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살리심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Ⅰ. 본문해설
핍박을 받고 있거나 또 앞두고 있는 흩어진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이 서신을 썼습니다. 이 서신을 쓴 목적은 임박한 핍박의 두려움 앞에서 그들의 믿음을 담대하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우리들이 이미 받은 구원의 아름다운 의미와 그 축복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에 2장에서는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들이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그 맥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지체 높은 사람도 있지만 남에게 고용이 되거나 혹은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 안에는 한 형제였습니다. 그들이 까다로운 상전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기자고 오늘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우리의 두 상태를 대조해서 비교함으로 우리에게 격려를 주고자 합니다.
Ⅱ. 우리의 옛 상태
우리의 옛 상태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너희가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옛 상태였고 또 우리의 옛 상태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짐승들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굳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습니다. 양은 하나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인간을 의존하는 짐승이죠. 인간에 의해 돌봄을 받고 인간에 의해서 잘 양육되어지고 사랑을 받는 가운데 성장하는 짐승입니다. 지독한 근시안과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없는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양에 비교하셨습니다.
양이 사람을 의존하면서 사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크게 네 부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존재하기만 하는, 땅에 구르는 돌멩이와 같은 무생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존재할 뿐 아니라 살아있죠. 그리고 동물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존재할 뿐 아니라 살아있고, 살아있을 뿐 아니라 감각을 가지고 있어 맛보고 보고 듣고 그리고 느낄 수 있죠.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 동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든지 돌멩이보다는 식물이, 그리고 식물보다는 각기 자기가 원하는 곳을 돌아다니는 동물이 보다 높은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류가 인간입니다. 이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있고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성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하나님 닮은 영혼이 있어서 이 영혼으로 물질의 모든 세계를 살피고 이치를 궁구할 뿐 아니라 물질 너머에 있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이해하고 하나님도 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 뿐 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계명들 까지도 상정하고 해석해서 보이는 물건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상념을 가지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진 존재가 인간이니, 인간의 존재하는 것은 이 모든 돌이나 나무나 동물들이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등한 방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는 그렇게 존재의 정도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돌멩이는 그저 있을 뿐이지만, 식물만 하더라도 제때에 비가 오고 햇빛이 나지 않으면 말라 죽어버립니다. 식물은 그래도 땅에 붙박아 자기의 생명을 이어가지만 동물은 몇 분만 코를 막고 호흡을 계속 할 수 없어도 죽어버립니다. 인간은 동물이 누리는 먹고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지 않으면 영적인 기갈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옳게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영혼이라면, 영혼이 육체의 생명이고 하나님은 바로 그 생명의 생명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창조되었지만 한 마리의 힘없는 양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모든 짐승들에 비해서 뛰어난 것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창조된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의 옛 모습이 양 같이 길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도록 창조된 존재인데,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를 주인 삼아 살아갔던 인생의 날들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옛 모습입니다. 영혼은 어두움 속에 갇혀있고, 그로 말미암아 지성은 눈멀고, 정서는 부패하였으며, 의지는 헛된 것에 굴복하고 굴복하여야 할 하나님께는 완고히 반항하는 희망이 없는 그런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길 잃은 양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환경과 나를 에워싸고 있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우리 자신 안에 간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없이 살던 길 잃어버린 양,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던 우리의 옛날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살아가는 이 암울한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가 예전에 그리스도 없을 때 어떤 사람들인지를 새카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던 우리의 모든 날들은 죄에 물들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적하는 생활들이었습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육욕에 매여 살면서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참된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살던 그런 삶들이었습니다. 복음의 빛이 비추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주인 삼으며 살았던 이 삶이 얼마나 길 잃어버린 삶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에 대한 뼈아픈 배신감을 느끼며 이제 나를 의존하며 살던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면서 살아갈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이었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부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 살지 않는 한, 자기를 사랑하되 부당하게도 자기의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고 우리의 생명의 생명은 하나님이시거늘, 하나님도 모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육체의 생명인 영혼조차도 몰라 우리의 육욕을 만족하는 삶을 살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는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 마치 목자를 잃어버리고 방황해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위기에 놓인 그런 양떼와 같았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죄악으로 가시밭길에 접어들고 거기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온 몸의 살갗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거기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거기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올 수도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옛 모습을 기억하고 그때 얼마나 그리스도 바깥에서 고통 받았는지를 잊지 않는다면 누구도 하나님께 바치는 이 순종이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고 가시밭길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거기 머물지도 못하며 온 몸이 가시에 찔리고 있을 때 우리를 거기에서 내버려두시지 않고 우리를 건져내셨으니 그로서 우리가 도달하게 된 것이 우리의 새 상태인 것입니다.
