, 은 패물들을 다 거두어버렸습니다. 강단에 있는 것도 다 뜯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두들겨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 사먹으라고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뭐 좋은 소리가 날줄 알고 아주 유명하다고 해서 불러놓고 귀족들이 와서 다리 꼬고 앉아서 비단신발을 신고 보석을 박은 슬리퍼를 끌고 와서 앉아서 부채질을 하면서 설교를 기다리는데 바로 이 설교를 했습니다. 입이 삐죽거리고 그러더니 나중에는 그렇게 와달라고 사정을 하면서 안 간다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러더니 나중에는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죽여 버리면 이 세상에 콘스탄티노풀의 귀족들이 죽였다는 소문이 나니까 밥을 안 먹여서 굶겨서 모진 채찍으로 때리고 고문을 한 다음에 사막으로 끌고 가서 죽을 때까지 끌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알려지기는 너무 지쳐서 걸어가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언의 한말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설교자가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그는 박해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세상을 그 귀족들처럼 사랑하기를 거절했을 때 박해를 받고 결국은 죽음에 넘긴바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정녕 버리려고 하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여러분, 세상을 사랑치 마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