Ⅲ. 우리의 새 상태
이 새 상태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주께 돌아왔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가시밭길 속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저희들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를 그 모든 죄악의 가시덤불 속에서 건져주시고 우리 영혼의 목자가 친히 되어주셨습니다. 예전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야 할 어린양과 같은 영혼이었지만 그러나 철저히 돌보는 이 없이 마치 목자를 떠나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이 방황하고 고생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건져 내시고 당신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이제는 사랑이 많은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의 우리들의 일생은 바로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돌봄에 빚지며 살아온 일생이었습니다. 우리가 곤고하고 목마른 인생의 길을 지날 때 그분은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시련과 고통 속에 모든 힘을 잃어버렸을 때에 주님께서는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영혼의 곤고함과 목마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샘을 터 치사 우리의 마른 목을 축이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위로와 큰 격려를 주셨습니다.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능력과 진리를 위하여 외로워져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극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 그 진리의 아름다운 빛들을 우리에게 비춰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진리에 떨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속에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감정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허무한데 굴복하던 우리의 의지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충만한 은혜의 삶을 살 때에만 공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시련과 난관, 혹은 죄책감의 구렁 아래 있을 때조차도 어김없이 주님께서 목자의 마음으로 먼저 찾아와 주셔서 길 잃어버린 양 떼와 같은 우리들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주님이 주시지 않은 것들이 어디 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 중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 주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으며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며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도달한 새 상태 안에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어둠 가운데 살았던 지난날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상될수록 오늘 주님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이 날들은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때로는 우리의 죄와 부패, 때로는 환경의 깊음 속에서 우리들이 고통 받고 영혼의 갈급함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먼저 우리의 입맛을 쓰게 함으로 이후에 부어주실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미로움을 알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입니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릿고 시시각각으로 말할 수 없는 변덕스러움 속에서 수시로 주님을 배반하고 주신 바 은혜를 이 세상의 정욕과 바꾸기 좋아하는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붙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끊임없이 변절했지만 주님은 불변하는 당신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붙드셔서 여러분들은 약했지만 주님이 붙들고 계신 그 손의 강함으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여기까지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영혼의 목자이십니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의 영혼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공급해 주시는 목자의 품 안에서 사는 것 아닙니까? 시시각각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마귀의 울부짖는 소리가 굶주린 사자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할지라도 두렵고 떨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들이 그 사랑의 목자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감독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단지 우리를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때가 언제이든지간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이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불같은 시련인데도 신기하게 주님은 불을 끄거나 시련을 물러가게 하심으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주님 때문에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보다 의롭지도 않고 그들보다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적도 없는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을 붙드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우리가 잘못 살 때에는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타이르시고, 때로는 환경으로 우리를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한 달만 하나님 앞에 작심을 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내가 내 영혼의 상태의 어떠함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하며 매달린다면 하나님이 안 보여주실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그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시며 여러분들의 생활을 감독하십니다. 때로는 찔리게 하시고 때로는 쓰라리게 하시고 그런 마음의 작용이 죄로 말미암아 무뎌질 쯤에는 하나님께서 환경을 들어서 여러분들을 때리시고 어루만지시기까지 여러분들의 모든 삶에 감독이 되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섬겨야 되는지를 목회자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또 당신 교회의 양 무리들을 치는 장로들을 세우셔서 그 신령한 사무들을 총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복된 새 상태인 것입니다.
Ⅳ.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렇게 비참한 옛 상태에서 이렇게 복된 새 상태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엇이 근거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놀라운 혜택을 주신 것입니까?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바로 이 복락의 이유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그는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않으신 분이고 좋아하지도 않은 분이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고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죄인처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친히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그것도 강도들과 함께 그 시대의 가장 쓰레기 같은 인간 중 하나가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렸고 모든 백성들의 저주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그를 저주하여 나무에 매달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와는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는 죽이시고 죄와 관계가 있는 우리들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신 때문이 아니요,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형벌 받아야 할 자는 나인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당신은 죽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죽어도 다시 사실 수 있지만, 죽어있는 우리는 영원히 다시 살 수 없기에 당신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로 다시 살아나시고 우리는 속죄함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살게 하셨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받은 십자가 고난의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처음 그 사랑에서 물러났습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처음 받았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신 것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이 거룩한 고난의 의미에 우리의 마음이 묶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잊어버렸습니까? 우리가 다시 옛 삶을 사랑하고 그 상태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사랑에 싸늘히 식을 때 그렇게 기뻐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매일매일 우리의 지성을 가득 채우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진리의 빛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는 싸우기 싫어하는 군인들에게 수많은 무기처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 성도가 마음으로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달려가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 한길을 걷고 순종하기 위해 달음질을 쳤던 그 사람이 싫증 없이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러분들이 은혜에서 물러나고 뒤로 미끄러졌을 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린 아이처럼 늘 흐르던 십자가 사랑의 눈물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머릿속 에는 수많은 지식의 개념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예수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우리를 양 같이 길 잃어 버렸던 자리에서 건져 목자이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주님의 품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고난의 목적
그러면 그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는 오늘 이 고난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죽으신 속죄가 이 고난의 목적이었지만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본을 끼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그분이 어떤 길을 걸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죄를 범치 아니하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친히 지셨거니와 우리에게는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당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이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삶을 우리를 예수 닮도록 성숙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이 세상의 수많은 역경과 시련과 고난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자기에게는 죄가 없이 애매하게 다가오는 그런 십자가일 수도 있고 또 자기의 부족이나 연약함, 심지어는 자기 죄 때문에 당하여야 하는 고난과 시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주님 닮은 사람으로 성숙시켜 나갑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성품을 고치고 바꾸시며 이 성품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모든 본성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모든 삶을 바꾸심으로 우리로 예수의 향기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한 결 같이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많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지난 날 자기가 지은 죄와 악, 혹은 허물로 말미암아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짊어져야 되는 그런 십자가가 있는가 하면, 애매히 고난을 당하면서 진리를 따라 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그런 의미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따라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모든 착한 성도들을 만사형통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한때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주님을 멀리 떠나려는 인간들인지를 아셨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우리에게는 독립 유전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저를 주인 삼으면서 살려고 하는 그 더러운 유전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이것의 작용을 최대한 억제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도 항상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끔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게 하시고 고통과 죽음의 길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섬기고 살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해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더 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더 큰 능력을 주셔야 했지만 만약에 더 큰 고난도 주시지 않는다면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은혜를 주신 사람들, 많은 능력을 주신 사람들, 그들에게 남들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가게 하심으로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능력이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닥쳐 힘이 들 때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바라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뵈올 때, 그들은 자기에게 매인 십자가가 너무 크다고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은혜 안에 그들이 바라보는 그 언덕에는 주님이 친히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그 형상이 받으시는 고난의 깊이와 넓이는 오늘 자신들이 당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 몸에 성한 데 없이 채찍에 맞으시며 창에 허리 상하시며 죽어 가신 그 모습이 자기의 죄를 인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십자가가 너무 크다고 불평할 수 없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감각적인 표상의 속임 속에서 주님보다 소중한 것들이 눈에 뜨일 때마다 이 십자가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큰 은혜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오늘 사도는 혹은 피 고용인으로 혹은 노예로 살면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랑하는 양 떼들에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서 많은 고생을 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예수를 생각하라. 그분이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기꺼이 죽으신 것은 너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친히 본을 끼쳐 너희도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오거나 시련이 올 때 사람을 생각하면 미움의 정동이 일어나고 보복의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할 때 그의 영혼에는 이미 악을 당한 사람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진리를 따라 살며 주님이 끼치신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퉁이에 살아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가는 날 동안 어떤 고난이 있고 쓰라린 슬픔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분은 그 모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선하신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그것도 결국은 우리로 믿음으로 살면 이익을 얻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경륜 안에 있다고 믿고 불평과 불만을 버리고 주님 한 분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믿음의 길을 헤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취를 따르게 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예수를 많이 닮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도는 또 하나의 고난의 목적을 이렇게 피력합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산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고 자신을 향한 어떤 작용에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자극지라도 그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 일에 생명력을 발휘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찰스 스펄전의 고백처럼 우리가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고 침 뱉은 이 세상과 입 맞출 수 있겠으며 그를 때리고 모욕한 이 세상의 손과 악수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 고난이 우리 자신 속에 실제화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 때 우리는 죄진 마음을 버리고 오직 주께로 더 많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죄송하고 주님이 주신 그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슬퍼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랑이 싹 트게 되고 이 속에서 우리는 극악한 악인이나 죄인을 보면서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오직 공의로우신 주님께,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자기의 영혼까지 의탁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는 주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Ⅴ. 결론
이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충분히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우리의 새 사람을 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는 우리의 영혼을 봅니다. 날마다 그 은혜의 힘으로 강건함을 더해가는 우리의 속사람을 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강하여지고 그로 인해서 우리들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고난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잠시 나태함으로, 혹은 무분별함과 부주의함으로,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때로는 실제적인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물러났다면 오늘 이 시간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왜 죽으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복음의 목적으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에 여러분들의 진정한 행복과 참된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의 십자가로 우리를 살리시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그 사랑을 알고, 주님 앞에서 그 진리를 믿고, 주님 앞에서 그 진리를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가 진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기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은 바로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신자로서 여러분들이 세상은 매일 변하나, 여러분들은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